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데이수 Oct 25. 2020

미술관의 문법을 깨자, 자유의 냄새가 났다.

'돌다리 미술관'이 선물해 준 새로운 경험을 소개합니다.

얼마 전 니혼바시로 외근을 갔다가 'Artizon Museum'을 발견했다. 어머나, 이런 데 미술관이 다 있네요. 언제 한 번 와 봐야겠다고 호들갑을 떠니까 옆에 있던 일본인 부장님이 친절하게 해설해주신다. "타이어회사 브릿지스톤의 창업주가 수집한 작품들을 모아 만든 미술관이에요. 원래는 '브릿지스톤 미술관'이었는데, 이름을 바꿔서 올해 리뉴얼 개장 했어요." 거기에 한 마디 더.


"브릿지스톤이 왜 브릿지스톤인지 알아요? 창업주 이름이 이시바시(石橋)거든요. 이시는 돌이고, 바시는 다리잖아요. '스톤브릿지'는 너무 돌다리 같으니까 순서를 바꿔서 '브릿지스톤'이라고 이름을 지은거에요."



이런 감성 좋아하는 선데이수. 사실 집에서 조금 멀어서 올까말까 고민이 좀 됐는데, '돌다리 미술관'에 간다고 생각하니 너무 신이 나서 힘든 줄도 모르고 한 달음에 달려왔다. 그런데 이 '돌다리 미술관'이 내게 재미있는 경험까지 가져다주었다. 오늘은 돌다리... 아니 아티존 미술관이 일본의 아티스트들과 콜라보하여 함께 만들어 나가는 '잼 세션'의 첫 전시 'Flip'을 소개하려고 한다. 주인공은 코노이케 토모코 상이다.





전시장에 들어가면 으레 카드를 찾는다. 작품의 제목이나 작법, 작품이 만들어 진 시기 등을 적어놓은 카드 말이다. 그냥 봐서는 뭔지 잘 모르겠는 작품이라도, 제목을 보면 무슨 말을 하고싶은지에 대해 상상할 수 있게 되는 경우가 있다. 달리 생각하면 스스로 생각할 기회를 걷어차 버리는 거기도 하지만... 어쨌든 어둠 속에서 손전등을 찾는 사람처럼, 무의식적으로 카드를 찾는 나 자신을 어찌 할 수가 없다.


'Flip' 전에는 그런 카드가 일체 없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돌아보라는 의미의 동선도 없었다. 심지어는 '이 이상 가까이 가지 마세요'라는 의미로 바닥에 붙여놓게 마련인 스티커조차 없었다. 사람이 참 신기하다. 미술관에서 늘 이런저런 금지를 당해 온 역사가 있어서인지 어떠한 금지도 없다는 사실에 적응을 못 했다. 전시장에 들어서서도 한동안 눈치보며 사진도 못 찍고, 작품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보다가, 주변 사람들이 그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행동하는 걸 보고 아주 서서히 분위기에 적응이 됐다.


부적응에서 적응으로, 내 생각을 바꿔준 계기가 또 있다. 전시장에 웬 미끄럼틀이 있었다.



안 그래도 어디선가 미세한 꺄르륵 소리가 나더니. 미끄럼틀 때문이었나보다. 전시장의 공간을 섬세하게 나눠주는 나선형의 경사길을 삐걱삐걱 올라, 정상에서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올 수 있다. 낮은 곳에서 보는 시선과 높은 곳에서 보는 시선이 전혀 달라져서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한편으로, 높은 곳에서 보니 전시장의 곳곳을 신기한 듯 들여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도 전시의 일부처럼 보였다.


몇몇 어린이들이 엄마 아빠 따라 전시 보러 왔다가 미끄럼틀이라는 로또(?)를 맞고 꺄르륵 꺄르륵 미끄럼틀을 타고 놀았다.


전시장에 머물던 1시간 남짓의 시간이 소소한 발견의 연속이었다. 나선형 경사길은 미끄럼틀을 만들어주기도 하지만, 전시장의 공간을 여러 결로 나눠 주어 각각의 공간을 기웃기웃 하면서 탐험할 수 있는 요소가 됐다. 가령 경사길에 가려 조명이 잘 안 들어오는 공간을 활용해 이런 오브제를 가져다두기도 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기도, 꿈꾸는 것 같은 기분도 들었다.



