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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지은 Mar 14. 2022

낭만주의자의 영원한 메시아

Ep.01_신해철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빠른 호감을 품게 되는 계기   맞아 떨어지는 뮤지션 취향 만한 것도 없다. 음악이나 노래 대신 굳이 뮤지션 취향이라고 명명한   다듬어진 곡의 완성도보다 노랫말의 행간에서 드러나는, 그걸 쓰고 부른 사람이 쌓아 올린 태도나 철학에 취향의 주안점을 두기 때문이다.  많고 많은 뮤지션  나는 신해철을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있다. 좋아하는 뮤지션으로 그를 꼽는 사람을 마주하면,  이상의 자기소개나 탐색전 같은건 생략해도   같다.   앞에 있는 그는 흔들릴  아는 –  정확히 말하면 자아 탐색의 필요를 느낄 만큼 스스로에게 충분히 질문하고,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오는 심리적 변화 곡선을 감내할 만큼의 용기가 있는 – 영혼이며 반골 기질이 뼛속에 각인된 낭만주의자일 확률이 90% 이상일테니까. 대한민국 기성세대들이 치를 떠는 반동분자, 거대 조직의 아웃사이더 혹은 시한폭탄, 부모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 때문에  명에  죽겠어 . 내겐 끌릴  밖에 없는 별종들. 평생 쌓아온 취향을 돌아보고 분석하게  연재를 사랑하는 뮤지션과 그를 사랑하는 이들에 대한 소회로 시작해보려 한다.


물음표로 그려가는 삶

세상이 변해갈 때 같이 닮아가는 내 모습에
때론 실망하며 때로는 변명도 해보았지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질문은 지워지지 않네
우린 그 무엇을 찾아 이 세상에 왔을까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홀로 걸어가네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무엇을 해야 하나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것이 나의 첫 깨어남이었지

<길위에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신형철 평론가는 예술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어떤 자리이건 어떤 장르이건 능란하게 소화해내는 이가 프로일 것이지만,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이는 예술가 일 것이다.”


겪어보지 않은 삶에 대한 답을 대신해주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끝없는 질문을 던짐으로 답에 가까워가는 작품이 있다. 신해철의 음악은 후자다. 멈추지 않는 질문으로 점철된 생의 본질처럼 그의 노래는 언제나 의문문으로 시작하고 마무리된다. 살아보지 않은 종류의 삶이 불러올 파장을 서른한가지 아이스크림 마냥 맛보기로 보여주는 전능자, 안전지대에 머무르려 하는 인간의 관성을 탈속적인 사상으로 계몽하려는 학자, 지금 네가 겪고 있는 고통을 먼저 겪어본 자로서 위로하는 선배의 입장 중 신해철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아무리 방황을 하고 또 해도 나는 여전히 방황 중이며 나도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고 말할 뿐이다. ‘부끄러운 게으름, 자잘한 욕심들아 얼마나 나일 먹어야 마음의 안식을 얻을까’라는 가사가 수사적 질문이 아닌 사적인 고뇌임을 듣는 이는 느낄 수 있다. 이렇듯 그는 서투르게 몸부림 치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듣는 이와 출발선부터 함께 통과해 나가는 사람이다. 내가 걷고 있는 길을 앞서 통과한 이가 가르쳐주는 지름길이 고마울 수는 있겠으나, 지금 내 곁에서 걸려 넘어지고 굴러가면서 가까스로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이를 보며 느끼는 동지애만큼 뜨거운 감정을 일으키지는 못할 것이다. 열 여덟 언저리에 처음 들었던 <민물장어의 꿈>이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내게 새로운 의미의 감동을 줄 수 있는 이유다. 2014년 9월, 살아생전 마지막이 된 노래를 부르기 전 그는 이런 말을 한다.


“내가 여러분에게 할 말이 있고 도움이 될 거라고 믿는 건 내가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겁쟁이니까, 겁나는게 뭔지 아니까 여러분에게 도움이 될거다 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음악을 그냥 계속 하기로 한 거예요.”


무대 위에 선 뮤지션이 자신을 올려다보는 수많은 관객들에게 스스로를 두려움 많은 겁쟁이로 칭하는 건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혹자는 솔직한 성품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하겠지만, 선망의 대상에게 솔직함은 결코 가볍게 발휘할 수 있는 미덕일 수 없다. 사랑하는 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너는 혼자가 아니라는 말을 대신하기 위해 자신의 연약함을 기꺼이 드러내는 일은 저 멀고 높은 곳에서 일방적인 사랑을 받는 존재가 아닌 사랑하는 이들과 뭐든 함께하기를 자청하는 존재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그의 사랑 노래들 속 세월을 뛰어넘는 낭만의 기원이 여기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의 낭만

