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n Aug 01. 2023

남다른 서울 여행기

"적어도 한국의 정치 상황은 네 삶을 송두리째 뒤엎진 않았잖아."


데비가 말했다.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나라가 내 삶을 뒤엎은 적이 있던가. 그런 기억은 없었다. 상상해 본 일도 없었다. 얼떨떨해하는 내겐 아랑곳없이 데비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왼쪽엔 청계천, 오른쪽엔 마천루들을 끼고 함께 걷던 차가운 겨울밤이었다.


데비와 나 사이를 설명하자면 나라 한두 개로는 어림없다. 어림짐작해 보는 데만도 손가락 다섯 개는 써야 할 성싶다. 먼저, 데비는 '홍콩' 사람이다. 나는 '한국' 사람이다. 우리는 '콜롬비아'에서 처음 만났다. 여행 중 우연히 같은 호스텔에 묵었던 게 인연이 됐다. 여행을 마치고 데비는 홍콩 대신 '호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여행보다 모험적인 삶을 시작해 볼 거라고 했다. 마침 호주엔 내 오랜 친구 경민이 있었다. 경민은 내가 '인도'를 여행하다 만난 친구였다. 내 소개로 데비와 경민은 호주에서 친구가 됐다. 그 두 사람이 친구가 된 것만이, 우리들의 만남 중에 우연이 개입하지 않은 유일한 만남이었다.


살면서 한 번은 데비를 다시 만나리란 강한 예감이 있었다. 강한 예감의 기원은 강한 바람 또는 강한 거부감이라면, 데비의 경우는 전자였다. 나는 데비와 재회하길 바랐다. 콜롬비아에서 함께 여행했던 기억이 좋아서였다. 일단은 데비의 국적부터 맘에 들었다. 홍콩인 데비는 내게 적절한 동질감과 이질감을 한데 선사한 최적의 동행이었다. 연약해 보이는 겉모습과 다르게 거침없고 뚝심 있는 그녀의 성격도 맘에 들었다. 데비의 용감한 주도가 아니었다면 그해 여름, 인적은 드물고 밀림만 울창한 어느 외딴섬에서 몇 날 밤을 보낸 황홀한 경험 같은 건 내 여행에 없었을 거였다.


세월을 따라 여행의 기억이 희미해져 가도 재회에 대한 바람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도리어 강해졌다. SNS를 통해 데비의 일상을 지켜보면서였다. 데비는 호주에서의 삶에 안착한 것 같았다. 경민뿐 아니라 많은 친구들을 사귀고, 좋은 직장에서 보통의 사회생활을 꾸려나가는 것 같았다. 완전히 낯선 땅에서 새롭게 일구어진 그녀의 삶, 그녀의 일상을 나는 이따금 상상하고 궁금해했다. 영어가 공용어인 홍콩에서 자란 덕에 전 세계 어디에서였더라도 쉬이 안착했을 그녀의 조건을 부러워했다. 데비를 향한 나의 그리움은 점차 동경이 되어갔다. 나는 더욱 강하게, 우리의 재회를 예감했다.


예감이 현실이 된 건 올초의 일이었다. 데비가 한국에 왔다. 일주일이 채 안 되는 출장 여행이었다. 


데비가 묵는 명동의 한 호텔 로비에서 우리는 재회했다.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직모. 늘씬하고 꼿꼿한 몸가짐. 명동의 밤을 밝힐 듯한 환한 미소. 5년 5개월이라는 시간의 공백이 무색하도록 변한 게 없는 그녀가 내 나라에 와 있었다. 꿈같았다. 우리는 얼싸안고 반가워했다. 소상한 안부들을 선물처럼 풀어놨다. 그래. 예전에도 우리는 이런 코드의 유머에 함께 웃었지. 이 정도의 현실적인 이야기들과 이 정도의 초월적인 이야기들을 나누었지. 5년 5개월 전에 떠올렸던 생각을 나는 다시 떠올렸다. 데비와 내가 닮은 구석이 많다는 생각. 통하는 구석은 더욱 많다는 생각.


