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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 Mar 22. 2022

Everybody knows Rosa (2)

「맥간 인연 1」

2015년 1월 11일. 어제 오후에는 코라길을 돌고 와서 다섯 시 반쯤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새벽 여섯 시. 겨울잠처럼 긴 잠이었다. 이역만리 고산 지역에서의 겨우살이에 시나브로 피로가 쌓였던 모양. 문득 어제 걸은 코라길 풍경이 떠올랐다. 망명인들의 염원이 켜켜이 내려앉은 맥간의 순례길. 그 길 위에선 내 마음에도 성심과 평화가 차올랐다. 이따금 마주치는 원숭이들의 눈빛은 독살스러웠지만.


빼꼼. 조심스레 방문을 열어보았다. 다행이었다. 로사가 없었다.


로사의 방과 내 방이 베란다를 공유하고 있어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그녀에게 포착당하기 십상이었다. 한 번 그녀에게 발견당하면 그 끝없는 수다에 최소 한 시간은 결박당하는 것이 다반사. 나는 살금살금 그녀 방 앞을 지나갔다. 나의 출타를 적에게 알리지 말라.


그 순간 그녀의 빨랫줄에 걸린 내 파란색 스포츠 타월이 눈에 띄었다. 로사는 자기 빨랫줄을 써도 되는 타인은 오로지 나뿐이라고 힘주어 말했었다. 아직 꿉꿉한 그 타월을 흘긋 보니 로사를 향한 고마움과 부담의 양가감정이 일순 내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뭉그적댈 순 없는 법. 부리나케 베란다를 빠져나왔다. 휴. 탈출 성공. 두근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나는 다시금 어제 걸은 코라길을 떠올렸다. 여기 있다가 로사를 마주치느니, 코라길 위에서 마음의 평화를 충전하며 원숭이들의 살기 어린 눈빛을 직면하는 게 낫겠다. 터벅터벅. 나는 오늘도 코라길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옴 마니 팟메 홈.




2015년 1월 14일. 오늘도 이곳에 왔다. 숙소 앞 구멍가게.


컨테이너 박스 안에 차려진 이 작은 가게 안에는 없는 게 없다. 첫인상만 보고 구멍가게라 부르기 시작했지만 만물상이라 부르는 게 맞을 성싶을 정도. 나는 이 가게에 단골이 됐다. 특히 매일 저녁 귀갓길에는 루틴처럼 이곳에 들렀다. 하루의 피로와 추위를 녹이며 이곳에서 마시는 짜이 한 잔이 일품인 덕이었다.


나를 본 주인아저씨는 묻지도 않고 양은 주전자 가득 짜이를 끓여 내오셨다. 우리는 오늘도 짜이를 나눠 마셨다. 나 한 잔, 아저씨 한 잔. 오늘 하루 있었던 헐렁한 이야기들을 헐렁헐렁 풀어놓았다. 사이에서 타오르는 모닥불 덕분에 양볼이 더욱 후끈했다. 어쩌면 짜이 맛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는지 모른다. 타국에서 사귄 이웃과 하루를 마무리하며 나누는 수다. 거기에 담긴 온기와 당분을 짜이 한 잔이 감히 이길 순 없었으리.


오늘의 화두는 로사였다. 아저씨는 로사의 ‘ㄹ’만 듣고도 벌써 미간을 찌푸리셨다. “나 그 여자 싫어해. 정말 정말 아주 많이!”


전말은 이러했다. 하루는 로사가 이 가게에서 외상으로 물건을 한가득 사 가더니(아저씨는 기다란 두 팔로 그릴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원을 그려 보이며 ‘한가득’을 표현했다.), 이튿날 실제 구매가에 한참 못 미치는 금액만 들고 와서는 그 가격이 맞다고 바득바득 우겨댔다는 것이다. 아저씨는 로사의 돈을 한 푼도 받지 않으시고 그녀를 그대로 돌려보내셨다고 했다. 그녀의 뒤꽁무니를 향해 이렇게 외치시며. “너, 다시는 내 가게에 오지 마!”