출처 - 한겨레신문
난 바보처럼 요즘 세상에도 운명이라는 말을 믿어
그저 지쳐서 필요로 만나고 생활을 위해 살기는 싫어
하지만 익숙해진 이 고독과 똑같은 일상도
한 해 또 한 해 지날수록 더욱 힘들어
... 난 나를 지켜가겠어 언젠간 만날 너를 위해
세상과 싸워나가며 너의 자릴 마련하겠어

<Here, I Stand For You>
친구들과 부모 모두 내게 말을 해
너를 단념하라고
그렇지만 난 느껴 왜 내겐 꼭 너여야 하는지
아직 단 한번의 후회도 느껴본 적은 없어
다시 시간을 돌린대도 선택은 항상 너야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신해철은 삶의 방향성을 두고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지만, 그가 견지하는 가치관만큼은 시종일관 단호하다. 시대가 변할수록 어쩐지 미적지근해지는 노랫말들은 적당한 타협을 중용의 미덕이라 포장할 만큼 머리가 커버린 나와 닮은 듯하다. 현실 자각이 유난히 춥게 느껴지는 날이면 나는 의심 많은 제자가 메시아를 찾듯 그의 노래들을 차곡차곡 플레이리스트로 옮기고는 ‘답정너’의 심정으로 재생버튼을 누른다.


‘내 본질은 이게 아닌데 자꾸 저들이 원하는 답을 적으려고 해요. 사실은 나도 틀릴까봐 두렵나봐요. 그러니 내게 말해줘요, 넌 틀리지 않았다고.’


낭만적인 어른이 되고 싶었다. 손해를 최대한 덜 보기 위해 이런저런 선택지를 오가는 대신 그 어떤 손해도 기꺼이 감수할 만한 주관식 답을 찾으라고 말할 수 있는 어른. 남이 아닌 내 자식에게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그런 결심들이 어쩔 수 없이 흐려지는 날은 점점 더 잦아지지만 여전히 타협하긴 싫다. 그럴 때가 오면 그의 노래를 부적처럼 꺼내 듣는다. 혹자는 낭만이 현실에 발 붙이지 못하고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상태라고 하지만 신해철이 노래하는 낭만의 성격은 굳건하다. 잔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의지를 다잡아 나를 지켜가겠노라고, 점점 좁혀오는 외부세계의 압박으로부터 너의 자릴 끝까지 남겨놓겠노라 선언한다. ‘약속’, ‘헌신’, ‘운명’ 같은, 무겁다 못해 환상에 가까워져 버린 낱말들을 밑줄 긋듯 또박또박 나열함으로 그 어떤 차선책이나 도피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는 그의 돌직구는 지독한 회의주의자의 철벽 같은 방어도 뚫을 수 있을 것만 같다. 허무한 일상으로부터 빚어지는 고독에 저항하려 그때그때에 맞는 인스턴트식 낭만을 휘두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믿는 바에 대한 낭만적 시선을 지키려 일상의 고독을 불사하는 사람도 있다. 신해철은 에누리 없이 후자다. 그러면서도 ‘기다림에 늙고 지쳐 쓰러지지 않게 어서 나타나’달라는 어린 아이 같은 솔직함은 그의 선언이 한낱 허풍이 아님을 알게 한다.


네 아픔이 내 것이 되길 바라는 마음

넥스트(N.EX.T)_먼 훗날 언젠가_M/V_1997

니가 편히 잠들 수 있도록 너의 머리맡을 나 항상 지킬게
니가 무서운 꿈을 깨어나 내 이름 부를 때 나 언제나

<먼 훗날 언젠가>

신해철은 정말 멋진 마초다. 권위적 남성중심주의를 뜻하는 단어로 통용된 지 오래지만, 본래 마초의 사전적 의미는 ‘기백 있는 남성다움’을 뜻한다. 남성성, 여성성을 운운하는 일 자체가 조심스러운 세상이고 최대한의 조심성을 갖추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곤경에 처하거나 괴로워할 때 달려가 구해주고 싶은 마음, 어떤 고통이라도 대신 짊어지겠다고 자청하는 마음을 단순히 한 시대를 풍미한 기사도 정신으로만 볼 수 있을까? 그는 페미니즘이 대두되기 십년도 더 전부터 여성들이 ‘자신의 주인’이자 ‘운명의 주인’이 되기를 바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진행하던 라디오 프로그램 <고스트 스테이션>에서 2004년 발표한 <사탄의 신부> 가사에 대해 설명하며 “전업주부란 위대한 직업임을 알면서도, 그 자체의 경제력과 생산성을 인정하면서도, 여중생이 만면에 웃음을 띠며 장래희망에 현모양처라고 적을 때, 나는 확 다 불 싸질러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곤 한다”고 발언할 정도로 그의 소신은 확고하고 거침없었다.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이가 악몽에서 깨어나 가장 내밀하고 무방비한 상태인 잠결에 자신을 찾을 때 언제나 두려움을 달래고 다독일 준비가 되어있겠노라 약속하는 모습은 그녀의 눈시울을 붉힐 수 밖에. 더없이 강해질 수 있는 동시에 한없이 약해져도 괜찮다는 안전함을 보장하는 사랑만큼 사람에게 큰 위안은 없다.


