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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인석 Nov 08. 2023

노력하지 않는 자와 노력하지 않는 자의 우스운 대결

TEXTIST PROJECT

1.

 한 사기꾼과 전 국가대표 스포츠 스타의 기괴한 스캔들로 시끄럽다. 이 스캔들은 단지 규모 때문이 아니라 스캔들의 콘텐츠가 워낙 풍성한 탓에 며칠 동안이나 검색어 순위권에서 내려올 생각이 없다. 껍질을 깔수록 더 많은, 그야말로 '엽기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쏟아지니 시선을 떼려야 뗄 수 없다.


 자신이 숨겨진 재벌 3세라고 주장하는 대담한 이 사기꾼은 가해자이고, 스포츠 스타는 피해자로 보이지만 여러 정황들을 봤을 때, 그리고 대중들이나 범죄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아봤을 때, 피해자가 평면적인 피해자로 보이긴 어려운 상황이다. 공범 수준이 아닌가 의심의 눈길을 보내는 이들이 오히려 많다. 이런 점들은 하고 싶은 이야기와는 조금 방향이 다른 부분이니 앞으로의 보도를 통해 확인하는 게 가장 정확하겠다.


2.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다. 

 이 스포츠 스타를 홀려내기 전에도, 대담한 저 사기꾼은 꽤 오랫동안 사기 행각을 벌여왔고 감옥에서의 식사도 맛있게 잡숴온 분이다. 이분이 제시한 데이터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현실에서 벗어나 있고 상식 밖의 이야기라는 점에 주목한다.


 그(인지 그녀인지)가 주장한 자신의 경력과 재산에 대한 데이터가 대부분 허무맹랑하지만, 그중 '이 사람은 그냥 허풍쟁이구나'라는 걸 매우 쉽게 알아챌 수 있는 부분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 번째는 51조, 두 번째는 글로벌 IT기업의 임원이라는 점, 세 번째는 영어실력이다. 


3.

 이 사기꾼은 노력이 너무 부족했다. 만약 '5천 억'이나, 많이 양보해서 '1조 내외'의 재산이라고 했다면 아주 낮은 확률로라도 "아, 진짜?"라는 말을 꺼낼 법도 하다. 51조라니. 그런데 이렇게 아무도 모르는 부자라는 게 말이 되는가. 이재용 회장의 재산이 10조 규모라는 사실을 어떤 포털 사이트에 쳐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고, 굳이 포브스 사이트를 원어로 보지 않아도 '부자 순위' 같은 데이터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51조라니, 마치 놀이터에서 유치원생 꼬마들이 숫자 단위를 처음 배운 후 "나는 포켓몬 1조 마리 잡을 거다!"라고 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글로벌 IT기업의 임원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하다못해 구글 본사에 취직해서 꽤 괜찮은 커리어만 밟고 있어도 '유 퀴즈 온 더 블록' 같은 프로그램에서 섭외가 온다. 이 사기꾼이 임원 명함을 달고 있다고 주장한 엔비디아는, 한국에도 지사를 두고 있으니, 만약 내가 이 사람에게 투자하려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교차검증이 가능한 영역에 내에 있다.


 영어 실력은 더 얘기할 필요조차 없다. 사기꾼이 메시지로 남긴 내용을 보면 비참할 정도다. 


 이 사기꾼은 사기를 치면서 이런 내용의 현실성을 강화하거나 구체성을 높이기 위한 하등의 노력도 하지 않고 그야말로 막 던진 것이다. 누군가 의문을 제기하면 거짓말에 눈덩이를 굴리듯 '아무 말 대잔치'를 갖다 붙였을 뿐이다. 이미 이 사기꾼과 접촉했던 여러 투자자들은 터무니없음에 고개를 저으며 거리를 두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사기꾼에게 속아 넘어간 사람들도 분명 있다. 피해자는 피해자일 따름이므로 위로받고 응원받아야 하겠지만, 귀책사유가 0퍼센트냐고 하면 '글쎄'다. 피도 섞이지 않는 이에게 동정으로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면 단돈 얼마를 투자하더라도 확인할 것은 확인해야 하는 게 아닌가. 

 당장 6~7만 원대의 삼성전자 주식 한 주를 사더라도, 악재와 호재 기사 정도는 보고 사지 않는가. '확인'이라는 말조차 민망할 수준의 정보에 대해 검색 한번 해보지 않고, "아이고, 51조를 가지신 분이면 내 돈도 불려주겠지"하고 덥석 미끼를 문단 말인가. 대체 왜!


 욕심 때문이다. 

 그런데 욕심은 나쁜 게 아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사람부터가 욕심 많은 사람이다. 

 문제는 욕심을 부릴 때 욕심의 출처와 방향에 대해 알아보려는 아주 아주 아주 간단한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투자자들은 쉽게 돈을 벌고 싶었을 것이다. 쉽게 돈을 벌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딨나. 누구나 쉽게 돈을 벌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 쉬워 보이는 투자에 누군가는 발을 들였고, 누군가는 피했다. 그 차이는 무엇인가. 


 '앎'의 차이일 뿐이다. 

 51조가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고, 글로벌 IT 기업의 임원이라는 사실이 한 꺼풀만 벗겨도 속이 빈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으며, 영어 실력이 콩트처럼 우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어휴, 저런 사기꾼은 밥은 벌어먹고사나 몰라.'하고 피할 수 있었다. 


 미끼를 문 자들은 왜 몰랐나. 그냥 간단한 검색만 해봤어도 알 수 있는 사실들을. '간단한 인터넷 검색조차 안 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5. 

 허술하기 짝이 없는 데이터를 구축해 놓은 사기꾼도, 이 데이터를 확인조차 해보지 않고 넘어간 피해자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얼마나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있나'를 대결한 것처럼 처참하다. 글쎄, 혹자는 '도둑놈만 욕하면 되지, 피해자는 왜 욕하나'라고 말할지 모른다. 

 동의한다. 

 그러나 도둑이 출몰하는 지역에 살면서, 항상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사는 사람에게 "문은 좀 잠그고 살아라" 정도의 말은 할 수 있지 않나. 


6.

 속이는 사람도, 속는 사람도, 그다지 노력하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의 결말이다. 

 진짜 훌륭한 사기꾼이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다는 불문의 규칙이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결국 이 사기꾼이 전 국민에게 자신의 얼굴을 알려버리게 된 사실조차, 자신의 비전을 구축해 놓지 않은, 노력 부족에 기인했음은 여러 시사점을 준다. 


 은행 적금을 넣을 때조차 예금자 보호가 되는지, 우대이율을 받으려면 어떤 조건이 걸려 있는지를 확인한다. 그렇게 해도 이자는 많아야 몇 만 원 차이다. 왜 수 천, 억 단위를 투자하면서 무작정 믿는가. 


 아무도 믿지 말라는 뻔한 이야기가 아니다. 저따위 허접한 사기꾼에게는 속아 넘어가도 스스로에게 부끄러움이 어느 정도 부과될 수밖에 없는 세상이라는 점을 모두가 잘 알길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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