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정말 대단한 책이었다. 주부가 '집에서 논다'는 말을 듣게 되는 이유가 '자본주의 사회구조' 때문이라니!
오랜만이었다. 책을 덮자마자 하고 싶은 말이 넘쳐나서 노트북을 열고, 자판에 손을 대자마자 할 말이 끝도 없이 줄줄 흘러나오는 경험. 거기에 발췌문까지 더하다 보니 내용이 꽤 길어졌는데, 미련 많은 성격 탓에 차마 잘라내지 못하고 그대로 다 실었다. 시간 없으신 분은 맨 앞에 숫자가 붙어 있는 발췌문을 건너뛰고 읽거나 반대로 발췌문만 읽는 식으로 힘과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 소개나 출판사 서평 같은 건 따로 가져오지 않았다. 궁금한 독자는 링크를 클릭해서 보면 될 테니. 하지만 목차는 가져왔다. 책 한 권에 대한 서평이 각각 하나의 장을 이루고 있는데, 목차에 그 책들의 이름이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둘을 제외하고는 한번 읽어보면 좋을 듯한 책들이다.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
이 거짓말을 하는 자는 누구인가? 이 책에 따라 결론부터 말하자면, 바로 '자본주의'다. '돈을 벌지 않으면 노는 것'이란 생각만큼 자본주의적인 발상도 없다. 사람들도 자본주의에 푹 젖은 나머지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여기게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족과 가정은, 자본주의 사회에 유일하게 섬처럼 남아 있는 '자본 원리로 작동되지 않는 곳'이다.
그리고 주부란 그 마지막 보루를 외롭게 지키는 존재다. 온갖 자존감과 정체성의 위기에도 그들은 그 보루를 포기하지 못한다. 자본주의의 원리로는 절대 수행할 수 없는 '사랑', '배려', '헌신' 같은 것을 혼자 떠맡고 있기 때문이다. 법적으로나 심신으로나 자립할 수 없는, 미래 가치밖에 없는 자녀를 키우는 일이야 말할 것도 없다.
6쪽. 엄마들이 얼마나 힘든지를 토로하고 공감하는 것도 좋았지만 그보다 이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를 현실적인 관점에서 조망하고 싶었다. 우리들의 문제가 '돈'이라는 시커먼 물건과 연관된 것임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싶었다.
31쪽. 초등학교 입학 이래 늘 소속이 있었던 내게 주부라는 이름으로 펼쳐진 일상은 드넓지만 아무것도 없는, 기이한 진공상태처럼 느껴졌다.
38쪽. 내가 속한 세상, 그러니까 전업주부들의 세상은 그전까지 내가 속했던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시공간이 스미지 않은, 살짝 스미긴 했으나 그 핵심에 있어서는 거의 침해받지 않은, 어떻게 보면 중세에 가깝다고 표현할 수 있는 곳이었다. 돈이 아닌 관계가 중심이 되는 곳, 물질보다 정신이 중요시되는 곳, 그렇기에 종교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곳. 그것이 갓 회사를 박차고 나온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였고, 동시에 그런 세상에 몸담으면서 한편으로 편안함 혹은 뭉클함 같은 걸 느끼게 되는 이유였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돈을 주어야 구하는 세상에 살면서 정작 자신이 수행한 일 곧 가사에 대해서는 한 푼도 받지 못하는 이들,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 1순위를 이순신이나 세종대왕이 아닌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 같은 기업가가 차지하는 시대를 살면서 무보수로 행하는 자신의 일을 '일'이라 말하지 못하는 이들이 딛고 선 공간은 자본이 점거한 세상에서 동떨어져 홀로 존재하는 세상, '사랑'과 '헌신'의 이름으로 꾸며져 있지만 화려한 치장을 들추면 소외감과 황량함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영혼들이 숨 가쁘게 일상을 이어가는 외딴섬이었다.
