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irtyfourtySimplythirsty Mar 26. 2021

내가 전에 올라가 봤던 작은 봉우리 얘기해줄까? (1)

제주 오름이라는 고갯마루

제주에는 오름이라는 동산들이 360여 개나 있다 하더라.

오름은 봉우리나 산이라는 뜻의 제주도 방언인데, 실제는 한라산 기슭에 분포하는 소형 화산체이다.

한라산이 폭발하면서 자연스레 주변에 기생하게 된 작은 화산체이자 동산들. 오름이라 하더라.


이번 한라산 등정을 위해 올레길을 엄청, 닥치는 대로 걷고자 했다.

앞으로도 10일은 남아있으니, 올레길을 실컷 걸으면 내 허벅지와 종아리는 한라산이라는 거대한 동산으로 올라가게 해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서울에서 어깨 넘어 들었던 제주로 온 하이커들이 커피를 마신다는 곳, 서귀포 남원읍의 하이커 하우스 보보라는 카페에 들렸다. 등산용품이 가득한 카페. 주인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다 버무려놓은 공간.


"커피가 맛있네요"

"부산에서 가지고 와요"

"저. 한라산 가려고요. 그래서 매일매일 올레길을 걸으려고 해요. 어디가 좋을까요?"

"음.... 한라산에 오르시려면, 되도록이면 오름을 올라서 등산에 맞는 근육을 키우는 것을 추천하구요. 한라산 둘레길을 걸으면서 한라산이라는 산의 바이브를 느끼시길 추천드려요. 올레길은 아무래도.... 길이니까요"


한라산 바이브는 어떤거지?


마음을 바꿨다.

그래. 난 오래 걷는 힘보다는 오르는 힘이 필요한 거다. 올레길을 걸으려는 마음을 접고, 오름을 오르기로 했다. 그런데 오름이 어디 있지?

지도를 뒤적거렸고, 몇 개의 오름을 무작위로 찍었다.


서귀포 성읍 근처의 영주산을 먼저 올랐고, 들어가는 입구가 아름답던 이승악오름을 올랐고, 허겁지겁 따라비 오름을 올랐다. 높은 오름이라는 이름의 정말 높은 오름도 올랐고, 이효리가 올랐다는 금악오름도 올랐고, 람사스 습지로 선택된 물영아리오름도 올랐다. 오름은 3~400m 정도의 작은 동산 같은 곳이어서 그동안 쓰지 않은 근육들을 무리하지 않고 탄탄히 하기엔 적절했다.


눈을 뜨면 간단히 식사를 하고, 두 개의 오름을 오르고 나면 약간 아픈 다리를 이끌고 근처에서 막걸리에 호박전등을 먹는 시간들이 며칠 이어졌다. 참. 한량스럽지.


날 좋은 제주의 아침엔 삶은 계란


어느 날 커피 한잔 내려서 삶은 계란과 먹는 아침에 "다랑쉬오름"과 "아끈다랑쉬오름"을 지도에서 마주했다.


"일출과 일몰이 아름다운 다랑쉬오름, 그리고 그 옆의 아끈('작은'이라는 뜻의 제주도 방언) 다랑쉬오름을 오르세요. 오름의 여왕이라고 불리우는 이곳".


'음. 내일 새벽에 갈까 봐. 내일은 6시 47분에 일출이니 5시 40분까지 다랑쉬오름에 도착하면, 정상에서 일출을 볼 수 있겠구나. 그리고 내려오면 아끈다랑쉬에 가면 되겠군. 일출을 본적이 언제였더라? 그럼 5시 조금 전에 일어나 보자'.


전날 저녁엔 파도소리가 무심하게 들리는 숙소에서 약간의 인터넷 서핑과 약간의 독서등으로 충분히 마음을 다잡고는 일찍 잠에 들었다.


몇일전 제주 현대미술관에서 본 그림.


 새벽 4시 30분. 젠장, 벌떡 일어나버렸다. 며칠 전 하이커 하우스 보보에서 구입한 기능성 등산복을 차려입고는 주차장이 있는 숙소 1층으로 내려갔더니 딱 귀찮은 표정의 20대 초반의 딸을 억지로 데리고 나가는 부부도 출발하더라.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얼마 전 내 친구의 아이가 대학을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 중에서 가장 일찍 결혼하고, 가장 먼저 아이를 낳은 친구지만 벌써 아이가 대학을 갔다니. 뭔가.... 내가 쭈글쭈글 노인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그 차의 후미등을 벗 삼아 숙소에서 다랑쉬오름으로 출발했다. 새벽 5시. 한 30여분 정도면 도착할 거라고 내비게이션이 알려줬다.


