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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지은 Mar 26. 2024

시끄럽고 어두운 곳

칵테일바의 문학론

지금은 목요일 저녁 일곱 시. 초점 잃은 눈을 깜박이며 모니터 속 창들을 하나씩 닫는 동안 고민한다. 얌전히 집으로 가, 말아? 직장인에게 목요일은 한 주치 피로의 정점에 오늘만 지나면 금요일이라는 시시포스 적 희망이 스치는 요상한 구간이다. 회사에 다니면서 왜 직장인들이 유독 목요일에 술 약속을 잡는지 이해하게 됐다. 보상 심리와 객기를 버무린 사소한 일탈, 주말을 만끽할 기운을 남겨두기 위해 금요일은 날로 먹겠다는 암묵적 저항! 퇴근 후 나는 가볍고 맛있는 술로 지친 정신을 포상하고 싶지만, 술을 마시는 동안 누구와 어떤 얘기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다. 혼자 온 손님에게 굳이 한 명이냐고 되묻지 않고, 기분에 어울리는 잔술을 홀짝이며 웃음기 없는 얼굴로 휴대폰 메모장에 글감을 끄적여도 이상하지 않은 곳은? 바로 칵테일 바.


칵테일에 입문한 건 언론사에서 사회 초년 생활을 시작한 무렵이다. 나는 바이라인을 하나라도 더 내려는 욕심에 허덕이면서도 기자 선배들 비위 맞추기는 질색했다. 국장과 그의 충실한 똘마니들은 언론인의 자부심과 애사심으로 대동단결하며 시도 때도 없이 회식을 부르짖었다. 애국심, 애교심, 애사심을 조장하는 대한민국의 집단주의는 내겐 늘 인류학적 연구 대상이었다. 모교 사랑으로 이름난 대학을 나온 친구들이 졸업한 지 한참 지났는데도 과 잠바를 껴입고 축제에 난입해 신록 같은 신입생들 사이에서 응원가를 열창하는 모습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는데, 그들만 그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취업을 하니 하나의 지옥에서 다른 지옥으로 건너갔을 뿐, 다를 건 없었다. 금요일 저녁마저 막내들을 데리고 소주를 들이부어야 직성이 풀리는 그들의 문화에 학을 뗄 때쯤 우연히 어느 바에 들어가게 됐다.


광화문과 경복궁 사이 뒷골목에 자리 잡은 한옥 바는 첫 조우에 나를 사로잡았다. 도쿄 긴자의 클래식 바에서 배웠다는 바텐더는 거칠고 우악스럽던 음주 경험을 세련되고 차분한 과정으로 바꿔주었다. 섬세한 손길로 완성한 칵테일은 미간을 찌푸리지 않고 마실 수 있는 첫술이었다. 무엇보다 이런 시간을 혼자 즐길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앉아 마티니에 올리브는 꼭 필요한가에 대해 토론하는 건 대체할 수 없는 기쁨이지만, 적당한 잡음 속에서 스스로에게 말을 거는 시간 또한 그렇다.


바는 재미있는 곳이다. 손님 가려 받기 힘든 일반 술집과 다르게 주인 성향이 방문자를 결정한다. 운동화에 후드 차림으로 청담동 바에 당당히 입장하긴 어쩐지 난감하다. 한 세트 값이 사원 월급에 맞먹을 법한 저 바카라 잔을 손에서 놓치기라도 하는 날엔… 홍대 어느 바에 갔던 날은 Z세대의 표본 같은 손님들이 단체로 디즈니 메들리를 열창하는 광경을 목격하자마자 조용히 도망쳤다. 도피 대신 투쟁을 택하라던 니체도 그 상황에서는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고 확신하면서. 서래마을 바에서는 다짜고짜 영어로 주문하고는 자기 일의 위대한 고단함을 알아듣지도 못할 것 같은 애인에게 늘어놓는 변호사를 볼 수 있다. 음정과 온도가 나와 맞는 바를 찾는 건 소개팅과 비슷하다.


“잘 지냈어요?” 바텐더가 물수건을 건네며 차분하게 묻는다. 한번 온 손님은 꼭 기억하지만, 필요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아서 오히려 편안하다. 양손에 퍼지는 온기에 하루의 기억이 녹아 형체를 잃어가는 순간. 지옥이 단순히 은유가 아님을 증명하는 지하철 출근길, 건조한 사무실 공기와 ‘있어빌리티’ 따위는 꼬깃꼬깃 접어 내일로 유예한다. 첫 잔은 네그로니. 원을 그리며 미끄러지듯 천천히 스터링하는 바텐더의 손놀림을 바라보는 건 정신 건강에 좋다. 불멍에 물멍까지 하는 마당에 술멍도 추가하자. 테이블 위에 코스터가 깔리면 가방에서 책을 꺼낸다.