194쪽. 인류가 전자본주의 체제(자급자족, 물물교환, 길드 체제, 상부상조, 신분 사회 등등)에서 자본주의 체제로 옮겨 올 때, 여성이라는 종족은 함께 옮겨 오지 않고 남겨졌다.
가사는 완전히 무상이다. 가사와 육아를 맡은 사람은 사회에 엄청난 기여를 하고도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다.
그러나 여자라도 돈을 벌기 시작하면 다른 대우를 받게 된다. 제사 음식을 비롯한 시댁 행사를 나 몰라라 해도 되고 가사를 외면해도 되고 육아에 소홀한 것조차 용서받는다(그런 경우는 거의 없겠지만).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에 대한 발언권이 강해지고 사회적 지위도 높아져 대출 통장이나 신용카드도 척척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돈벌이를 포기하는 순간 주부는 '사회인'이 아니게 된다. 그는 가정 안에서만 역할이 있고 가정 밖 사회에서는 고립무원인 존재다. 그에겐 아무런 신용도 신분도 역할도 없다. 그때부터 '집에서 노니 제사 음식하러 와라, 와서 김장해라, 집에 있는 엄마가 애를 그렇게 키우면 안 된다, 니 남편 얼굴이 요즘 왜 그러냐'라는 소리도 듣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신기하네... '너 다 큰 애가 돈을 왜 그 따위로밖에 못 버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필시 미친놈 취급을 받을 텐데, 왜 주부한테는 아무렇지 않게 그런 소릴 할까?)
25쪽. 엄청난 적대감과 함께 날아와 내 가슴에 꽂혔던 말, "남편이 벌어다 준 돈으로 편하게 먹고살잖아!"라는 말은 집에서 논다는 말보다 훨씬 커다란 파장을 만들어냈고, 전업주부로 사는 사람이 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게 되는지에 대한 명징한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135쪽. 사회는 어머니나 아내의 자리를 인정하고 높이 평가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면서도, 주부라는 존재를 하시 하고 있음을 감추지 못한다.
이런 형편이니, 주부의 행복은 거의 가족의 성품에 좌우된다. 또 주부 인생의 성패도 온전히 가족의 성패에 좌우된다. 특히 자녀의 성패에. 주부는 자신 혼자서 이룰 수 있는 성과가 거의 없어서 자아가 무척 희미해지는, 매우 수동적인 존재다. 주부나 어머니는 그래서 강한 자아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자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거듭하건대, 그럼에도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197쪽. 여성들은 가정의 마지막 수호자로 강제 임명되어 아이들 양육과 살림이라는 거대한 짐을 짊어지고 허덕이지만 그 짐을 차마 벗어버리지 못한다.... 아이들에 대한 휴머니즘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59쪽. 가족은 원시시대에 있었다는 '나눔'의 삶, 내 것 네 것 따지지 않고 사냥해 온 고기를 똑같이 나누어 먹는 원시 공산제를 실현할 지상 최후의 '공산주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전업주부는 이런 '가정 공산주의'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이다. 한 여성이 물질적 대가 없이 '따뜻한 가슴'을 한없이 베풀어 이런 보루를 지켜야 한다는 사회적 강제가 아무리 부당할지라도, 한 사람의 희생으로 지탱되는 구조에서 오는 여러 부작용과 폐해를 간과할 수 없다 할지라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는 규범적 삶의 형태, 공동체의 형태는 가족밖에 없다.... 그런데 어떻게 이를 포기한단 말인가. 지상의 마지막 공동체를 방어하는 역할을 어떻게 내동댕이친단 말인가.
하지만 지금은 과도기. 남자는 바깥일에 전념하고 여자가 가정을 온전히 돌보는 체제가 점점 남녀 구분, 바깥일 집안일 구분 없이 서로의 상황과 기질에 맞게 역할을 분담하고 육아를 책임지는 체제로 바뀌어 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골라서 취하는 사람들이 생긴다. 예를 들자면 예전의 '주부=여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 맞벌이임에도 여자에게 가사와 육아를 독박 씌우는 무개념남, 무개념 시댁 같은 것 말이다(그저 현실 파악 능력이 떨어진다고 볼 수밖에). 그런가 하면, 가정경제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이, 자신은 남아도는 힘으로 신나게 놀고 쉬면서 남편에게만 생계의 모든 책임을 지우는 걸 당연히 여기는 이기적인 여자도 존재한다(그 역시 현실 파악이 안 되는 인간이라 할 수 있다).