경사길 바로 아래는 그냥 보기 싫은 철근만 놓아두고 말 수도 있는데, 이 작은 공간도 야무지게 활용했다. 위에 경사길이 있으니까 좀 어둡고, 윗 공간은 활용할 수 없다는 특징이 있으니까, 아예 바닥에 오브제를 놔두었다. 적절한 조명을 비춰 줘 전시장 곳곳으로 빛이 프리즘처럼 퍼진 모습이 보석 같기도 하고 참 예뻤다.



한편 좁은 통로에 동물의 박제 가죽을 잔뜩 널어놓은 곳도 있었다. 아티스트가 홋카이도의 사냥꾼들에게 부탁해서 공수해 온 진짜 박제라고 한다. 이런 걸 건드려도 되나 싶어서 둘러 갈 방법이 있나 찾아보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여기서는 그냥 아티스트가 의도한 대로 동물 가죽과 부딪혀 가며 사이사이로 나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가죽 하나하나가 홋카이도의 산악지대에서 살아 숨쉬던 동물들이라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치기도 하고, 그랬다.





생각해보니 예전에도 비슷한 경험을 하고 신났던 기억이 있다. 미술관의 문법을 깨는 데서 오는 자유로움의 경험. 고베에 있는 효고현립미술관에 갔을 때 일이다. 하타 유타카(Yutaka Hatta)라는 작가의 작품이었는데, 전시장에 들어서자 눈 말고 손으로 즐기라는 설명을 해 주는 것이다. 네? 손으로요?


진짜 제 맨손으로 그림을 만지라고요?


그때만 해도 코로나가 터지기 이전이라, 생소한 물건인 손소독제로 손을 소독하도록 안내하면서, 손 소독 한 이후에는 마음껏 만져도 좋단다. 그 설명을 듣고 실제로 그림에 손을 가져다 대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무의식적인 저항감 때문이다. 그림에 손을 대다니. 그림은 휘황찬란한 액자에 고이 전시되어 멀찍이 떨어져 조심조심 봐야 하는 것이거늘.



막상 손을 뻗고 나니 문제는 간단해졌다. 눈을 감고 캔버스 위 물감이 지나간 흔적을 손으로 따라갔다. 눈으로 보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다.


캔버스를 손으로 따라가다가 잠깐 눈을 떠 시각적 경험을 추가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시각을 잠깐 끄면 촉각이 더 예민해지는데, 촉각에 집중하다가 다시 시각을 되살리는 순간 조금 더 강렬한 경험에 해당하는 시각이 촉각을 압도 해 내 눈에 보이는 것이 곧 내 경험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한편 미술관이라는 고고한 공간의 문법을 깬다는 데서 오는 자유로움도 분명 있었다. 미술관이 아니라, 내가 아는 누군가의 작업실에서 "뭐야, 이런 작품이 있어?"라고 감상했다면 이만큼 즐겁지는 않았을텐데, 조용한 미술관에서 무려 미술작품에 손을 가져다 댄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충격을 줬다.


내가 한참 그림 앞에 서서 신비로운 경험을 즐기고 있는데, 직원이 와서 "하타 선생님은 50세 때 시력을 잃으셨어요."라는 정보를 전해주고 간다. 아, 그랬구나. 그가 "왜" 이런 작품을 만들게 되었을까에 대한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시력을 사용할 수 없었던 것과, 삶의 어느 시점엔가부터 시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경험일 것이다. 더군다나 아티스트로서 스스로 시각예술 작품을 만들어 온 사람이라면 '보이는 경험'에 누구보다 민감했을 것인데...


과거에는 나의 '시각'적 체험을 예술이라는 형태로 타인에게 전하고자 했다가,

시력을 잃고 나서는 나의 '촉각'적 경험을 예술이라는 형태로 타인에게 전하고자 한 것일까.





사실 지금 이 순간 아티존 미술관의 메인 전시를 꼽으라면, 내가 소개한 'Flip' 말고 비엔나 비엔날레의 일본관에서 소개된 작품을 재현한 'Cosmo Eggs'가 될 것이다. 실제로 'Cosmo Eggs' 전시를 보러 갔다가 'Flip'은 얻어걸린 게 맞다. 그런데 효고현립미술관에서 만난 "손으로 만지는 그림" 경험처럼, 아티존미술관에서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 기대하지 않았던 장소에서 인상깊은 경험을 하고 왔다. 그런 게 바로 인생일까.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일본의 현대미술이 3월 11일을 기억하는 방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