잘 만든 네그로니는 발코니에서 맞는 늦은 오후 햇살처럼 화사하다. 번트 오렌지빛 이탈리아 석양주를 홀짝이며 믿음직한 작가의 문장으로 피신하기. 내 휴식의 정의다. 누구는 퇴근하고 문 닫은 전두엽에 굳이 활자를 욱여넣고 싶냐고 되묻는데, 좋은 글은 고된 일상의 찌든 때를 한 꺼풀 벗겨준다. 납작해진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 다른 세계로 데려간다. 운 좋게 쓰는 일로 돈벌이를 하고 있지만 일의 시작은 곧 순정의 종말이기도 했다. SNS가 점령한 시대에 ‘잠재 고객’들의 까다로운 눈길을 사로잡기 위한 몇 줄의 카피를 뽑아내다 보면 모호한 자괴감에 빠지니까. 신자유주의적 글쓰기와 사기는 뭐가 다를까? 그런 의문이 짙어지는 밤이면 고전 소설이나 시집처럼 최대한 쓸모없는 책을 파고든다. 세상은 실용적인 것만 원하지만 이렇게 무용한 것들이 삶을 지탱한다, 이것들아!


문학은 미욱하고 세상과 불화하는 주인공들의 초상이다. 그들은 자신과의 적당한 타협에 번번이 실패하고 삶에 소환된 이유를 찾기 위해 생고생을 자처한다. 콕 집어 설명할 수 없는 결여의 예감을 타고난 이들이 제 팔자에 걸려 넘어지고 난장 같은 인생을 헤쳐 나가는 이야기에 끄덕이며 안도하는 수많은 마음이 있어 문학이 아직 망하지 않은 걸지도. 그중에는 물론 깊은숨을 내쉬는 내 마음도 있다. 그렇다. 어떤 날은 다 괜찮을 거라는 막연한 긍정보다 “나도 너만큼 지질하다”는 한 마디가 필요한 법이고, 술은 이런 말을 진실하게 만든다.


열 시쯤 되면 바는 북적이기 시작한다. 책을 덮고 슬며시 주위를 둘러본다. 책보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얘기들이 더 흥미로워지는 타이밍이다. 바에서는 이 시간을 기점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인간군상을 엿볼 수 있다. 바에 다닌 시간만큼 목격담도 다양하다. 남의 책 한가운데 자기 명함을 슬쩍 밀어 넣고 축축하게 웃던 아저씨, 자기 욕망의 역사를 웅변대회 성량으로 읊던 사람, 홍상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찔러보는 남자와 막아내는 여자. 사는 게 너무 힘들어요, 훌쩍이면서 늘어놓는 인생 상담은 애교에 가깝다. 격정적인 장광설과 부주의한 단어 선택이 거슬리긴 하지만 그래봐야 취한 사람은 아무것도 안 들리고 보는 사람에게는 희극이니 누구도 손해볼 건 없다. 어떨 때는 별거 아닌 잡담에 꽂히기도 한다. “난 소주에 삼겹살 안 먹어. 시원한 술로 묵힌 걸 내리는데 뜨겁게 달군 음식을 섞는 느낌이 싫어.” 옆에 앉은 남자 셋 중 한 명이 말했다. 오, 재밌는 발상인데? 나중에 비유로 써먹어도 되겠다. 메모. 이것도 관음일까? 소싯적부터 근거리에서 주변 사람들을 분석하고 분류하는 음침한 버릇을 버리지 못하는 내게 여기는 그야말로 글감의 성지. ‘소재가 떨어지면 1호선을 타라’는 우스갯소리를 종종 듣는데 그렇게 멀리 갈 필요 있나. 열 평 남짓한 공간을 채우는 달고 쓴 사연들로 도시의 서사는 충분히 풍성해진다.