빌런이야 어느 시대나 존재하는 법. 하지만 상식이란 것이 어느 정도 통합되어 '통념'으로 발전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빌런들이 자신이 통념에서 벗어난 인간임을 인식이라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안타깝게도 요즘 유난히 의견 통합이 안 되는 것 같다. 저자도 책 말미에서 이야기했듯, 힘을 합해 용을 써도 무서운 세상을 헤쳐나가기가 힘든 판국에, 다들 집단 최면이라도 걸렸는지 하나같이 분노조절 장애에 빠진 사람들처럼 싸워대니 맘이 안타깝다 못해 쓰라리다.
187쪽. 가족과 그에 다른 성별 분업 제도는 남녀를 각기 다른 영역에 배치하고 그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참으로 영리하고 충실한 제도이다.
209쪽. 자본주의는 나쁘다는 피상적 수준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남성과 여성을 얼마나 교묘하게 갈라놓고 각자 다른 방식으로 길들여 제게 복종하도록 만드는지 심도 있게 들여다본 적이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종교가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지, 종교 내부에서 주로 리더 역할을 맡은 자가 남성에 국한되며, 그 남성을 보필하고 종교 내부의 여러 프로그램이 잘 진행되도록 밑에서 궂은일을 도맡아 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한 발짝 떨어져서 하나의 풍경으로 조망해본 적이 있을까.
사실 여자들은 힘든 일, 장시간 일을 기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공공성을 띤 업무 상당 부분이 유자녀 여성의 무상 노동으로 돌아가고 있다(종교단체, 봉사단체, 교육단체 등등). 왜 그런지 아는가? 주부들은 가정을 돌보는 데 시간과 노력의 상당 부분이 저당 잡혀 있어서 풀타임 근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간이 자유로운 파트타임을 통해서라도 사회와의 관계를 유지하려 하는 것이다. 주부도 사회적 성취와 효능감에 목마르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처럼 시간이 자유롭고 경력이 필요 없고 단시간만 투자해도 되는 일은 거의 저임금이거나 무상이다. 반면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하려면 가진 모든 시간과 힘을 쏟아부어야 한다. 마치 아내가 있는 외벌이 가장이라도 된 것처럼.
155쪽. 남성이 여성보다 더 많은 임금을 받아가게 되는 것은 주로 남성이 야근을 비롯한 힘든 일에 종사하기 때문이며, 이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삶의 너무 많은 부분을 '일'에 쏟아붓게 만드는 사회 전체의 구조를 문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208쪽. 주부들이 봉사 활동에 참가하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좋은 일을 하겠다는 선의에서 나오는 것일 테지만, 한편으로는 돈을 받고 하는 활동에 참가할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231쪽. 남편과 자식을 먹이는 책임은 온전히 그 집의 '주부'에게 있다는 공동체의 확고한 지침이 여성을 집 안에 머물게 만들고, 제 가족의 끼니를 챙기는 데 가진 에너지의 대부분을 소비하는 여성은 가정 바깥으로 눈을 돌릴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된다.
228쪽. 이타적인 삶을 살며 이름을 남기는 이들은 왜 대부분 남성인가? 저와 제 가족이라는 범주를 뛰어넘어 인류 역사에 족적을 남기는 이들 중 여성의 비율은 왜 그렇게 적은가?
위 질문의 답은 이것이다.