새벽의 제주도, 아무도 없는 길, 주변에 백 년은 훌쩍 넘은듯한 너울거리는 나무들. 불빛이라곤 내 차의 헤드라이트, 앞차의 후미등. 다행이다. 앞차가 같이 가다니.


휙. 앞차가 내 차의 내비게이션과는 다른 방향으로 꺾었다. 출발한 지 15분 만의 일이다.

다랑쉬오름을 가는 것이 아닌가? 어딜 가는 거지? 아..... 진짜 나 혼자인 건가? 새까만 어둠 속에 눈앞에만 살짝씩 보이는 두줄의 중앙선은.............. 로스트 하이웨이 아닌가? 아. 진짜 아방가르드하군. 크크

.


이것보다 백만배 어둡다. 제주의 새벽

 

15분 정도 산길을 더 돌아 돌아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곳으로 도착하고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라는 건가?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헤드라이트에 비친 도착지에는 공사장처럼 어수선했다.


'여기가 다랑쉬오름인데? 이상하네. 여하튼 도착한 건 맞는 것 같아'


시동을 껐다. 워낙에 시끄러운 디젤 엔진이라 시동을 끄고 나니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장례식장의 아침 같은 고요함이 덮쳐왔다. 정말 고요가 물리적으로 덮쳐왔다.

헤드라이트를 하이빔으로 돌렸지만, 헤드라이트에 비친 수백 년은 족히 넘은 듯한 나무들은 슬쩍슬쩍 몸을 흔들뿐 진짜로 내가 누군지만큼은 말해주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아무리 활짝 키운 하이빔이라도 오름의 아주 작은 부분만 겨우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창문을 살짝 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아무도 없다. 이 곳엔 정말 아무도 없다.

오로지 나 혼자네? 아무도 일출을 보러 오지 않았구나. 가로등 하나 없다니. 참. 이런 것에 좌절하는 난 도시 사람 맞네. 푸.


크게 숨 쉬듯이

슈와와와와아아아악.


검은 바람이 분다.

아이씨. 이건 바람이 아닌 것 같다. 뭐지. 머리카락이 선다. 뭐라는 거지?.


슈와와와와아아아아악.


하이빔 밖으로 나무들이  몰래 사라지는 듯하다. 이상하다. 분명히 하이빔 안에 나무가 점점 사라진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나무가 사라지는 소리만 들린다. 이상하다. 하이빔 안에,  눈앞에 나무들이 사라진다. 아무리 밝게 비춰도  색깔인 초록색으로 보이지 않고, 검은색으로 보이는 나무들이 사라진다.


이것 보단 어두웠어


이것보단 밝았어


슈우우우우우. 슈우. 슈우우우우. 슈우우우우우우우우우우


누군가 나보다 훨씬 위쪽에서 뒷머리채를 후우우욱 잡아당기는 느낌이다.

눈 앞의 나무들은 분명 10그루 정도였는데, 이젠 2그루 남짓밖에 보이질 않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차 시동을 끈 이후로 일정 시간이 지나버려 차에 파워가 사라져 버려 창문이 올라가질 않는다.

허겁지겁 시동을 켰다. 창문이 왜 이렇게 천천히 올라가지? 누가 못 올리게  누르는 건가?

무언가가 창문 안으로 들어오는 느낌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분명 무언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아이씨. 차 바닥이 망가지든 말든, 시동을 켜고서는 포장도 되지 않은 도로를 허겁지겁 돌아 나왔다. 거친 비포장도로 양쪽으로 너울거리는 나무들은 하이빔 안으로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했다. 기분 탓인가. 차를 칠 정도로 나무들이 내려왔다가는 하늘 높이 달 가까이로 올랐다를 반복하는 느낌이었다.


밝은 날의 나무와는 천지차이다.


차는 부르릉 소리를 내지 않고, 뭔가 우주를 유영하듯이 도로 위를 굴러 나왔다. 분명 엔진 소리가 났을 텐데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하아. 눈앞에 아무도 없는 시간이 계속되는 도로를 운전하는 동안 등줄기가 서늘해왔다. 아. 왜 아무도 없던 거지? 원래 그런 건가? 이 새벽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일출을 보고 오겠다는 단순한 마음의 내가 너무 나이브했던 건가?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자. 빨리.


지금 이 순간에 사람이 제일 많은 곳이 어디지?

성산 일출봉. 그래 거기로 가자. 일단 그곳으로 가자. 다랑쉬오름은 오지 말자. 성산 일출봉으로 가자.


액셀과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는 발이 후들거렸다. 빨리 나가자. 여기서.


  

 






 

 







작가의 이전글 중년이 되어 한라산에 처음 가려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