데비는 호주에서 벌써 두 번의 이직을 했다고 했다. 그녀가 거쳐 간 세 개의 회사 모두가 이름난 다국적 기업들이었다.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들도 주변에 많다고 했다. 가까이에 사는 동양인들, 건너 건너 알게 된 유럽인들, 나이가 많은 사람들, 적은 사람들, 이성애자들, 동성애자들.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서로의 기념일과 무사한 일상을 축복하며 어우러져 지낸다고 했다. 고국에서도 넘기 어려운 취업의 벽을 타지에서 세 번이나 넘다니. 혈혈단신으로 건너간 이역만리에서 가족 같은 친구들을 사귀다니. 그녀의 경이로운 이야기에 내 마음이 달떠왔다. 마음만은 벌써 나도 호주에 가 있는 듯했다. 5년 5개월 간 내가 기다려온 건 데비뿐 아니라 데비의 이야기들이었음이 분명해 보였다.


데비도 내 이야기를 경청했다. 그녀의 이민사만큼 스펙터클 할 리야 없지만 돌이켜 보면 내 삶에도 소소한 굴곡들이 있어왔다. 예를 들면 데비가 호주로 건너갈 즘 나는 스페인으로 건너갔던 것. 거기서 10개월 남짓을 무탈히 살아내곤, 스페인 땅에서라면 내가 꽤 장기간 정착을 도모해 볼 수도 있겠다고 확신했던 것. 하지만 배움의 시기를 놓칠 순 없다고 판단해 일단은 한국으로 돌아와 레지던트 수련 생활을 시작했던 것. 수련을 다 마쳤을 땐, 안정적인 벌이의 시기를 놓쳐선 안 된다고 판단해 일단은 한국에 남기로 했던 것. 그렇게 쳇바퀴 같은 일상에 스며들었던 것.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법을 잊었던 것. 그러다 오늘, 데비를 다시 만난 것.


데비는 한국의 정치 상황도 궁금해했다. 때는 2023년 1월. 정권이 교체된 지는 1년이 채 안 됐고, 좌우 갈등, 세대 갈등, 성별 갈등으로 세상이 어수선했다. 이태원에서 귀한 생명들을 잃은 사고, 북한이 북방한계선 이남으로 미사일을 발사한 사건 정도가 외국인들이 기억하던 한국발 최신 뉴스였다. 어쩐지 굳은 땅 위에 발 딛고 선 대신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는 느낌. 초현실적인 사건이 불현듯 현실을 덮쳐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은 느낌. 그런 을씨년스러운 느낌들이 나를 휘감고 있음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던 그때. 데비가 말문을 연 것이었다.


"그것들은 적어도 네 삶을 송두리째 뒤엎진 않았잖아."


데비가 암시한 건 홍콩 민주화 운동이었다. 그제야 내가 아직 학생이던 2014년 여름, TV에서 스치듯 봤던 홍콩 시위 장면들이 생각났다. 최루액을 살포하던 홍콩 경찰들. 그에 맞서 우산을 들고 항거하던 홍콩 시민들. 세상은 그해 홍콩의 시위를 우산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데비는 혁명을 기점으로 홍콩 젊은 세대의 해외 이주가 급증했다고 말했다. 그건 중국의 "brainwash(세뇌)"에 잠식당하지 않기 위한 최후의 몸부림이었다고. 자신의 자녀 세대만큼은 민주화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게 하고 싶은 열망의 결과였다고. 나는 새삼 떠올렸다. 데비의 이민 생활을 마냥 장밋빛으로만 바라봤던 내 시각이 얼마나 평면적이었는지를. 데비는 자신의 이민이 희망과 절망을 모두 품은 선택이었노라고 회상했다. 나는 비로소 친구의 정착기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된 기분이었다.