누군가는 최후의 보루에 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보답도 인정도 없는 고강도 심신 노동인 가사와 육아의 사명을 누군가는 끝까지 지켜야 한다. 최후의 보루를 지키려면, 아무리 인류를 구원하는 듯한 거창하고 거룩하고 이름 있는 일이라도 나서서 할 수가 없다. 누군가는 인류보다 더 귀한 내 집구석을 지켜야 할 게 아닌가. 내가 포기하는 순간 죽고 말 힘없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있는 그곳 말이다.
그러니 엄마는 다쳐서도, 아파서도, 너무 바빠서도 안 된다. 기계처럼 삼시세끼 밥상을 차리며 그 외의 살림도 돌봐야 하고 언제든 아이가 달려오면 안아 줄 수 있는 품을 남기는 동시에 학습 코치 역할도 해야 하고 가정 경제가 어려우면 시간을 쪼개 아르바이트도 해야 하고 심신의 건강도 잘 돌봐서 우울하거나 아프거나 죽지 않아야 한다.
심지어 이 모든 일을 다 잘해 내고도 겉으로 보이는 성과가 좋지 않으면 책임을 추궁당하는 사람이 바로 엄마다.
사람에게는 원래 계급을 나누는 본능이 있나 보다. 잉여재산이란 것이 생겨난 후, 세상에 계급이 없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상류층은 시대를 불문하고 하류층을 착취했다.
그러다 산업혁명처럼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을 때는 잠시 모든 것이 혼돈에 싸인 듯하다가 결국은 운이 좋거나 눈치가 빠른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짓밟고 상류층으로 올라서면서 사회가 안정되곤 했다.
돈으로 계급이 나뉜 지도 오래되었다. 이처럼 평시가 지속될수록 계급은 고착화되고 양극화는 심해진다. 그걸 완화하겠다고 여기저기서 애를 쓰지만 역부족이다. 선진국, 아니 과개발국가는 예전엔 제국주의로, 지금은 자본 잠식으로 저개발국가를 착취한다. 과개발국의 국민은 남녀를 불문하고 자신도 모르게 저개발국 국민을 착취하고 있다. 같은 나라 국민 중에서도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를 알게 모르게 착취한다. 대부분의 여자가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집에서 남자를 내조했던 시절에 남자가 여자와 아이를 착취했던 것도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여자의 노동을 무상으로 받았다는 의미에서)
77. <자본론>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해온 그 개념, 자본가의 '자본', 요즘 말로 하면 '종잣돈'이라 할 그 뭉칫돈의 유래를 파헤친다. 그 뭉칫돈은 착취, 절도, 혹은 강도질에서 왔다. 마을에서 몇백 년 동안 공동으로 써왔던 공간에 울타리를 치고, 지금부터 이 공간은 '내 것'이라 천명한 뒤, 그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없애버리는 방식 혹은 오랜 세월 동안 땅을 일구고 가꾸어온 사람들을 일거에 내쫓아 그들이 도시로 가 값싼 임금의 공장 노동자로 취업해야만 먹고살 수 있게 만드는 방식으로.
141. 저개발 국가 여성이 이렇게 헐값에 자신의 노동력을 팔도록 몰리는 동안 과개발 국가 여성은 집에서 가정주부로 머물면서 마트에 쌓인 산더미 같은 소비재들을 소비하는 데 시간을 쓰도록 권장받는다.
이 부분은 약간 충격이었다. 그래, 친일파의 자손들만 부끄러운 재물로 호의호식하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부가 착취, 강탈에서 나온 것이었구나.
세상은 원래 불평등하므로 계급이 생겨날 수밖에 없나 보다. 왜 사람은 사람을 착취할 수밖에 없을까. 그리고 왜 우리는 그 끔찍한 현실을 모르는 것처럼 외면하고 살려고만 할까.
하지만 역설적으로, 자본주의는 여성을 독립시키기도 했다. 돈만 있으면 된다는 의미에서, 돈을 벌면 '주부=집에서 노는 여자'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회사 핑계를 대면 웬만한 시댁에서도 입을 닫는다. 돈을 벌고 안 벌고가 인간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무의식적이고도 얕은 사고 흐름에 따라.
