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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정Jay Jun 13. 2020

엄마가 되고 나서 진짜 공부를 만나다

20대와는 다른, 30대 엄마의 영어공부 이야기

너 예전에는 영어 공부하는 거 싫어하지 않았어?
그런데 지금은 애 키우느라 바쁜데도 영어공부가 재밌어?

 

 얼마 전 만난 친구가 내게 물었다. 우리는 약 10년 전에 취업 면접 스터디 모임에서 알게 된 사이다. 그때 당시 내 영어 실력은 형편없었고, 나는 영어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친구는 그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그래서인지 영어를 꾸준히 공부하고 즐기는 현재의 내 모습이 그저 신기했던 모양이다.


영어 회화 필사노트





 10년 전. 20대 초반이었던 나는 외국 항공사 승무원이 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 하나로 영어공부에 악착같이 매달렸었다. 외국 항공사는 모든 면접이 영어로만 진행되었기에 중고급 영어 수준의 실력은 갖추어야만 했다. 눈만 뜨면 영어공부, 깨어 있을 때도 영어공부, 잠자기 전에는 어떻게 해야 영어를 더 잘할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게다가 틈만 나면 이전에 공부했던 내용을 떠올려보거나 외운 문장들을 읊어보곤 했다. 누가 보면 내가 영어에 미쳤다 싶을 정도로 공부를 했다.



 하지만 그 순간들이 즐겁지는 않았다. 영어가 나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다. 공부하면 할수록 내가 제대로 하는 건지 불안했다. 정체기가 오면 나아지지 않는 내 영어 실력에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영어는 내 가슴을 꽉 누르고 있는 커다란 돌덩이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는 정 반대다. 한때 영어가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내가 오히려 영어 덕분에 삶의 활력을 찾게 되었다. 과연 어떻게 된 일일까? 도대체 무엇이 나를 예전의 나로부터 변화시킨 걸까?



 아프리카의 킬리만자로, 파키스탄의 낭가파르바트, 네팔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오르면서 공통적으로 깨달은 것이 있다. 정상까지 오르려면 반드시 자기 속도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느리고 답답하게 보여도 정상으로 가는 유일한 방법이다. 체력 좋은 사람이 뛰어오는 것을 보고 같이 뛰면 꼭대기까지 절대로 갈 수 없다.  -한비야 인터뷰 중-

 한비야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녀가 말한 것처럼 나는 무리가 가지 않을 양과 범위를 정해서 공부한다. 상황에 따라 공부의 양을 더 늘리기도 하고 줄이기도 한다. 주부로 살다 보면 매번 내가 원하는 시간에 공부할 수만은 없다. 책을 펼쳤다가도 금방 덮어야 할 때가 많다. 그러다 보면 ‘하루 2시간 영어 원서 읽기’라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기도 한다. 그럼 속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괜찮아. 오늘 못하면 내일 시간 날 때 하면 되지.

 예전의 나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다. 계획대로 실행하지 못한 나 자신을 자책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지 않는다. 영어공부의 목적이 시험이나 취업을 위함도 아니요, 누구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함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나 자신을 위한 공부이기에. 내가 즐겁게 공부하면 되는 거다. 속도가 느리면 느린 데로 묵묵히 가기만 하면 된다.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좋아하게 되면 ‘이제 행복해져도 돼’라고 말할 시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면 어느 때건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스템은 우리가 처음 상상했던 한 가지 결과가 아니라 다양한 형태로 성공할 수 있게 해 준다.


 <아주 작은 습관의 힘>에서 저자는 결과보다 과정에 집중하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목표가 행복을 제한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이다. 결과가 성공적인 사람과 실패인 사람의 목표도 처음엔 같다고 한다. 목표가 같지만 각기 다른 결과를 맞이한 건 바로 과정의 차이인 것이다.



영어학습에 도움되는 영어원서. 옥스포드 북웜 시리즈


  엄마가 되고 나서 처음 6개월은 그야말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니, 차릴 틈조차 없었다. 세상 모든 엄마가 그렇듯 하루아침에 모든 게 낯설었고 서툴렀다. 심지어 아이를 안는 것조차, 기저귀 가는 것조차, 트림시키는 것조차 어려웠다.

 그렇게 시간이 점차 흐르고 엄마로 사는 삶에도 적응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6개월쯤 되었을 무렵부터였다. 어느 날 갑자기 차가운 바람이 내 마음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우울증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아마도 육아 우울증 혹은 산후 우울증이라 생각함) 마음이 착 가라앉기 시작했고 아이와 있으면서도 수시로 눈물이 흘렀다. 아이와 함께 있는 그 순간에 내 주변을 떠도는 집안의 공기가 싫었다. 사랑스러운 아이를 안고 있으면서도 매일매일 공허함은 커져만 갔다.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당장 붙잡은 것은 영어책이었다. 처음엔 그냥 영어공부를 하기보다는 공인 어학시험을 봐서 눈에 보이는 결과를 만들고 싶었다. 나도 뭔가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가장 먼저 OPIc 시험에 도전했다. 내 목표는 제일 높은 등급인 AL을 받는 것이었다. 온라인 강의와 시중에 파는 교재를 활용하여 틈틈이 공부했다. 몇 개월이 지난 후 나는 목표를 이루게 되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AL 등급을 받았지만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었다. 목표만 이루면 행복할 줄 알았고, 자신감이 더 넘칠 줄 알았다. 행복은커녕 오히려 더 공허했고 다음에 할 일이 무엇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영어공부를 하기 전이나 후나 내 마음의 상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목표를 세우지 않기로 했다. 아니, 목표의 방향을 조금 바꿨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재밌게 꾸준히 공부하기’가 내 목표였다. 그러니까, 어떤 점수나 결과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온전히 영어를 공부하는 과정에만 집중해보기로 한 것이다. 공부하는 방식도 내가 결정하고 공부할 책도 내가 정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절대로 무리하지 않기였다. 안 그래도 새벽에 수시로 깨는 아이 때문에 (28개월인 현재도 마찬가지다) 만성 수면 부족인데, 공부한답시고 잠을 줄여서 더 괴로워하고 싶지 않았다. 잠은 최소 7시간은 자기로 했다. 그 대신 깨어 있는 시간을 최대한 쪼개어 영어공부를 했다. 핸드폰 만지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그 시간에 영어 원서 한 페이지라도 더 보려고 했다. 아이가 낮잠 자는 시간 중 일부를 활용해 원서를 읽었다. 처음에는 10분, 30분씩 공부하다가 지금은 틈새 시간이 모이고 모여 하루에 2시간은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아이와 함께 서점에 가서 책보며 놀기




 누가 나를 평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니 영어공부가 즐겁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어 원서 읽고 필사하고 낭독하는 이 모든 과정을 즐기는 내 모습이 좋다. 공허함을 달래려 시작한 영어공부가 어느 순간 내 일상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아무런 목표도 없이 달려온 공부가 오히려 더 나은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10대, 20대의 내가 했던 공부와는 온도 자체가 다르지만 그래도 나는 엄마가 되고 나서야 하는 공부가 진정한 공부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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