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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지용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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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지용 Apr 01. 2019

지용시선 열 번째

문학동네 시인선 023. 이현승 시집 <친애하는 사물들>

우리는 천천히 죽어가고 있다
손끝에서 서서히 빠져나가는 피를 느낀다
그러므로 내일을 위해서 기도하지 말 것
고통 없이 죽이는 것이 도축의 자비이며
무표정이야말로 오늘의 예의이다

간단하지 않은가
내일없이 사는 것

p.30 '도축의 시간' 中


문학동네시인선 023. 이현승 <친애하는 사물들>


시인 이현승


1973년 전남 광양 출생. 시집으로는 <아이스크림과 늑대>, <친애하는 사물들>, <생활이라는 생각>이 있다. 첫번째 시집은 절판되어 찾아보기가 어렵다.



매우 주관적인 시집 소개


시를 쓴다는 건, 시인이 된다는 건 무엇일까. 아니 어떻게 하면 시를 쓰고 시인이 될 수 있을까. 다시, 그럼 무엇이 시고 누가 시인인 것인가.


이 질문에 이 시집은 나름의 명확한 답을 내리는 것만 같다. 시인이란 아주 예민한 사람이고, 그래서 보통이라면 잘 느끼지 못할 것들을 매우 민감하게 느끼고 감각하는 사람이라고. 그렇다면 시는 예민한 감각에서 비롯되며 시를 써나가는 것은 피부를 얇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이 시집을 읽는 일은 고통의 연속이다. 기쁜 일은 한없이 기쁘고, 슬픈 일은 한없이 슬프다. 매우 아프며 매우 신난다. 극단의 감각. 감각의 절정. 섬세한 것들의 집합체가 이 시집에 모여 숨을 쉰다.




화난 사람들은 돌멩이를 하나씩 들고 물가로 간다

돌멩이들은 부릅뜬 눈처럼 무섭다

눈을 향해 날아들 때가 제일 무섭다

...

손바닥에 돌멩이를 말아쥐고

얇은 유리창 같은 수면을 노려본다

와장창 깨졌다가도 금세 원래대로 회복된다


수면 아래로 봉인되는 소리들 돌멩이들

...

p.13 '돌멩이' 中



드라마에서 화가 잔뜩 난 주인공은 어김없이 강가로 가 돌을 던진다. (혹은 반지를 던진다.) 그렇다. 수면은 자주 화풀이의 대상이 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강가에, 바다에 돌을 던졌을까. 이때 우리의 시선은 강의 바깥에서 돌을 던지는 장면이다. 그러나 반대로 강물 아래에서 이 장면을 다시 본다면 어떨까. 돌이 화를 품고 눈을 향해 날아든다. 무서운 일이다. 아니 무섭다고 말하기도 무서운 얘기가 된다. 수면은 금세 원래대로 회복되나, 중요한 건 '회복'된다는 것이다. 회복된다는 말은 '상처 이전'으로 온전히 돌아간다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시간이 많이 지나 다시 괜찮아진다해도 그건 깨졌던 것이 된다. 벌어진 일은 벌어지지 않은 일이 될 수 없다. 


아, 그렇게 보니 강가에는 얼마나 많은 감정들이 쌓여있는가.

내 안에는 누군가 던진 얼마나 많은 돌들이 쌓여있는가.




명심하자. 물속에선

천천히 걷는 것이 중요하다.

일정한 속도로.


물살을 거스르며 제자리 헤엄을 치는 송사리처럼

그 곁에서 포말을 일으키며 같이 헤엄치는

돌다리들처럼.


빗속에서 완전히 몸을 잠그고.


p.18 '일인용 잠수정'



우리 모두에게는 잠수정이 필요하다. 깊은 곳으로 안전하게 내려갈 잠수정. 어두운 곳에서 스스로를 보듬어줄 시간과 공간 말이다. 그런데 그 잠수정이 '일인용'이라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더 깊은 곳으로 잠수하면 할수록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주변은 온통 어둡고 나는 오롯이 혼자다. 생전 처음 보는 괴상한 것들이 눈에 들어올 것이고, 어쩌면 숨을 쉬기가 조금씩 곤란해질지도 모른다. 기분 탓일지는 모르지만. 그러므로 일인용 잠수정은 당장 수면 위로 떠오를 수 있는 기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깊이 아래로 끝없이 내려갈 수 있으나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순식간에 수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그래서 저 아래에서 본 것들을 생각나는 이들에게 말할 수 있는.


어쩌면 삶은 탄탄한 일인용 잠수정을 만들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분리수거된 쓰레기들 위로

비가 내린다

끼리끼리 또 함께

비를 맞고 있다


같은 시간

옥수동엔 비가 오고

압구정동엔 바람만 불듯이

똑같이 비를 맞아도

폐지들만 무거워진다


같은 일을 당해도 

어쩐지 더 착잡한 축이 있다는 듯이

....

젖은 것들만이

비의 무게를 알 것이다


p.22 '비의 무게'



그렇다. 삶은 영원히 불평등할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모두가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비를 맞아본 자만이 비의 무게를 안다. 누군가는 비를 피했을지 모르나, 그는 비의 무게를 알지 못한다.





시작해보나마다 뻔한 실패를 향해 걸어가는

서른두 살의 주인공에게도

울분인지 서러움인지 모를 표정으로

밤낮없이 꽃등을 내단 봄 나무에게도

위로는 필요하다


눈물과 콧물과 침을 섞으면서 오열할 구석이,

엎드린 등을 쓸어줄 어둠이 필요하다


p. 54 '다정도 병인 양'



이미 실패의 길을 걷는 자에게도, 밤낮없이 꽃등을 내단 모두가 부러워할만 한 봄 나무에게도 '위로는 필요하다' 그렇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 다른 위로가 필요하다. 공장에서 생산해내듯 찍어낸 모두를 위한 값싼 위로를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히 아닐 것이다.


당신은 오늘 다정했는가. 그 다정은 분명 당신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리하여 당신은 위로를 받으며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보다 기쁜 일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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