87. 돈이라는 놀라운 요물이 여성을 내리누르던 수많은 제도와 관습을 일거에 무너뜨렸다...
89. 나로서는 도대체 왜 내가 맡아야 하는지 백 번 천 번 생각해도 알 수 없는 수많은 가사들을 한 방에 면제해주는 고마운 존재, '회사'님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195. 여성은 회사라는 자본주의의 핵심부에 몸담을 때는 현대적인 (자본주의적인) 권리들을 누리는 듯하지만 회사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빛의 속도로 전자본주의적 시공간으로 빨려 들어간다.
196. 내가 자본주의 체제의 시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전자본주의적 세상과 자본주의적 세상의 경계선에서 끊임없이 소환되고 돌아오길 반복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혁명의 영점>을 통해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렇게 성역할이 고정되어 버리면 가정의 구조도 조금 달라진다. 자립한 성인 두 명이라기보다, 서로 의존하는 두 명이 되는 것이다. 안에 있는 사람은 철저히 안에만 신경 쓰고 밖으로 향하는 사람은 철저히 밖만 신경 쓰는 사이에 둘 중 하나한테 문제가 생기면 그야말로 비상사태가 벌어진다.
큰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건 바람직한 상태가 아니다. 안에 있는 사람은 평생 사회적 약자가 될 수밖에 없고 밖을 향하는 사람은 안에서는 천치가 되고 마니, 서로에 대한 신뢰와 만족에도 문제가 생기는 게 당연하다. 게다가 밖을 향한 사람이 안에 머물 때, 안에 있던 사람이 밖으로 나갈 때의 자존감 또한 철저히 상대의 지위나 인품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53. 여성들은 귓전에서 들려오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휘말려 회사를 그만두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아이에게 치명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경제적 요인'은 간과한다. 남편을 통해 들어오던 생활비가 끊기면 무엇으로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교육할 것인가?
157. 여성에게 과도한 가사 노동이 지워진 만큼 남성에게는 가족들을 먹여 살릴 돈을 어떻게든 벌어 와야 한다는 중압감이 지워진다는 측면을 보게 된 것이다.... 남, 여가 합세해서 일하는 시간을 줄이도록 압력을 넣자는, 일한 시간에 대한 적정한 임금을 받아가도록 함께 연대하자는 저자의 주장은 상당한 울림이 있었다.
이제 자본주의도 알아야 한다. 가사와 육아가 경제에 어떤 역할을 담당하는지. 천연자원이라는 자본주의는 '어머니 자연'을 무상으로 가져다 쓰면서 몸집을 불렸고, 자본주의 구성원들은 '어머니'의 노동력과 시간을 무상으로 가져다 쓰면서 연명하고 성장했다. 아마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 그런데 보라. 자연이 고갈되어 지구를 존폐의 위기로 몰아넣듯, 소모되는 데 지쳐버린 여자들도 이제는 아이를 낳지 않음으로써 국가를 소멸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
78. 콘크리트 덩어리에 불과한 아파트가 왜 몇억씩이나 하는지, 값은 왜 떨어질 생각을 하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미 전 세계가 자본주의의 자장 안에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천연자원을 듬뿍듬뿍 퍼올려 상품을 만든 뒤 다시 그 상품을 팔아 이윤을 챙길 '식민지' 상태의 땅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 전 지구의 자본주의 화로 자본이 예전처럼 큰 폭의 이윤을 창출하기 힘들어졌고, 그렇기에 이제 사람의 몸이나 사람이 사는 공간 자체를 상품으로 만들어 이윤을 창출해내야 하는 단계에 들어섰기 때문이었다.
99. 경제학에서 생략된 수많은 손길, 그것은 '여성'으로 불리는 인류 전체의 손길이며, 이 손길이 경제학에 포함되는 것은 어마어마한 정치적/경제적/문화적 변동을 동반할 것이다.
