주민을 위한, 동시에 누구도 위하지 않는
2021년 3월, 나는 서대문구로 이사했다. 처음에는 북가좌동, 홍제동을 거쳐 현재는 천연동에 거주하고 있다. 서대문구의 세 동네에서 살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로, 특별히 ‘서대문구에서만 살아보겠다’는 계획은 없었다. 단지 삶의 흐름에 따라 이사한 결과였다. 북가좌동은 동작구의 한 옥탑방에서 살다가 직장과 가까우면서도 늘어나는 살림을 감당할 수 있는 열 평 내외 투 룸을 찾던 것이 계기였다. 홍제동은 북가좌동에서 두 해 즈음 보내고 만난 반려인과 함께 살기 위해 거처를 옮긴 결과였다. 홍제동 집은 생활에 불필요한 짐을 북가좌동 집에 둔 채, 두 마리의 반려묘와 함께 ‘들어갔던’ 상황이었다. 반려인이 혼자 살기 위해 구했던 집이었던지라 동거인과 반려묘, 나까지 사는 일이 여간 북적이는 것이 아니어서 쾌적한 환경을 모색하고자 천연동으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공교롭게도 ‘서대문구’로 화려하게 도배 중인 나의 거주 이력은 나로 하여금 서대문구 곳곳의 매력 관찰하게 하였다. 동네에 대한 사소한 관심은 동네 곳곳의 가게와 주민들의 이야기로 번졌고, 이내 이를 기록하는 동네 매거진을 만드는 일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인스타그램 채널을 ‘서대문구점’이라 이름 짓고 온라인 출판 플랫폼에 가게와 동네 사람들의 인터뷰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벌써 3년째 이어오고 있는 일이다. 그 덕에 같은 구에 속해있더라도 절대 가보지 않았을 동네를 여럿 다니게 되었다. 연희동, 신촌처럼 잘 알려진 동네뿐만 아니라 충현동, 봉원동, 현저동 등 덜 알려진 곳들까지 다니며 서대문구를 탐방하는 경험을 얻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서대문구 특유의 아기자기한 매력과 사람들의 삶의 속도를 느끼며 더욱 동네에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발견한 서대문구의 매력은 안온함에 있다. 북가좌동, 홍은동, 홍제동 등은 하천을 따라 흐르는 느린 삶의 리듬이 인상적이다. 하천 주변으로 늘어선 작은 가게들은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는 분위기를 갖고 있다. 아기자기한 카페와 식당들은 동네 손님들의 쉴 곳이 되어 함께 공존한다. 두 하천을 바라보면 유모차를 끌고 산책하는 부부, 새끼 오리를 보살피는 엄마 오리, 이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긴 사람들, 그리고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다 인사를 나누는 주민들을 발견할 수 있다. 하천 주변을 흘러가는 시간은 천천히, 그리고 자애롭게 흘렀다. 이곳에서는 사람들도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가며 자연스럽게 동네와 어울리는 풍경을 만들어 낸다. 마치 도시의 속도 단위 ‘km/h’가 지쳐버렸다는 듯 저마다의 속도로 걷는다고 할까.
연희동은 하천이 없지만, 오래된 주택을 개조한 상점들이 줄지어 있고, 주말이면 외부인들로 북적이는 핫플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연희동은 고양이 같아서 밤이 찾아오면 조용히 기지개를 켠다. 어느 날 밤, 나는 동구물어린이공원에서 만난 견주와 그의 반려견 '테리'를 기억한다. 테리가 사람을 워낙 좋아해 사람들로 붐비는 낮은 산책하기 어려워 주로 밤에만 산책하게 됐는데, 그 덕분에 견주는 연희동의 조용한 밤거리를 즐기게 되었다고 했다. 이런 작은 이야기를 발견할 때마다 서대문구를 더욱 따뜻하고 특별하게 여기게 된다.
품을 들여 동네를 취재하는 이유는 서대문구가 매일 새로운 상가 건물이 올라서고, 팝업이 열리고, 외부인으로 상가 거리가 북적이진 않지만 그 나름의 멋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자극적인 세상에 더없이 필요한 맛은 서대문구 같은 ‘슴슴한 맛’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끔은 이 모든 장면을 영화처럼 기록해 시간을 박제하고 싶은 충동도 든다.
하지만 동네를 기록하면서 마냥 밝고 깨끗한 모습만 바라본 것은 아니다. 서대문구에 드리워진 먹구름을 발견할 때도 있다. 그것은 바로 동네의 안온함을 ‘개발’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망이다. 좁은 땅에 욱여넣어 골목의 하늘을 가릴 만큼 우뚝 솟은 오피스텔이나 건너편 아파트 공사를 반대하는 현수막을 발견할 때, 먹구름이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때면 왠지 모를 무기력함이 찾아온다.
