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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지은 May 21. 2024

지지 않는 문장들

"글 쓰면 뭐가 좋아요?" 라고 묻던 많은 당신들께

지하철 타러 갈 때마다 내 카피가 담긴 광고를 마주친다. 클라이언트는 이름만 들으면 아는 모 결혼정보회사. 서초, 광화문 등 법조 단지가 모여있는 역 위주로 옥외광고를 걸다 물량 공세로 작전을 바꿨는지 서울에 있는 거의 모든 환승역 광고판을 독점했다. 혼인율 최저 시대에 그들 나름의 응전인지는 몰라도 덕분에 실시간으로 포트폴리오를 점검 받는 기분이다. 사소한 생각에서 착상해 착오와 수정 끝에 세상에 나온 결과물을 마주할 때마다 느끼는 첫 감정은 역시 뿌듯함이다. 업계에 발을 들이민 것도 광고가 상업 직종 중 가장 창작에 가깝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런데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포토샵으로 주름살을 남김 없이 제거한 선남선녀가 인생의 남은 날이 전부 꽃길인 것처럼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불편해졌다. 결혼이 행복으로 가는 티켓이 아니라는 건 철든 어른이면 알지 않나. 아니,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자본주의의 구라에 이바지한건가?


광고 회사에 다니면서 종종 말과 글로 불특정 다수를 기만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는데, 결혼에 대한 컨셉을 기획하고 카피를 쓸 때는 더 그랬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결혼은 일종의 전우애였고 한밤 중 편의점 같은 우정이었다. 환상에 기대거나 세월에 의해 안일해지지 않고, 하루 치 무의미 속에서 곁을 지키겠다는 의지. 그래서 허영의 변두리를 맴돌거나 고독 속에 방치하는 대신, 서로를 확보하고 일으키려는 노력. 나만의 추상을 비주얼로 표현하라면 배경은 전쟁터, 모델은 빗발치는 총탄을 피해 손 맞잡고 뛰는 두 사람일텐데 그런 제안을 했다가는 잘릴 게 뻔했다. 아무리 일과 순정은 함께 갈 수 없다지만 겉만 번지르르한 카피는 산패한 기름같은 뒷맛을 남겼다. 더 싫은 건 어느 지점을 건드려야 현실에서 더 멀어질 수 있는지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결혼정보 광고를 담당하게 되던 해에는 많은 일이 일어났다. 그 해 여름, 나는 가까운 사이였던 사람에게 주취 폭행을 당했다. 그는 대화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집에 가려던 내 뒷덜미를 잡아 벽으로 밀치고 길바닥에 패대기 쳤다. 경찰서에 도착하자 수사관은 내게 스웨터를 벗고 원피스를 걷어 올리라고 부탁한 후 멍든 팔과 다리 사진을 찍었다. 한 쪽 굽이 부러진 샌들을 끌고 잡아 탄 택시 안에서 창 밖을 바라보는 동안 나를 구성하고 있는 구조의 일부가 망가졌음을 느꼈다. 정확히 어떤 부분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일어난 일이었고, 되돌릴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경찰은 가해자에게 스토킹 처벌법에 대해 고지하며 경고장을 보냈다. 그는 자신이 고통을 가했다는 사실보다 고통을 가한 사람으로 낙인 찍혔다는 사실이 훨씬 중요했는지 계속 사과에 사족을 붙였다. 자기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겁도 많고 싸움을 해본 적도 없는,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다. SNS에 책 리뷰와 이런저런 단상을 올리던 그는 팔로워가 꽤 많았는데 피드 중 하나에는 “폭력은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된다”고 쓰여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사람과 사랑이 제일이라는 말을 캐치 프레이즈처럼 읊고 다니면서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확신에 찬 문장을 즐겨 쓰던 그에게 되묻고 싶었다. 누구에게도 상처를 줄 수 없다면, 너는 대체 뭐란 말이냐고. 자신을 포함한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전혀 모르면서 어떻게 사랑할 수 있냐고.