곧이어 경민이 등장했다. 오래간만에 재회한 경민과 데비가 부둥켜안고 인사했다. 나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이렇게 셋이 모이는 건 처음이었다. 경민이 몇 해 전 호주 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던 덕에 가능한 만남이었다. 확실한 건 경민이 나보다도 더 데비를 부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무변광대한 호주 자연이 주는 무궁무진한 희열을 몸소 누려본 그였다. 비행기로 열 시간 거리에 남겨두고 온 마음의 고향이 못내 그리운지, 데비의 이야기를 듣는 경민의 눈동자가 방금 전까지의 내 눈동자보다 반짝였다.


갓 귀국했을 때만 해도 경민은 금세 호주로 돌아갈 기세였다. 하지만 그가 고국에 정착한 지도 수년 째. 이제는 번듯한 사업체의 운영자가 돼서 그 기반을 다지는 데 여념이 없었다. 경민과 나는 이십 대 중반에 인도에서 만나, 국경이라는 한계에 갇히지 않은 삶을 함께 꿈꿔온 사이였다. 본성을 거스르지 않는 삶을 좇자고, 높이 날아 멀리 보는 삶을 살자고, 그렇게 낯간지러운 이야기를 낯간지러운 줄도 모르고 떠들던 사이였다. 그랬던 우리가 이제는 서로의 어깨에 걸쳐진 생산 활동의 무게에 더 깊이 공감하는 삼십 대 중반이 됐다. 그리고 오늘, 데비를 눈앞에 두고 같은 생각에 잠겼다. 손에 쥔 것이 많아질수록 자유의 끈을 붙잡을 악력은 약해지는 걸까.


어렸을 땐 내 삶이 마냥 특별하기를 바랐다. 유명해져서 TV에도 나오고,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삶을 살게 되기를 기대했다. 평범하다는 건 성공적인 것과 대치되는 개념이라고 상상했다. 하기야 온갖 종류의 신데렐라 스토리가 매스컴을 장악하던 시절이긴 했다.


당연하게도, 나이를 먹으면서 그 생각은 옅어져 갔다. 평탄함의 가치를 옹호하던 어른들의 말씀을 이해하게 됐다. TV에 얼굴을 내비치긴 죽기보다 싫어졌다. 아무도 날 우러러보지 않아도, 누구도 날 알아보지 않을 익명성의 자유를 평생토록 누리며, 그렇게 무사한 하루하루를 쌓아가고 싶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삶에 대한 희망의 불씨는 아직 남아있다. 특별한 삶에 대한 정의가 어렸을 때와는 달라졌을 뿐이다. 유명한 삶, 존경받는 삶, 영향력을 널리 떨치는 삶은 아무래도 피곤할 것 같다. 다만 나는 내 삶이 여전히, 남다르기를 원한다. 남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수동적으로 수용한 삶 말고,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방식을 스스로 체득한 삶이기를 소망한다.


먼 훗날 삶과 작별하는 시점이 왔을 때, 난 무엇을 가장 후회하게 될까? 수도권의 웅장한 저택 한 채를 내 명의로 소유해보지 못한 것? 아니면, 나와 잘 맞고 또 내가 잘 살아낼 수 있었을 남다른 삶의 형식에 도전해보지 못한 것?


데비와 함께 한 며칠이 꿈처럼 지나갔다. 우리는 콜롬비아에 이어 서울에서 또 한 편의 여행기를 써내려 간 듯했다. 그것도 깊이 있는 질문들을 품어 수작으로 회자될, 아주 끝내주는 여행기를. 짧은 출장 여행을 마치고 데비는 호주로 돌아갔다. 그녀가 내게 던진 질문들만 여행기와 함께 이곳에 남았다. 머릿속을 끊임없이 어지럽히는 질문들이 성가시지 않았다. 설사 명쾌한 답을 끝내 얻어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질문 그 자체가 이미 내 삶을 남다른 방향으로 안내할 것임을 나는 예감했다. 오래간만에 품어보는 강한 예감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커피 맛이 나는 노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