내가 살고 있던 북가좌동 집은 ‘북가좌 제6 구역’으로 묶인 재개발 지역이다. 골목은 개발 촉구를 바라는 플래카드와 개발에 반대한다는 벽보가 공존한다. 플래카드와 벽보 주변을 걸어가는 어르신을 바라볼 때면 그는 어느 쪽일까 생각하곤 했다. 힘의 무게추가 기울어질 곳은 명백하지만 분명 재개발은 주거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소식일 것이다.
골목은 좁은 대지 위에 욱여넣은 빨간 벽돌 다세대 주택들이 여럿 보인다. 나는 유독 한 집에서 나오는 아주머니를 자주 발견하였는데, 그녀는 구겨지듯 좁은 문을 빠져나와 푸들 한 마리와 절뚝이며 힘겹게 계단을 내려왔다. 그녀를 따라나서는 푸들은 유난히도 경계가 심해 집 밖으로 나서는 순간이나, 누군가를 발견하면 짖기 바빴는데 아주머니는 늘 그 푸들을 나무랐다. 그러고는 인도와 차도의 기능을 담당하는 아스팔트 골목을 열 걸음 정도 빙 둘러 걷다가 다시 댁으로 들어가곤 했다. 아마 그 푸들은 금방 들어갈 거면 나오지 말라고 짓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불확하지만 그 아주머니는 본격적으로 재개발에 돌입하게 된다면 어디로든 떠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푸들은 아주머니와 함께 따라나설 수 있을까. 위험한 철거촌에 살고 있는 유기견 가족을 구조하는 교양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북가좌동뿐만 아니라 연희 제1 구역 주택 재개발 지역과 홍제동 개미마을까지, 서대문구는 재개발 앞에서 건강한 고등학교 3학년 남학생이 된다. 졸업하면 언젠가 입대해야 한다는 사실처럼 재개발을 마주하고 있다. 재개발은 누군가에게 큰 부를 가져다주지만 그 이면에는 구겨진 집마저 빼앗기고 쫓겨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이 많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어느 곳으로도 모이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단절되어 있다. 도시의 아스팔트 아래 그들의 두려움과 외로움이 깔려있다. 아스팔트 아래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배설한 오물과 머리카락 찌꺼기를 하수도관으로 모두 밀어 넣듯 우리는 그들을 아래로, 아래로 밀어 넣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나 역시 재개발의 공포감 앞에 자유롭지 못했다. 주인아주머니는 세입자를 만나면 재개발이 진행돼도 한참이 걸릴 것이니 안심하고 지내라 말했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언제 방을 빼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겠다며 마음의 준비를 하곤 했다.
다른 동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느 날, 한 모임에서 내가 홍제동에 살고 있다고 말하니
“홍제동은 서울의 마지막 남은 보루잖아”
라며 빨리 그 주변 아파트를 매입하라고 으스대며 조언을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아파트는 내 취향이 아니야”
라고 대수롭지 않게 답하지만, 영 뒷맛이 깔끔하지 않아 집에 가는 길에 곱씹어보면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과연 아파트가 내 취향이 아니라서 외면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의 취향에서 배제한 것은 아닐까. 수억 원을 훌쩍 넘는 아파트 가격을 알고 있는 나는, 애써 그것을 나와 상관없는 것으로 치부하면서 내 취향을 포장한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천연동은 영천시장 건너편 한강 북쪽 기준에서도 값비싸기로 소문난 아파트가 자리하고 있다.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 반대편 아파트 상가로 향할 때면, 묘하게 강 위를 가로지르는 느낌이다. 천연동과 건너편 아파트 사이에 흐르는 동경과 질투의 강 말이다. 그 강이 언젠가 범람해 천연동으로 넘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오래된 벽돌 주택이 축축이 젖어 아무리 말려도 말려도 마르지 않을 것만 같다.
나는 그저 평범한 도시의 한 시민일 뿐이라 재개발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서는 아무런 힘도 없다. 만화에 나오는 거인이라면 모를까, 작은 존재인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바라보는 일일 뿐이다. 하지만 내 바람이 있다면, 많이 가진 소수를 위한 재개발만큼이나, 구겨진 집에서 구겨진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도 빳빳하게 펴주는 다리미 같은 재개발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들이 잃어버린 안온함을 되찾을 수 있도록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