그와 연이 겹치지 않는 세 사람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얘기했다. 한 명은 법적 조언을 구하려고 만난 변호사 지인이었는데 내 얘기를 찬찬히 들어줬다. 앞으로 전개될 상황과 내가 취할 수 있는 옵션에 대해 일러준 그는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였다. “네가 고생이 많다. 이래서 반반한 애들은 사는 게 힘들어.” 순간, 내가 겪은 모든 일이 바람 빠진 타이어처럼 납작해지는 것 같았다. 셔터 내린 가게 외벽으로 밀쳐졌을 때의 공포와 우악스러운 손이 남긴 멍자국을 가리려 8월에도 가디건을 걸치던 날들을 갈무리하는 악의 없는 한 마디. 며칠 동안 나는 형체 없는 수치심에 시달렸다. 윤곽이 잡히지 않으니 탓할 곳은 보이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마지막에는 나에게서 이유를 찾고 있었다.


그렇게 지옥 같은 여름이 갔다. 지금을 위해 지난 시간을 통과해야 했던 거라고 믿게 될 만큼 행복한 나날이 시작됐지만, 평생 찾아 헤매던 걸 발견한 기분에 감겼던 가을은 머지 않아 조각 났다. 이태원에서 보낸 2022년 10월의 마지막 토요일 밤이었다. 거짓말같은 친구의 부고와 수많은 죽음을 설명할 문장은 없었다. 하루를 사는 방법을 까먹은 사람처럼 멍하니 시간을 흘려 보냈다. 인터넷에는 추모 칼럼을 비롯해 온갖 위로 글이 올라왔다. 잔인한 달에 떠난 꽃다운 청춘 등 비극을 애도하는 수사들이 넘쳤지만 뇌리에 새겨진 건 널브러진 몸이었다. 웃고, 울고, 꿈꿨던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처럼 멈춰 있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몸들이었다. 책임자들은 늘 그랬듯 완곡한 언어로 우회했고, 한 쪽은 어김없이 선정적인 표현을 총동원해 다른 쪽을 공격했다. 겨우 잠들면 하얀 몸들이 어른거렸다. 몸은 말이 없었다.


얼마 안가 나는 지하철에서 고성에 가까운 데시벨로 통화하는 남자와 같은 칸에 있다가 과호흡을 일으켰다. 병원에서는 이런저런 검사를 하더니 거의 모든 항목이 ‘나쁨’으로 나온 결과지를 보여줬다. 진단명은 스트레스에 의한 공황장애였다. 의사는 혼자 너무 오래 참았다면서, 지금이라도 병원에 온 건 정말 잘한 결정이라고 했다. 아파도 웬만하면 약을 먹지 않고 버티던 내 책상에는 어느새 약봉지가 영수증 더미처럼 쌓였다. 이럴 때 쓰는 게 도움이 된다는 말은 전공 수업에서도 들었지만 한동안 어떤 글도 쓰지 못했다.


처음 글쓰기를 가르쳐준 선생님은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언어는 강력하다고. 나만의 언어로 글을 쓰는 것만한 권능은 없다고. 한때 원동력이 되어준 말은 명망 있는 작가의 휘장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가상 세계에서 인류애를 설파하고 다니는 사람이 현실에서는 여기저기 피해를 끼쳐서 주변인이 하나 둘 떠나는데도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누군가 위로를 목적으로 던진 말이 때로는 사건보다 더 깊은 멍을 남긴다는 사실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아무리 신중한 어휘의 조합으로 문장을 지어 올려도 가장 필요한 순간에 허공으로 흩어지는데 대체 권능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렇게 문장을 주무르는 신이 있다고 해도 그를 찬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건 기만이었고 나아가면 촌극이었다. 어떤 상실을 설명하려 할 때, 언어는 오히려 부적절하게 느껴졌다.