나는 오고 가는 말의 행간에 숨은 마음을 헤아려보는 걸 좋아한다. 깊은 곳에 똬리 튼 욕망과 질투는 절대 투명하지 않아서 언제나 겉옷을 두른 채로 나타나기 때문에.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다는 건 한때 모든 걸 바쳤다는 뜻이고, 무덤에도 찾아가지 않겠다는 말은 평생 못 잊는다는 뜻이다. 희대의 나쁜 연놈은 질척거릴 만큼 갖고 싶었던 사람의 다른 이름이고,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난 이런 거에 별로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서문 뒤에 나온다. 취객들이 나누는 대화란 예측할 수 없는 드라마 같다. 넘실대던 감정이 어느새 삐져나와 숨바꼭질에 실패하거나 낯선 장소에 숨었다가 다음날이면 그곳이 어딘지 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술기운이 무르익으면 사람들은 단단히 여민 겉옷을 만지작거린다. 누구는 진심의 옷깃을 풀지만, 다른 이는 한 겹을 덧입기도 한다. 나는 둘 다 해봤다. 어렸을 때는 가끔 삐뚤빼뚤한 마음을 덜 다듬어진 말로 던지곤 했다. 듣는 이도, 말하는 나도 준비되지 않았지만, 술을 마시면 한없이 투명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마치 그게 알코올의 유일한 미덕인 것처럼. 공허함에 시달리던 구간에는 일부를 전부인 듯 부풀렸다. 과거의 나를 필요 이상으로 미워했고 미래의 나를 지나치게 그리워했다. 그냥 두면 알아서 사그라질 불씨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젊은이는 젊음을 낭비한다는 격언은 참인지 그 시절 나는 늘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고 싶었고, 시시한 일상으로부터 도피가 진짜 삶의 시작이라고 믿었다. 달콤하고 매캐한 잔을 비우다 보면 마주하기 싫은 현실에서 매혹적인 창조의 세계로 넘어가는 회전문이 나타났다. 하지만 문을 돌고 돌아 나왔을 때 기다리는 건 언제나 나였다.


정확한 시점은 기억나지 않지만, 자아의 창고에 스스로를 격리하는 일로부터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내면을 후벼 파다 밑바닥에 주저앉는 악습을 졸업하고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고. 이해 받기를 원하는 만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누군가 쉬어갈 수 있는 자리를 한 뼘이라도 남겨놓기. 그야말로 문학의 유일한 쓸모였고, 내게 가르쳐준 전부였다. 그때부터 탈출구가 아닌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한 공간으로 바를 찾기 시작했다. 혼자 마시는 일은 줄었지만, 지나온 시간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눈이 가려진 채 손 뻗으면 닿는 무언가에 의지해 통과할 수밖에 없는 터널이 있다. 그게 지팡이인지, 뱀인지는 지나 봐야 알지만 일단 붙잡아야 다음으로 갈 수 있다.


가끔 바를 둘러보며 세상의 축소판 같다고 생각한다. 저마다의 삶을 써 내려가는 주인공들이 한자리에 모여 목을 축이며 마음을 풀어놓는다. 지나는 계절과 시절이 달라도 모두 각자의 분량을 감당하는 중이다. 그러니 이 순간만큼은 누구라도 되어볼 수 있고 모두에게 끄덕일 수 있다. 언젠가 나만의 이야기를 쓰리라 다짐만 골백번 해온 워너비 에세이스트는 부대끼고 닳아가는 마음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해지지 않는 것들의 경계에 대해 골몰한다. 나른해진 몸으로 생각에 잠기다 보면 일자리와 자취방을 오가며 사람으로 살아가고 살아남는 일이 거대한 픽션 속 투쟁 같아서 결국은 모두가 가여워지고 만다. 아무래도 나는 밝고 희망적인 얘기를 쓰긴 글렀다.


지금은 아마도 목요일 밤 열한 시. 혼자서는 두 잔까지 라는 나만의 룰이 있다. 메모장을 한 번 더 훑어보고 일어날 준비를 한다. 헤밍웨이는 “취해서 쓰고, 깨어나서 수정하라”는 명언인지 망언인지 모를 말을 남겼다는데, 불행히도 대문호가 아닌 내가 술을 마셨을 때 할 수 있는 최선은 글감 발굴뿐인 것 같다. 짜증 나는 천재 놈들. 세상만사를 다 쉽게 여기고 말이야. 머리도 식힐 겸 동네를 조금 걷기로 한다. 익숙한 거리에 가게 하나가 폐업했는지 유리창에 ‘임대’ 종이가 너덜거린다. 어떤 가게였더라? 도통 떠오르지 않는다. 네온사인의 호위를 받는 빌딩들을 지나며 불 켜진 창문 수를 세어본다. 그 너머에서 각자의 구원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얼굴과 아까 나와 같은 공간에서 술을 마시던 사람들의 잠들기 전 표정을 상상한다. 말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다. 지어지고 쇠퇴하는 것들 사이에서 우리 모두 적당히 지질하고 적당히 용감하게 견디고 있다는 것. 삶과 삶을 문장으로 잇다 보면 한 편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어제와 오늘이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해도 말이다. 그것들을 묶어 세상에 내놓을 날이 정말로 올 지는 모르겠지만, 쓰기 위해서는 먼저 나라는 테두리 너머를 수없이,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는 건 확실히 안다. 메모장에 남긴 말들을 전부 믿을 수 없다는 것도.


내일 아침 출근길, 간밤에 끄적인 문장들을 재조립하며 혼란에 빠질 것이다. 뭔 소리를 써놓은 거야? 역시 술은 도움이 안돼. 이참에 끊자! 아마도 지키지 못할 다짐도 한 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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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헤밍웨이의 단편 <깨끗하고 밝은 곳>의 패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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