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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지은 Mar 08. 2021

당신이 되어보는 마음으로

열여섯 엄마의 일기를 필사하며


글 잘 쓰는 아는 오빠가 필사를 한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됐다. 그는 내가 아는 또래 비문인 중 가장 맛깔 나는 글을 쓴다. 선망의 대상을 만나면 편린마저 흡수해버리는 매니아적 기질이 발동해 몇 년째 마음만 배불리 먹으면서 미뤄온 필사를 시작했다. 신형철 평론가의 칼럼을 시작으로 김훈, 김연수 등 좋아하는 작가들의 수필에서 유난히 잊혀지지 않던 문장들을 틈틈이 공책에 옮겼다. 수십번 읽어서 익숙한 문장들이 쓸 때는 아예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다가오는 무게도 물론 다르다. 그렇게 필사를 하는 동안 나는 온전히 쓰는 이가 되어 그가 버리고 또 버린 후 골라낸 단어들 사이에서 읽을 때는 몰랐던 감정들과 그 너머의 삶을 느껴보려 애쓴다. 그 진액을 흡수하며 숙연해졌다가, 고통스럽다가, 겸손해지기를 반복한다. 나를 최소한으로 축소시키고 최대한 남이 되고자 한다는 점에서 필사하는 마음은 사랑하는 마음과 닮았다.


새해를 맞아 본가에 들른 겸 옮겨 쓰기 좋은 수필을 몇 권 챙겨올 작정이었다. 대문을 열자마자 엄마는 옷을 왜 그렇게 춥게 입었냐는 잔소리로 인사를 대신했다. 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책을 뒤적이는 딸을 보며 요즘도 소설을 많이 읽느냐고 물었다.


“읽고 쓰는 것도 다 소양이야. 넌 글도 떼기 전부터 그렇게 책 읽어달라고 졸랐는데, 네 동생은 아무리 읽어줘도 지 스스로찾아 읽지는 않았어.”


“네 할아버지가 기자셨고, 아빠도 글을 많이 써야하는 일을 하는걸 보면 집 안에 흐르는, 뭐 그런 게 있는 거지.”


아빠는 늘 활자에 대한 내 오랜 애정이 부계유전이란다. 어느 집이든 부모들이란 그럴듯한 기질은 내 덕, 영 탐탁지 않거나 모양 빠지는 기질은 배우자 탓을 한단 말이지. 다시 책에 고개를 파묻으려다 엄마와 시선이 마주쳤다. 불현듯 이년 전 우연히 보게 된 일기 생각이 났다. 옷장을 뒤적이다 마주한 옛날 사진 앨범 속에 꽂혀있던 낱장의 종이들. 얼핏 봤을 때 편지인 줄 알았던 결이 고운 종이 뭉치는 열여섯의 엄마가 쓴 일기였다. 어릴 적에 엄마가 이따금씩 방에 들어와 꽁꽁 숨겨놓은 일기장이나 편지 따위를 몰래 읽으면 그렇게 분에 찼건만, 입장이 바뀌니 도저히 안 보고 넘어갈 수 없었다. 귀 밑 단발머리에 예나 지금이나 투철한 집념이 엿보이는 눈. 구김살 없는 흰 볼 위에 말간 미소를 띈, 내가 모르는 그의 어린 날들을 한 장씩 넘겨본 직후라 더더욱 그랬다.


집으로 돌아와 한참동안 휴대폰을 뒤져 그날 부분부분 찍어둔 일기 사진을 찾아냈다. 평소에 그렇게 프라이버시, 프라이버시 외치면서 핏대를 세웠는데, 민망함을 넘어 약간의 죄책감마저 들었다. 그럼에도 난 쓰고 싶었던 모양이다. 얼마 전 새로 산 공책을 펼치고 종이 결을 한번 정돈한 뒤 적당한 리듬으로 옮겨 적기 시작했다.