제일 견딜 수 없었던 건 외부와 격리하는 동안 뿌리내린 편견이었다. 이해 받기를 원하는 만큼 이해하려는 노력은 문학의 유일한 쓸모였고 언제까지나 지키고 싶은 가치였는데, 당시 나는 누구도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현상 너머의 사정에 귀 기울이기를 거부하는 마음은 납작한 판결들로 이어졌다. 가해자와 조금이라도 겹치는 성향과 역사를 지닌 사람을 보면 머릿속에서 경고음에 가까운 말들이 쏟아졌고, 아니꼬운 눈길을 장착하고 바라보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외향적인 사람은 그냥 관심종자야. 어렸을 때 외모 콤플렉스가 있으면 마음이 꼬이게 돼있어. 허구한날 싸움질 하는 부모한테 배우는 게 뻔하지. 상종을 말아야 한다니까. 어떨 때는 반자동으로 울려대는 내면의 소리에 스스로 놀랐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어? 뭐든 한 꺼풀 더 알아보기를 선택하는 사람. 얼마나 알게 되든 내가 아는 게 결코 전부가 아님을 아는 사람. 한 줌 통계와 지식을 내세워 가능성을 마름질하지 않는 사람. 나는 내가 되고 싶었던 사람과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어렴풋이 느꼈던 붕괴된 감정의 실체는 그렇게 드러났다. 조직을 떼어내는 수술 후 서서히 나타나 일상을 좀먹는 부작용처럼.


그런 상태로는 한 문장도 쓸 수 없었다. 그때 나는 필자로서 나를 심문하고 시험하는 시기를 거치는 중이었다. 글쓰기 수업을 들으면서 다양한 사람들의 글을 읽는 동안 멋들어진 글과 오래 남는 글은 아예 다르다는 걸 깨달았는데, 멋이 떨어지더라도 후자의 글을 쓰고 싶었다. 그러려면 적어도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 했다. 사랑이나 이해, 용서같은 단어들을 헤프게 휘두르면 그대로 티가 났으니까. 못하는 건 못한다고, 괜찮지 않으면 괜찮지 않다고 해야했다. 삶이 따라잡지 못하는 문장은 자주 자신을 속이고 타인에게는 종종 상처를 입힌다는 걸, 글을 쓰기 시작한지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요즘은 왜 글 안 보내줘?” 얼마간 쓰지 않으니 친구가 대뜸 물어왔다. 할 말을 정리하는데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고 했다. “그래, 그럴거야. 근데 있잖아. 네 글은 시간이 지날수록 좋아지는 것 같아.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서 콕 짚어 말하기는 어렵지만 진심으로 그렇게 느껴.” 그의 말을 듣고 지금까지 써온 글을 하나씩 다시 꺼내 봤다. 글쓰기 수업 첫 과제였던 글은 제법 쓰고 많이 아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는지 서문부터 하이데거를 동원하고 난리였다. 뒤늦게 멋쩍어져 웃음이 나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지나치게 힘을 준 문장에서는 진심이랄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어떤 마음으로 썼는지 잘 떠오르지 않은 걸 보면 그럴듯해 보이는 단어와 화려한 비유에 신경 쓰느라 제대로 들여다본 적조차 없는 것 같았다. 첫 글을 읽고 친구는 너무 진지하니 마음을 털어내고 써보라고 했는데, 나는 원래 진지한 사람이라 그건 불가능하다고 반박했던 기억이 비집고 나와 민망함을 더했다. 요점은 뒷부분에 있었는데. 그럼에도 손을 떠난 글을 되짚는 건 재미있는 일이었다. 과제를 거듭할수록 글의 뉘앙스와 온도가 변하는게 보였다. 이런저런 철학자와 작가를 인용하며 현학적이던 글이 조금씩 솔직해지고 있었다. 여전히 용서하지 못했다고. 그때 그 사람을 포기하지 않았던 건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버리지 못한 호승심 때문이었다고. 너무 가지고 싶어서 때로는 무너지길 바랐다고. 네게 미안해서 내가 괜찮지 않다는 사실에 안도했다고. 미화된 형용으로 덧칠하는 대신, 지하에 웅크린 본심을 검열없이 말하고 실수와 후회라는 결과물에 스스로 일조한 부분을 인정하는 연습. 시험과 감찰이라는 회전문을 여러 번 오간 후에야 가까스로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자아의 창고에서 벗어나 타인에게 향하기 시작한 시선이었다. 전까지 글이 내면에 골몰하고 어떤 생각의 실마리를 분자 단위까지 파헤치는 현미경 역할을 했다면, 어느 시점부터는 주변 사람들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방향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처음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글은 외부로부터 나를 구분 짓고 타인과 섞이지 않으려 유배하던 장소였다. 영혼의 단짝을 만나고 내가 알 수 없는 역사가 건축한 세계를 이해하고 싶어졌고, 그때부터 삶의 경계를 허물고 두 그림자를 이어주는 문장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마음은 물에 떨어뜨린 수채 물감처럼 주변부로 퍼져 떠난 친구에게, 애증으로 얽혀있는 엄마에게, 유효기간이 끝난 인연에게, 한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에게 닿았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말로만 잘했던 남이 되어보는 일이 단순히 은유가 아니라는걸. 정말로 가능하다는 걸. 치수 다른 신을 신고 뒤뚱거리며 걷다 보면 못보던 풍경을 보게 됐다.