오늘 밤에도 거나하게 술에 취한 로사의 목소리가 벽을 뚫고 내 방에 들려온다. 오늘은 몇 명의 인도 남정네들까지 숙소에 데려온 모양. 남정네들은 이제 그만 해산하자 하고, 로사는 조금만 더 마시다 가라 하고.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저 대화의 끝은 언제쯤일까? 로사는 허구한 날 술에 취해있다며 치를 떨던 가게 아저씨의 얼굴이 떠오른다. 술 좀 그만 마시라며 로사를 타이르던 구루의 구슬픈 목소리도. 


만만치 않은 이웃을 만났다.




2015년 1월 15일. 옥상으로 올라온 것은 일종의 피난이었다.


당초 점찍어뒀던 마음의 안식처는 방 앞 베란다였다. 그곳에서 바라보는 맥간의 산경이 끝내줘서였다. 우람한 등성이를 따라 이어지는 유려한 능선. 골짜기를 점점이 채운 간소한 가옥들. 계절의 위엄을 겸양 없이 뽐내는 설산의 정상까지. 이 방에 갓 짐을 풀고는 밤낮없이 베란다에 자릴 잡곤 했다. 이곳에 앉아 책을 읽고 일기를 쓰고 음악을 듣고 감상에 잠기노라면 세상의 누구도 부럽단 생각이 안 들었다.


하지만 침입자에게도 밤낮이 없었다. 말 못 해 죽은 귀신이 들러붙은 건지 로사는 나만 보면 말을 걸지 못해 안달이었다. 사사건건 간섭하지를 않나, 이따금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윽박지르지를 않나, 내 몸에 제 몸을 찰싹 붙인 채로 몇 시간이고 내 귓가에 침을 분사하지를 않나. 우회적인 거절의 표시로서 이어폰을 꾹 눌러 끼고도 있어보았지만 소용없었다. 애초에 그 정도 수법이 통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부터가 순진한 오산. 어렸을 때 본 <미저리>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그 영화감독에게도 혹 로사 같은 친구가 있었던 걸까?


숙소 주인 링키는 이제 와서 나를 돕는 척했다. 로사와 함께 쓰는 3층 대신 1층, 2층의 빈 방들을 그는 내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어떤 방도 지금의 내 방만큼 맘에 들지 않았다. 이에 그가 궁여지책으로 꺼내 든 마지막 카드. “옥상으로 튀어!”


옥상에서 나 홀로 즐기는 고요한 명상의 시간. 그 시간에 이름을 붙인다면 그 이름은 ‘자유’이리. 황홀한 휴식을, 아니, ‘자유’를 만끽하고 살금살금 3층으로 내려오던 찰나. “진!” 아니나 다를까 고성이, 아니, 괴성이 들려왔다. “어디 가! 뭐하러 가!”


“어디 가? 뭐하러 가?”가 아니었다. “어디 가! 뭐하러 가!”였다. 도무지 익숙해질 수 없을 데시벨의 소음이 내 귀에 날카롭게 꽂혀 왔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그냥 어디 좀 나갔다 오려고.” 어린아이 고양이 세수하듯 대충 얼버무렸더니 그녀, 내 눈을 무섭게 노려보고 타이른다. “슬로우리 슬로우리(Slowly slowly).” 아놔. 대체 뭘 슬로우리 슬로우리 하라는 건지. 별 볼 일 없는 내 사생활은 왜 그리 궁금해하는 건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특이한 숙소 생활이다.




2015년 1월 16일. 새 숙소를 찾아다녔다. 매일 동이 틀 때까지 이어지는 그녀의 고성방가에 내가 든 백기였다. 링키는 날더러 옥상으로 튀라고 했지만 동지섣달 긴긴밤을 옥상에서 지새울 순 없지 않은가.


마침 지금 묵는 숙소 바로 앞에 괜찮은 숙소가 있었다. 친절하고 말쑥한 인도 여인이 운영하는 깨끗하고도 저렴한 숙소. 다만 텔레비전이 없고 와이파이 신호가 불안정하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지금 묵는 방에선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영화들을 벗 삼아 맥간의 길고 까만 밤을 외롭지 않게 보낼 수 있었는데. 하기야 숙소를 옮기고 나면 왁자지껄한 발리우드 음악으로 옆방 소음을 애써 차단할 필요도 없기는 하겠다.