104. 하지만 그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해 사회의 일꾼으로 길러낸 전업주부는 비혼 남성과 같은 연령이 되었을 때 아무런 사회보장을 받지 못한다.
106. 자본주의 체제에서 처음부터 구성 요소로 포함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마음대로 공짜로 가져다 쓰되 그 가치는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여성의 돌봄 노동과 자연 자원은 쌍생아처럼 닮아 있었고, 그 때문에 여성의 모성, 여성의 관대함에는 당연하다는 듯 '자연스러움'이라는 개념이 따라왔던 것이다.
136. 자본주의의 화려한 모습을 떠받치고 있는 3대 요소로 여성, 자연, 식민지를 꼽는다. 자본이 상품을 팔아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노동자와 천연자원이 필요한데, 이 두 가지 요인을 만들어내는 하위 요인이 여성과 자연, 식민지라는 것이다.
'정부는 가사 노동과 돌봄 노동이 국가에 공헌하는 바를 인정하여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라는 저자의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적으로 주부의 무상 노동을 인정하는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전개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만을 감싸고 높이라는 것이 아니다. 가족 중 아무도 외롭게 혼자 봉사하거나 희생하지 않고 모두가 함께 수고하고 함께 쉬고 함께 즐기는 세상, 남녀가 서로 싸우지 않고 서로 감싸고 돕는 세상. 그런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여성가족부가 지향해야 할 양성평등이고 국가가 매달려야 할 저출산 대책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군 가산점 폐지를 반대하고 '남녀 공통 군 복무'라는 생각에 동의한다.
그나마, 저자도 지적했듯, 이혼할 때 결혼 이후 축적 재산의 절반을 무조건 나누도록 법적으로 보장된 것이나 남편의 연금을 청구할 권리를 아내에게 준 것만으로도 큰 발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제는 더 나아갈 때가 되었으니 위에서 언급한 무개념한 사람들을 계몽하는 일, 즉 빌런들에게 빌런 딱지를 붙여 주고 개과천선할 기회를 주는 일부터 시작하면 좋겠다. 세상에는 의외로, 자신의 생각이 통념에 어긋나거나 부당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조차 완전히 외면하고 사는 이가 많으니 꽤 효과가 있을 것이다.
급진적으로는 저자가 주장했듯 주부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겠지.(그렇게 되면 필시 이 돈 귀신들이 바깥양반들의 임금을 삭감하겠지? 아니다. 벌써 삭감되고 있으니까 이제 슬슬 삭감된 만큼을 아내에게 지급하라 이것들아!)
달리 생각하면, 아내가 있는 외벌이 가장처럼 살아야만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직장에서는 아내의 임금까지 계산해서 남편에게 월급을 지급하는 게 마땅하다. 그 돈 귀신들이 그럴 리가 없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결국 찌들도록 착취당한 것에 비해 모든 면에서 보상이 부족한 구조에 놓여 있다. 그런데, 그놈들이 대체 무슨 약을 어떻게 쳤는지 몰라도, 우리의 현실은 무척 서글프다. 자신을 억울하게 만드는 주범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유일한 '비자본주의적 파트너'가 되어 줄 이에게 서로 엉뚱한 분노를 표출하고 있으니 말이다.
인류사상 그나마 제일 낫다는 이 자본주의마저도 이렇게나 우리 목을 조르는 것을 보면 세상에 과연 희망이란 게 있을까 싶다. 인간은 너무 연약하고 돈은 너무 사악하다.
124. 그러므로 자본가는 노동자 한 명을 고용함으로써 (1) 값싼 노동력과 (2) 노동력 재생산의 무상 제공이라는 원 플러스 원 혜택을 누리는 셈이었다.... 그리고 이 같은 남성의 시초 축적을 통해 자본가와 국가는 하류층 남성 노동자들이 현실에 품은 불만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여성이라는 식민지를 다스릴 수 있게 해 줌으로써.
