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의 소울메이트 D에게, 억만겹의 사랑을 담아
얼마 전, D로부터 흥미로운 링크를 하나 전달받았다.
『내가 보는 나, 남이 보는 나』라는 일종의 설문조사인데, 백 개의 형용사 중 나를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들을 고르고 링크를 지인들에게 전달해 동일한 목록에서 그들이 생각하는 나와 가장 비슷한 단어를 인당 열 개까지 고르도록 한 후 서로 대조해볼 수 있도록 설계된 콘텐츠다. 오전에 휘몰아친 일들을 끝내고 한숨 돌린 오후, 승냥이처럼 딴짓거리를 찾아 헤매는 직장인에게 이 얼마나 안성맞춤인가.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로 귀결되는 성찰형 에고 덕분인지, 그날만큼은 일이 죽어도 하기 싫어서였는지, 성심성의껏 키워드를 골라낸 후 주위 사람들에게 링크를 발송했다. 하나같이 MBTI 두번째 알파벳을 N으로 장식한 이들이라 그런지 다행히 이런 걸 왜 하고 앉아있냐는 면박 대신 ‘ㅋㅋㅋㅋㅋ 이게 뭐야 재밌겠는데’라는 반응이 주를 이뤘고, 아니나 다를까 응답률은 100%. 신나게 본인들 설문 링크까지 만들어 내게 돌려주는 것으로 화답하는 이 닝겐들을 보고 있자니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이 터졌다. 다들 어지간히 일하기 싫은가 보구나.
어찌저찌 쌓인 데이터를 모아 도출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대부분의 지인들은 나를 독립적이고 분석적이며 성취가 중요한 사람으로 생각하며 이는 내가 바라보고 추구해온 내 모습과 동일하다.
2) 여성일수록, 그리고 친밀도가 깊을수록 감성에 관련한 수식어를 고른 경우가 많았다.
3) 가까운 사이일수록 내 예상 범주에 전혀 없었던 긍정적 키워드를 고른 경우가 많았다. (EX: 겸손한, 경청하는, 이해심 많은)
첫번째 결론은 그리 놀랍지 않다. 기질적으로도, 이상적으로도 나는 자유와 뭉뚱그리지 않는 정확함, 그리고 목표를 지향한다. 원하는 자화상을 그려가는데 있어 단어의 무게가 부끄럽지 않을 만큼 성실한 편이기에 주관적 평가와 객관적 평가가 크게 갈리진 않을 것이라 예상했고, 결과는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두번째 역시 마찬가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투박한 표현이 포물선 대신 직선으로 튀어나가거나, 종종 때를 모르는 완고한 논리가 감정이 먼저 어루만져야 할 자리에 눈치 없이 치고 들어오기 때문에 특히 동성 친구들을 대할 때는 섬세함을 한 겹 덧대어 말하는 습관을 들이게 됐다. 정확한 언어는 잊혀도 언어가 불러낸 감정의 잔상이 그날의 공기로 남는다. 계속 보고싶은 사람은 둘 사이에 따뜻한 공기를 만들어내는 사람이고, 천성이 그렇지 못해도 노력으로 적정 온도를 유지할 수 있다. 그들이 고심해 골랐을 키워드들이 그동안의 의식적인 노력을 반영하는 것 같아 요상한 뿌듯함마저 들었다. 수고했다, 나의 부캐여.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쓰게 된 이유이자 나를 의아하게 만든 세 번째 결론이 남는다. 지인이나 알고 지낸 시간이 아직까지는 길다고 할 수 없는 이들이 표면만 아는 상태에서 고른 어휘라면 내 가식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세월이라 부를 수 있는 시절들을 통과한 이들이 택했다기에는 거창하다 못해 민망한 단어들이 보였다. 그 중에서도 D가 고른 단어들은 특히 의외였다. ‘이해심 많은’은 그렇다 쳐도 ‘겸손한’은 어디서 나온 거지? 다른 사람들이 들으면 배 잡고 웃겠는데? 알고 지낸 세월이 10년인데 누가 보면 처음 본 줄 아는 거 아냐? 예상치 못한 단어 앞에 피식 거리다 ‘하긴, 가까운 사람한테는 자존심 안 세우고 워낙 잘하긴 하지. 그걸로 날 따라올 만한 사람도 드물거야’로 사고의 흐름은 이어졌고, 역시 겸손과 어울리지 않는 인간답게 으쓱거리고 있었다.
