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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지은 Mar 24. 2024

마침표에서 만나

문장의 세계가 내게 준 축복

2호선 타고 합정으로 가던 길이었다. 일요일 오후였고, 여름의 초입이었고, 창 밖으로 펼쳐진 한강의 윤슬이 그날따라 평온하게 찰랑여 기분이 좋았다. 60대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 임산부석에 떡하니 앉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나는 저런 광경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피곤한 심보를 지녔다. 저기요, 어르신. 거기 그렇게 앉으시면 어떡합니까. 배려 받아야 하는 사람이 눈치까지 봐야겠어요? 심지어 일행으로 보이는 분들은 날계란 한 판 깨 잡순 듯한 데시벨로 떠들고 있었다. 저 정도 에너지면 노인과 약자를 같은 선상에 두기엔 문제가 있지 않나? 나이 먹고 저렇게 남 생각을 안 하니 세대 갈등이 심화되지. 혀를 끌끌 차고 있는데 날계란 일행 중 한 분이 우렁차게 소리쳤다. “거 임산부석에 앉으면 어떡해. 우리 같이 나이 든 사람이 그러고 있으면 비켜 달라고 할 수나 있겠어?” 뭐지, 관심법이라도 쓰시나. 책상 밑에서 몰래 읽던 쪽지를 들킨 십대처럼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쁜 버릇이 있다. 단면을 훑고 타인을 납작하게 요약하는 습성. 고질병 – 고고한 척 만사에 질색하는 병 – 이라 부를 수도.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에 대한 탐구는 평소 내 공상의 팔 할은 차지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도 오래 생각해봤다. 일단 싫어하는 게 너무 많다. 한번은 술자리에서 “네가 싫어하는 요소들만 다 쳐내도 가상 인물이 완성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는데, 그땐 발끈했지만 사실이 그랬다. 책 한 권을 낼 수도 있었다. 제목은 ‘아무튼, 싫음’. 아, 됐고 그냥 싫음. 예의 없는 거, 말 많은 거, 자기가 말 많은 걸 모르는 건 더 싫고. 위계를 따지는 본능, 무심한 어휘 선택, 무지에 가까운 긍정, 유행에 맹목적인 시선, 감당 안되는 사교성, 맞춤법 실수, 프로필에 셀카 향연. 삶에 대한 지나친 애착도 힘겨웠다. 그러니까, 나는 21세기 자본주의 사회 인재상의 정반대. 내세울 건 없으면서 졸렬한 심보에 한 줌 좋아하는 건 하나같이 시류와 맞지 않는 문명의 화석이었다. 취향은 존중의 영역으로 변호할 수 있지만 문제는 눈 앞의 일부가 전체라고 믿는 근시안이다. 첫 페이지 읽고 책을 덮듯 뭐 하나 마음에 걸리면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금방 선을 긋고 자리를 떴다. 누구는 소개팅 법칙을 내세워 ‘삼세번은 봐야 안다’고 했지만, 내 답은 늘 같았다. “10분도 길어."


글쓰기 수업을 들으면서부터 불치로 믿었던 고질병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글은 두번째 만남이었다. 글자와 여백 사이, 검고 흰 것 사이에 드러나는 사람들의 얼굴은 내가 본 얼굴과 달랐다. 삶의 굴곡을 알기나 할까 싶을 정도로 쾌활해보이는 사람이 평생 가족에 대한 미움을 견디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성취로 무장해 어쩐지 정이 가지 않았던 사람의 그림자에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는 고백을 읽었을 때, 슬며시 고개를 들어 바라본 그들은 보다 투명하고 한결 복잡했다. 눈물 고인 웃음, 외면하면서도 놓지 못하는 눈, 확신하는 입술과 번민하는 마음 사이 세 뼘 거리가 모두 한 사람의 것이라는 사실이 정오의 햇볕처럼 분명하게 다가왔다. 몇 군데는 보이지 않는 각주가 달렸고, 마침표가 찍혀도 계속되는 문장이 있었다. 말없이 떠난 친구를 회상하거나 오래 불화한 부모와의 거리를 좁혀 이해에 가 닿는 장면에서는 코 끝이 시려 괜히 헛기침을 하기도 했다. 그런 문장들은 쓴 사람의 우는 얼굴을 상상하게 했으니까. 누구는 툭 건드린 도미노처럼 와르르 무너졌고, 누구는 입술을 깨물다 결국 얼굴을 가렸다. 물기 어린 낯은 마음의 장벽을 두드렸고, 그때마다 단단한 표면에 실금이 갔다.