137. 여성은 남성 노동자를 무보수로 재생산해줌으로써 기업의 생산 비용 절감을 도와주고, 집에서 전문 살림꾼으로 기업이 만들어낸 상품의 소비자로 활약하면서 자본주의의 전천후 조력자로 기능한다.
144. 아무렴 생명을 낳아 기르고 돌보는 일이 회사에 취직해 누군가에게 근본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게 하려고 기를 쓰는 일보다 가치가 떨어지겠는가.
172. 기본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가 여성이 무상으로 행하는 돌봄 노동에 기대지 않으면 돌아가지 못한다는 점을 왜 간과할까? 자본주의 체제를 지탱하는 필수 요소인 노동자를 여성이 낳아주고 길러내지 않는다면 어떻게 체제가 돌아갈 것이며, 체제가 돌아가지 않는다면 남성이 생산적인 일을 하는 건 원초적으로 불가능하지 않은가 말이다.
189. 여성의 그림자 노동을 통해 큰 폭의 이익을 본 것은 자본과 국가이므로 국가가 자본이 거둔 폭리의 일정 부분을 거두어들여 가사 노동에 임금을 지불해야 하다는 논리다.... 그중 일부는 현실에서 이미 실현되고 있다. 일정 기간 동안 함께 살던 부부가 이혼하는 경우 가사 노동을 전담했던 이가 재산의 절반을 가져갈 권리를 갖는다거나,... 아이를 동반한 이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요금을 면제받도록 한다거나... 복지가 잘 된 국가일수록 출산율이 높은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 사회가 '운 좋게 인품 좋고 능력 있는 배우자를 만나면 행복하고 그렇지 못하면 불행해지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 저출산으로 나라가 지도에서 없어질 판이라는데, 언제까지 국가가 국민에게 기댈 셈인가. 시스템 만드는 사람들이 제발 이런 책도 열심히 읽고 토론도 열심히 하고 법도 열심히 만들고 행정도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
232. 가족의 안위를 챙기는 일보다 바깥에서 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면 '이기적'이라 비난받지만, 가족의 안위를 챙기는 일에 '너무' 충실하면 그 이유 때문에 또다시 '이기적'이라고 매도당하는...
234. 인간이라면 탄생과 동시에 부여받아야 할 물질적, 사회적 기본권을 국민 모두에게 줄 수 없었던 국가는 복지의 단위를 개개인이 아닌 가족으로 삼음으로써 국가가 해야 할 일을 '가족'에게 떠넘겼다. 우리나라가 유독 가족주의가 심한 것, '개천에서 난 용'이라는 개념으로 대표되는 가족 단위의 지위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지는 것은 이런 배경에서 유래했다.
236. 기본권을 보장하는 작업을 사회가 공식적, 비공식적으로 엄마라는 한 명의 개인에게 떠넘기는데, 그 많은 일을 수행하는 단 한 명의 담당자인 엄마가 어떻게 추궁당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38. 나는 엄마들이 제 자식의 안위를 지키는 데만 몰두하는 것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글 자본주의와 일등만 살아남은 분위기, 학벌에 따른 철저한 서열화와 사실상의 계급제도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240. 가족이 똘똘 뭉쳐 모든 걸 해결하며 알아서 잘 살아가야 한다는 가족별 생존주의는 이렇게 구성원들의 내면을 병들게 한다. 여성은 가족의 수문장 역할을 하면서 스스로 고립되고, 가족들을 사회로부터 고립시킨다.
마지막으로 덧붙이건대, 임금은 줄어들고 쉬는 날은 많아지고 퇴근 시간은 빨라지고 회식은 사라졌는데도 집에서 여전히 전통적 외벌이 가장의 자세를 고수하는 사람들은 반성하라! 사회는 이런 사람들을 계몽하라! 나는 역부족이다.. 흑..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 내 생각과 100% 일치했다. 이건 내가 매일같이 아들에게 해 주는 말이기도 하다.