그러기를 잠시, D만큼 날 것의 내 모습을 자주 보는 사람이 없다는 걸 인지하는 순간 잔뜩 올라간 어깨가 풍선에서 바람 빠지듯 서서히 내려앉았다. 잘하기는 커녕, D에게 하루라도 못나고 지질한 모습을 안 보인 날이 있었나. 독서 모임에서는 타인을 이해하려는 태도에 문학의 힘이 있다고 늘어놓는 주제에 그녀 앞에서는 편하다는 이유로 특정 집단을 함부로 재단하기 일쑤였으며, 수 틀리면 올라오는 역겨운 선민의식까지 봉인해제 된 지 오래건만 D는 대체 어디서 ‘겸손함’을 발견한 걸까.
기억의 필름을 되감아 우리의 지난날들 속 내 모습을 살펴보다 깨닫는다. D가 발견한 자질은 내 것이 아닌 그녀의 것임을. 결핍이 많은 사람의 눈에 타인의 빈 공간이 더 잘 보이듯, 미덕이 많은 사람에게도 같은 공식이 적용된다. 스스로의 장점보다 부족에 골몰하고, 타인에 의지하기를 결벽적으로 미안해 하는 내 유별남에 겸손함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주는 그녀. 예민함을 섬세함으로 불러주며, 그늘에서 깊이를 찾아주는 그녀. 사랑이 우리에게 주는 가장 따뜻한 선물은 새로운 이름이다. 유별남이 특별함이 되고, 아픔은 결속의 이유가 되며, 결핍에서 존재의 서사를 보는 시선과 그곳에서 탄생하는 새로운 이름으로 서로를 부르는 세계. 사랑의 세계에서 우리는 온전히 우리 자신으로 충만한 동시에 더 나은 나를 결심하게 된다. 한 번도 겸손해본 적 없는 내가 D로 인해 아직은 낯선 관념인 그 어휘를 살아보고 싶어진 것처럼.
말간 뺨, 섬세함 속에 잔 다르크 같은 단호함이 한 줄기 서린 눈빛, 작고 야무진 입매. 다른 이의 장점은 그렇게 정확히 찾아내면서 자신은 ‘변덕스럽고 충동적인’ 존재로 칭하는 윤동주적 부끄러움이 향도하는 그녀의 자의식을 ‘아름답다’ 외에 어떤 정확한 어휘로 포착할 수 있을까. 불완전함 속에서 온전함을, 광기에서 순수함을 찾아내며, 선악에 범주에 인간에 대한 이해를 가두지 않는 영혼. 설령 더는 마주칠 수 없고 봐도 피하고 싶은 인연이라도 삶의 한 구간을 함께했던 기억 그 자체로 소중하다며 오고 가는 말들 사이에서 끝까지 상대를 지켜주는, 불리한 순간에도 결코 비겁하거나 저열한 쪽을 선택하지 않는 심지. 이 고결한 자질들의 집합체인 D가 나를 섬세하고 강인하며 따뜻한 사람이라고 불러줄 때마다 그 이름을 살아내고 싶은 의지가 내 안에서 서서히, 분명하게 눈을 뜬다.
지난 글에 문학은 최대한 남이 되어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한다고 썼다. 내 최선이 아직까지는 문학에 대한 선망에 머무르는 중이라면, D는 문학을 삶으로 실천한다. 여태껏 그녀만큼 감각이 기민해 온 몸으로 삶을 버거워 하면서도 삶을 품은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이 깊은 사람을 본 적 없다. 채찍질이 촉발하는 성장은 우리가 흔히 미디어에서 보고 들어온 것처럼 충분히 납득할 만한 서사지만, 자기발전의 토양을 결정하는 건 이해와 일단 믿고 보는 근거 불충분한 믿음, 다정함과 관대함 같은 자양분이다. 가까운 타인에 의해 이런 축복을 누리게 된 이가 써 나갈 성장의 서사는 방향성을 갖게 된다.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앞뒤 보지 않고 달리는 대신, 무엇을 위해 더 나은 인간이 되어야 할지에 먼저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이다.
D의 시선은 늘 나와 동거하며 나아갈 방향을 생각하게 한다. 다스려지지 못한 호승심이나 열패감으로 일을 그르칠 때도 그녀가 생각지도 못한 사랑의 이름으로 나를 불러 주리라는 것과 그 이름이 곧 내가 되어야 할 사람임을 안다. 그 이정표를 따라가는 동안, 나 또한 마주하는 이들에게 새로운 이름표를 건네리라고, 부족한 글에 빌어 약속하고 싶다.
박준 시인의 글을 인용해 마무리하려 한다.
너처럼 아름다워보자고 시작한 글이 이렇게나 멀리 흘렀다. 보이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네가 내 세상에 살고 있다. 앞으로 내가 살아내야 하는 세상 어디든 네가 있다. 만나면 몇 번이고 고맙다고 말하고 싶다.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