그는 일기를 자신과의 대화라 칭했다. “무엇이든지 받아주는 이해심 많은 이 대화에 끼고 싶었다”면서, 금세 단 둘의 대화이니 낄 필요는 없단다. 성정이 오롯이 드러나는 문장이다. 오뚝한 콧날만큼이나 자존심이 세서 매번 반장만 하다 한번은 시기심 많은 동급생들의 모략(?)으로 부반장이 되자 아예 자리를 거부해버렸다는 일화가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열여섯은 세대를 막론하고 내적 갈등과 혼란, 자가당착의 시기인지 앞뒤가 모순적인 문장들이 꽤 자주 보였다. 어떤 문장들은 바로 전 문장의 역설이었다. “모든 세계가 다 증오에 차고 보기 싫은가 하면 때론 모든 것이 아름다와 보이고 이상적으로 보이는 두 가지 자아가 존재해 있다”니.

엄마는 늘 복잡하게 살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럼 삶이 필요 이상으로 피곤해진다며, 대체로 나무라고 때론 많은 말을 담은 눈으로 타이르기도 하면서. 그렇게 당신과는 무관한 기질인 것처럼 말하더니, 이건 뭐 모순의 아이콘인 내 일기장 한 구석에서 발견될 법한 문장의 향연 아닌가. 삶이 예고없이 던지는 농담같은 아이러니 사이에서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을 유지하려 애쓰는 모습마저.


묵묵히 옮겨 적다 “우리 사람의 가슴을 흠뻑 적셔줄, 그러한 만족을 줄 수 있는 일거리는 어디에 있을까”라는 문장에 다다랐을 때였다. 뜨거운 무언가가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컥 올라와 목구멍을 막는 바람에 다음 문장으로 옮겨갈 수 없었다. 눈 앞에 펼쳐질 미래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시절의 소녀가 자라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눈물을 훔치는 모습, 바퀴벌레가 나오곤 했다던 보스턴의 오래된 아파트와 ‘에리카에게’로 시작되는 편지들, 연구원 다닐 때 연배가 한참 높은 남자 소장을 지적했다가 미운 털이 제대로 박혔던 일. 들어서 아는 것 뿐인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나는 영영 알 수 없을 인생의 하이라이트들이, 마치 내 것이 된 것처럼.


학부모 참관수업이나 학예회 날이면 어김없이 못 오거나 운 좋게 오더라도 다른 엄마들보다 한참 늦게 도착해서 한발 일찍 떠나야했던 엄마. 차 좀 빼달라는 윗집 할아버지한테 “어디 여자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사과도 안한다”는 뒷담화를 듣던 엄마를 보며 철없는 마음에 낮에 놀러가면 늘 반갑게 맞아주던 친구네 엄마랑 바꿨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가끔 했다는 걸, 엄마는 알까.


"여자애가 늦게 다니지 말고 정숙해야한다"는 문자를 수시로 보내서 속을 한 바탕 뒤집어 놓다가도, 없는 시간을 쪼개 멘토링을 자처한 여중, 여고생들에게 "꼭 밖에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결혼해도 그만두지 말라"고 당부하던 엄마를 참 오랫동안 이해할 수 없었다. 만 서른 하고도 하나가 되는 신축년 새해에 책상 앞에 앉아 열여섯의 당신이 되어 펜을 잡아보니 그제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엄마는 무심하지도, 억세지도, 이중적이지도 않았음을. 오십년 대 끝 무렵에 딸 부잣집 막내딸로 태어나 다음에 태어날 아들을 위해 이름에 쇠북 종 자를 달게 된 당신이 지나온 모든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건 모두 다 했다는 걸. 당신을 제외하고 모두 다 남자인 동료들 사이에서, 당신이 뭐든 조금 더 세심하게 챙기길 바라는 아빠 곁에서, 당신에게 너무 자주 숨막힌다고 말했던 우리들 뒤에서.


일기를 옮겨 적고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있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 다 되어 있었다. 뭐든 자기 그릇의 깊이만큼 담아낼 수 있다면, 내겐 아직도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어쩌면 내 그릇은 밑이 얕아 남은 생을 다 쓴다 해도 당신만큼 담아낼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세월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시나브로 이해하게 해주니까. 그런 순간들이 찾아오면 그때는 잠시나마 내가 아닌 당신이 되어있길 바란다. 2021년 새해 첫 날처럼, 필사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당신이 되는 시간들이 쌓여가다 보면, 지금은 염치가 없어 다 표현하지 못하는 당신을 향한 내 사랑도 새로운 의미를 품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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