여성은 혼자 강제로 짊어졌기 때문에 그 본연의 매력을 향유할 수 없었고, 남성은 인위적으로 제외됐기 때문에 그 본연의 생명력을 향유할 수 없었던, 살림과 육아라는 생의 축제에 대한 지분을 남녀가 합심하여 고르게 재분배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출현과 함께 시작된 해묵은 거짓말, '집에서 논다'는 말은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맥락을 잃게 될 것이다.
즉, 둘 다 피해자가 되는 싸움을 멈추고, 남녀를 분열시키는 공통의 적이 어디에 있는지 눈 똑바로 뜨고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당신 옆에 있는 사람을 믿어라. 그가 종종 당신을 착취하는 듯 보이는 것은 사회가 그것을 허용하기 때문이고, 인간이 너무 연약하여 매 순간 이기심에 굴복하기 때문이다. 통념이 바뀌고, 사회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 그러려면 누군가 먼저 깨어나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는 책들을 열심히 읽고 다른 사람들과 진심으로 소통하는 수밖에 없다. 나와 당신부터 눈을 떠야 한다.
목차
1장 주부들이 사는 외딴섬
1. “너 집에서 논다며?”
2. 주부들의 세상은 왜 이렇게 다른가/ 소스타인 베블런, 『유한계급론』
3. 다시 돌아간다면 그때도 회사를 그만둘 것인가 / 레슬리 베네츠, 『여자에게 일이란 무엇인가』
4. 나는 왜 요리를 싫어하게 되었을까 / 라문숙, 『전업주부입니다만』
2장 핵심은 ‘돈’에 있다
5.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 / 카를 마르크스, 『자본론』
6. 나는 왜 회사를 그리워하는가 / 게오르크 지멜, 『돈의 철학』
7. 나는 왜 뉴스에 나오지 않는가 / 카트리네 마르살,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8. 아이 셋을 길러낸 전업주부는 왜 연금을 받지 못하는가 / 낸시 폴브레, 『보이지 않는 가슴』
3장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9. 누가, 왜, 여성들을 불태웠는가 / 실비아 페데리치 『캘리번과 마녀』
10. 누가 누구에게 의지하는가 / 마리아 미즈, 『가부장제와 자본주의』
11. 공존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 박가분, 『포비아 페미니즘』
12. 내 몸 안에 갇힌 나를 어떻게 들여다볼 것인가 / 로이 F. 바우마이스터, 『소모되는 남자』
4장 경계선 너머의 세상
13. 왜 가사 노동에 임금을 지불해야 하는가 / 실비아 페데리치, 『혁명의 영점』
14. 비구니가 『아빠 수업』이라는 책을 낸다면 어떤 반응을 받을까 / 법륜, 『엄마 수업』
15. 비혼 여성과 기혼 여성은 연대할 수 있을까 / 김하나·황선우,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16. 주부들은 왜 제 가족의 안위만 생각할까 / 서영남, 『민들레 국숫집』
글을 닫으며 ― 자본주의와 함께 시작된 해묵은 거짓말
저자 : 정아은
“주부의 노동을 폄하하는 사회 현상의 저변에 무엇이 있는지를 밝히고 싶었습니다.”
헤드헌터, 번역가, 소설가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며 살아왔지만 제1정체성은 언제나 ‘엄마’였다. 엄마 경력 12년에 접어들던 어느 날, 좋은 엄마가 되겠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너무 아등바등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엄마의 독서』(2018, 한겨레출판)를 썼다.
이후 엄마들이 얼마나 힘든지를 토로하고 공감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이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를 현실적인 관점에서 조망하고자 공부와 사유, 글쓰기를 쉬지 않았다. 엄마, 주부들의 문제가 ‘돈’이라는 시커먼 물건과 연관된 것임을 선명하게 드러내고자 『당신이 집에서 논다는 거짓말』을 집필하였다. 2013년 『모던 하트』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했고, 이후 장편소설 『잠실동 사람들』, 『맨얼굴의 사랑』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