고민에 잠긴 날 보고 인도 여인이 물었다. “왜 그 숙소에서 나오려는 거야?” 내가 답했다. “옆방에 묵는 사람이 시끄러워서.” 그러자 여인이 웃으며 말했다. “아아, 그 여자?” 아무리 재고 따져도 복불복의 명을 피할 수 없는 게 숙소 구하는 일이라지만, 맥간의 많고 많은 방들 중에 하필이면 그 굴에 빠져든 사람이 바로 너였냐는 표정으로 그녀가 덧붙였다. “이 동네에 그 여자 모르는 사람 없을걸? 맨날 베란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온 동네를 시끄럽게 만드는 여자잖아.”


오늘도 구멍가게에서 아저씨와 짜이를 나눠 마셨다. 조금 전에 로사가 이 가게에 다녀갔다며 아저씨는 혀를 끌끌 차셨다. “베리 배드 걸!”


아무래도 숙소를 옮기기는 힘들 것 같아 조만간 이 숙소의 1층으로 방만 옮기기로 했다. 숙소는 사수하되 로사로부터는 벗어나려는 술수. 오늘 하루 공연한 일에 품을 들인 것 같아 심신이 노곤했다. 부디, 오늘 밤은 무사해야 할 텐데. 이게 웬 맥간의 잠 못 이루는 밤이람.




2015년 1월 17일. 오늘도 로사에게 붙잡혔다. 이건 내가 상상했던 그림이 아닌데.


밤새 소음 공해를 견디다 못한 내가 결국 그녀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로사가 문을 열었다. 나는 말했다. 제발 밤에는 조용히 해줘. 내 할 말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토록 간결하고도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곧장 내 방으로 돌아올 요량이었다.


하지만 어디 로사가 내 말만 고분고분 듣고 나를 순순히 보내줄 이웃이던가. 그녀는 나를 붙잡고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내가 친구가 많다니 무슨 소리냐, 나는 숙소에 친구들을 데려온 일이 없다, 나는 친구가 없는 사람이다, 이전에 숙소에 데려온 남자는 나의 오빠다(?), 나는 몽골에 남자 친구가 있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오직 그 사람뿐이다, 내 방을 드나드는 남자는 숙소 주인 링키와 스님뿐이다(?) 등등. 나는 그런 것 다 ‘아이 돈 케어’니까 그저 밤에 조용히만 해달라고 다시 한번 힘주어 말해 보았다. “리쓴!” 로사가 버럭 화를 냈다. 그리고는 제 이야기를 이어갔다. 조금도 궁금하지 않고, 내가 왜 이 이야기를 듣고 있어야 하는 건지 조금도 납득되지 않으며, 그래서인지 조금도 기억나지 않는 로사의 길고 긴 남자 이야기. 밤에 조용히 해달라는 말이 자신의 정숙함을 부정하는 말로 들렸단 말인가. 그녀는 제 나름의 항변 또는 궤변을 끝도 없이 늘어놓았다. 맥간의 밤이 이런 식으로 깊어갈 줄이야.


어떻게 어떻게 해서 이야기를 겨우 마무리 지었다. 이제 그만 헤어질 시간. 그녀가 작별의 포옹을 해왔다. 나로서는 일방적으로 포옹을 당한 셈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왈칵! 내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니, 울음이 내 안에서 터져 나왔다.


로사는 갑작스러운 내 눈물 폭탄에 적잖이 당황해했다. 어쩔 줄을 몰라하다가, 어린아이 어르듯 나를 달래도 보다가, 결국에는 또 자기 이야기로 회귀하고 마는 그녀. 로사의 이야기는 이후로도 한 시간을 더 이어졌다. 나도 더 이상 훔칠 눈물이 없었다. 그녀의 목청에 눈물도 놀라 제자리로 쏙 들어간 모양.


터져 나온 울음의 기원은 어디였을까? 나는 그곳을 알 것도 같았고 모를 것도 같았다. 잠들어 있던 애수를 부화시킨 로사의 품 안이 제법 따뜻했던 건 분명했다.