조용하고 침착하게 외력에 맞서려다 보면 내면은 어느새 소리 없이 분열한다. 그런 날이면 비슷한 악몽을 꾸곤 했다. 아무리 발을 굴러도 한 발자국으로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허우적거리고 있거나, 어떤 수업에 등록한 줄도 모르고 있다가 한 학기가 다 가버리는 바람에 졸업이 날아갈 위기에 처한다거나 하는 여러모로 끔찍한 꿈이다. 그 속에서 나는 한없이 무기력하고 현실과 다를 바 없이 얼굴을 감싸쥐고 자책하기 일쑤다. 튕기듯 깨어나 망막이 채 적응하지 못한 어둠 속에서 희게 빛나는 옆사람의 품을 확인하는 순간 꿈의 세계는 신기루처럼 자취를 감춘다. 감은 눈으로도 다 안다는듯, 뒤척이는 어깨를 다독이는 손길이 닿으면 그 순간만큼은 꿈보다 안온한 현실에 스르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마왕이 내 부동의 ‘넘버원’인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이 겪어본 감정만을 충분한 숙고를 실어 전하는 섬세함에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듯 내게도 신해철을 알려준 곡이 <그대에게>라면, 그를 알고 싶게 만든곡은 <먼 훗날 언젠가>다. 당시에는 그가 수면제와 신경안정제 없이는 단 세시간도 잘 수 없을 만큼 오랜 기간동안 수면장애를 겪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는데도 잠을 편히 이루지 못할 만큼 복잡한 내면을 지닌 사람임을 노래를 들으면서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브릿지의 노랫말은 구원보다 공감에 가깝다. 아무것도 모른 채 구원자의 자아도취에 빠진 백마 탄 왕자의 입장이 아닌 자아의 굴레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는 남자가 사랑하는 상대만큼은 무의식의 세계에서 그저 평온하길 바라는, 그러지 못할 때를 대비해 언제든 부르면 닿는 곳에 있겠다는 염원으로 이렇게 멋진 가사를 써냈다. 세상에는 아파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 있다.


단 하나의 약속

[MV] 신해철 "REBOOT MYSELF Part.1" - 단 하나의 약속

하나만 약속해줘 어기지 말아줘
다신 제발 아프지 말아요
내 소중한 사람아
그것만은 대신해 줄 수도 없어
아프지 말아요

<단 하나의 약속>

감각적인 전자음과 세련된 가사로 다듬어진 노래들도 즐겨 듣지만, 어릴 적 순정만화를 끼고 산 탓인지 마음이 가는 건 동화같은 확신에 찬 노래들이다. 뭇 사람들 귀에는 신파에 가까운 클리셰로 들릴 법한, 나 먼저 행복하고 보자는 세태와는 정반대 방향인 헌신과 영원을 약속하는 노랫말에 나도 모르게 웃음 짓거나 뭉클하고 만다. (현실과 한참 동떨어져서 그런가?) 정말이지 그냥 좋다. 그의 유작앨범인 <Reboot Myself Part 1>의타이틀 곡인 이 노래도 꼭 그런 느낌이다. 본인 피셜 15년동안 생각하고 만든 곡으로, 그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물론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담았단다. 바쁠 때는 무시해도, 자잘한 약속들 모두 잊어도 좋지만 제발 아프지만 말아 달라 당부하는 건 차마 그것만은 대신해 줄 수 없기 때문에. 사서 고통 받고 싶은 인간은 어디에도 없으므로 대신 아프고 싶은 마음은 사랑이 시킬 때만 말이 된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특정한 얼굴들이 떠오르는 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아름다움만큼 생채기 나기 쉬운 영혼을 지녔기 때문이겠지. 고흐의 열정과 니체의 분노*를 이해하는 그대가 많이 아플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아픔없는 생은 없으니 아프지 말라는 말은 차마 못하지만 그 어떤 상처도 그대 영혼의 온도를 떨어뜨리지 않기를. 세월로도 다 아물지 못한 기억과 평생의 숙적같은 결점이 예고없이 습격해오는 밤이면 나 항상 그대의 머리맡을 지킬테니 부디 이름 불러주기를.


(*<나에게 쓰는 편지> 가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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