읽고 쓰다 보면 결국 다시 만나게 되는 건 나 자신이었다. 문단의 끝자락에서 단어를 버리거나 벼리는 동안 잊은 줄 알았거나 잊은 척한 그림자가 윤곽을 드러냈다. 내가 나라는 걸 잊기 위해 내가 아닌 걸 입어야 했던 날들, 밤거리를 헤매다 공원 벤치에 누워 붉어진 눈으로 하늘만 바라보던 밤들을 속수무책으로 보내야했던 이유를 그제서야 받아들일 수 있었다. 회고는 내 비극에 내가 일조한 몫을 시인하며 시작되기 때문에. 세월이 파괴하지 못한 후회와 열패감에 마침표를 찍으려면 내 안의 타자를 구해야 했다. 그의 눈으로 나를 마주보는 일은 대체로 힘겨웠지만, 동시에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용감한 일이기도 했다.


비슷하게 자기를 잃어본 적 있는 사람의 문장에서는 닮은 부류만 맡을 수 있는 피냄새가 났다. 너무 살고 싶다는 말과 콱 죽어버리고 싶다는 말이 다르지 않음을 본능적으로 이해하는 사람과 글을 주고 받을 때면 세상 끝에 우리 둘만 서 있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서로에게 완전하게 속하는 순간이었다.


언젠가 저녁식사에서 지하철 인간 군상에 대한 얘기가 나왔다. “글감이 떨어지면 1호선을 타면 된다”는 농담에 웃고 있는데, 늦게 도착한 친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도 여기 오는 길에 어떤 아주머니가 너무 시끄럽게 통화를 해서 봤더니 막 욕을 하시는 거야. 아들한테 하는 말 같았는데, 사고 치고 집에 안 들어오나 봐. 막 그 새끼 뒈져야지, 잡아 족쳐야지 하면서.” 그때까지는 화가 나 공공 예절을 잠시 잊은 남의 얘기였다. “근데, 전화 끊더니 우시는 거야. …우시 더라고.” 그 찰나였다. 생판 모르는 남의 우는 얼굴을 상상한 순간, 나는 글이 무엇인지 알았다. 장면 속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 뒷모습을 지켜보며 표정을 상상하는 것. 행간에 스민 마음을 더듬어보는 것. 한 사람을 이루는 선과 면 너머를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것들이 보이고 들리기 시작한다.


문장의 세계에서 나는 어루만져지거나 부서졌다. 나와 주파수가 맞는 동류는 평생 시달려온 현실과의 괴리와 불화를 읽어주고, 전혀 다른 동료는 각자의 인생을 횡단하는 동안 멈출 수 밖에 없는 어느 지점에서 우리가 반드시 한번은 만난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했다. 어느 쪽이든 마침표에 다다랐을 때, 나는 다시 태어났다.


내 고질병이 잠깐 도졌던 일요일 오후, 합정역을 빠져나오던 순간은 하나의 장면으로 남아있다. 출구로 향하는 긴 계단을 오르자 눈꺼풀 위로 하얀 볕이 쏟아져 내렸다. 바깥 풍경은 내가 알았던 것과 어딘가 다른 색을 띠고 있는 것 같았다. 매미 울음 소리와 뒤섞인 세상 모든 잡음이 아름답게 들려오던 초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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