당분간은 이 방에서 그대로 지낼 것 같다.




2015년 1월 18일. 쿵쿵쿵. 오늘도 들려오는 격렬한 노크 소리.


로사는 이따금 내 방문을 무작정 두들겼다. 그리고 외쳤다. “진! 뭐해!” 어릴 적 동네 친구들이 “친구야~ 놀자~” 하며 나를 찾으면 그 소리가 그렇게 반가웠는데, 로사의 노크 소리는 달랐다. 그 소리는 차라리 공포였다. 언제부턴가 나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있어도 없는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구태여 저 방문을 열어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가 뭐 있나.


오늘만은 달랐다. 어제부로 나는 로사를 1도씨쯤 더 따뜻하게 여기게 된 기분이었다. 오늘도 저 노크 소리를 무시한다면 내 안에 죄책감이라는 감정까지 들 것 같았다. 빼꼼. 방문을 열었다. 이번에도 나는 척을 했다. 못 이긴 척.


로사는 나를 자기 방으로 끌고 갔다. 이미 저녁을 먹어 생각이 없다고 말했는데도 막무가내였다. 그곳에는 과연 근사한 야채 볶음밥이 준비돼 있었다. 꼴깍. 아까 먹은 저녁이 무색하게 입 안에 침이 고였다. 로사가 건네주는 숟가락을 덥석 받았다.


어제 사건의 영향일까? 그녀의 대화 방식이 한층 부드러워진 것 같았다. 로사는 더 이상 날 윽박지르지 않았다. 대신에 자기의 이야기를 상냥하게 들려주었다. 물론, 자기의 이야기’만’ 들려주었다. 그것은 여전했다.


그녀가 자주 쓰는 영어 표현 베스트 쓰리.

1.     디스 모먼트(This moment): 무슨 뜻으로 활용하려는 건지 전혀 감이 안 잡힌다. 그냥 어떤 맥락에서든 목적어가 와야 할 자리에 이 표현을 갖다 붙인다. 말하자면 전라도 사투리의 ‘거시기’ 같은 느낌이랄까?

2.     니어(Near): 이 표현을 정말 많이 쓴다. 대표적인 용례는 “Near for me.” “내 곁에”라는 뜻으로서 쓰는 것 같다.

3.     슬로우리 슬로우리(Slowly slowly): 그냥 아무 때나 다 쓴다. ‘조용히’라는 뜻으로도 쓰고, ‘작게’라는 뜻으로도 쓰고, ‘차분히’라는 뜻으로도 쓴다. 큰 개념에 대비되는 작은 개념의 부사 어구가 필요한 어떤 자리에든 이 표현을 집어넣는다. 활용도가 어마어마하다.


오늘은 로사가 꽤 괜찮은 옆방 여자라는 생각까지 했다. 여전히 말이 너무 많고 나를 과도하게 통제하려는 경향은 있지만, 이렇게 맛있는 식량을 제공해주는 건 고마울 일 아닌가. 또 어떻게 보면 나는 로사 덕분에 치안 걱정을 덜고 지내는 셈이기도 하다. 로사가 버티고 있는 한 이 공간에 함부로 침입할 강심장은 없을 것이기에 산간벽촌에서의 길고 어두운 밤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차라리 로사가 더 무서우면 무서웠지.


뚝딱. 볶음 요리 한 냄비를 다 비워냈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로사의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온풍기까지 들여놓은 로사의 방 안에는 내 방과 다르게 훈기가 돌았다. 배부르고 따뜻하고 졸리고. 이대로 스르르 잠이 들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로사는 그새를 못 참고 통화에 돌입했다. 스님 친구와의 통화란다. 나는 경험적으로 알았다. 저 통화가 금방 끝나지 않으리란 것을. 무거워 감겨오는 눈꺼풀의 사이로 로사의 환한 미소가 아스라이 보였다. 뭐가 그렇게 기쁜 걸까. 그녀가 울부짖는 몽골어를 알아들을 수 없으니 나는 대화 내용 대신 그녀의 감정만 짐작할 뿐이었다.


여행은 참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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