백지를 띄워놓고 살아본 적 없는 삶을 상상하고, 내가 아는 조각들을 오해라는 실로 잇지 않으려 조심하는 동안 나는 엄마가 50년대에 태어나 시대와 다른 모양의 인생을 살기 위해 혼자 외로움을 감당했다는 사실에 가 닿았다. 엄마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만큼 어리석은 소리는 없다는 것도. 친구가 산 햇수는 단호한 괄호 안에 갇혀 늘어나지 않지만, 길지 않았던 삶에도 희로애락이 있었기에 다양한 모습으로 기억하자는 다짐도 쓰는 동안 태어났다. 상대방의 성격적 결함이 문제였다고 굳게 믿었던 비극 뒤에는 어떤 시절을 점유하는 불안과 연약함, 그로 인해 서로를 오해할 수 밖에 없었던 순간들이 있었다. 돌이켜보니 문제는 타이밍이었다. 어떤 일이 조금 늦게 혹은 먼저 일어났다면 서로에게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말로 천냥 빚은 갚을 수 있을지 몰라도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다. 인과율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사건 이후에 허우적거리는 인간을 엎친 데 덮치는 건 무의미의 파도다. 기억은 힘이 세서 그 힘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말을 이제 믿지 않는다. 어떤 시련은 겪지 않는 편이 낫고, 두개골을 열어 해마의 일부를 잘라내서라도 지우고 싶은 기억도 있다. 영혼의 구조가 변해버린 이에게 모든 일에 뜻이 있다는 설교는 제삼자의 공염불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놓아버린 시간에 나를 살린 것 또한 말들이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 용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 곁에 있겠다는 말. 그런 말은 어깨를 툭툭 쳐 이제는 털고 일어나야 할 것처럼 만들지 않았고, 앞으로 가자고 등을 떠밀지도 않았다. 내게 머무른 말들은 내가 어떤 말을 건네야 할 차례가 되었을 때 반대로 하지 않아야 할 말들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다. 해야할 말을 고르는 것과 하지 않아야 할 말을 삼키는 것 중 후자가 더 어렵고 고마웠다. 어떤 말은 아직 잊지 않았다고, 계속 잊지 말자고 한다. 때로는 그게 말이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전부인 것 같다.


삶은 누구에게나 한번만 일어나는 일들로 엮인 이야기지만, 그 일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다시 쓸지는 내게 달렸다. 나만의 이야기라는 표현은 고유한 삶의 방식을 뜻하는 동시에 피부처럼 익숙한 그것을 뒤집고 다르게 보겠다는 의지이기도 했다. 언젠가 “말을 다듬다 보면 글이 되고, 글을 쓰다 보면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은 칼럼을 읽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는데, 근거 없는 헛소리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좋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쓰다 보면 조금 더 용감하고 한번 더 용서하는 사람은 될 수 있다. 근거는 글만큼이나 변화해온 지금의 나다. 예전에 내게 이해한다는 말은 곧 포기한다는 뜻이었는데, 지금 나는 포기하지 않기 위해 이해하려 한다. 극복하지 못한 지난 일과 크고 작은 상처는 여전히 산재하지만, 그것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새로 태어나는 문장들이 쌓이는 만큼 변할 것이다. 그렇다면 글은 권능보다 희망이다. 그리고 희망은 내가 아는 능력 중 가장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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