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는 것도 쉽지 않던 시절, 유교적 질서와 남존여비의 풍토가 지배하던 시절, 여성으로서 존엄을 유지하며 사는 건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글쓰기를 사랑하고 그것에 몰입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누군가에겐 비웃음을 살 일이고, 누군가에겐 생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헛수고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렇지만 작희와 그의 어머니 중숙은 그 길을 간다. 치열하게 글을 쓰고, 이야기 짓는 일을 사랑하고, 다른 어떤 일보다 자신을 자신답게 만드는 일로 여긴다.
그 시절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글쓰기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은, 그런 순간을 경험한 적 있을 것이다. 이 일이 내가 살아가는데 장식 같은 일에 불과한 건 아닐까. 내 상황에서 이 일에 매달리는 건 사치가 아닐까, 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지 못하고, 생각하면 애틋한 마음이 드는 그런 게 바로 글쓰기가 아니었던가. 때는 일제강점기. 상황도, 시대도 다른 중숙과 작희에게서 오늘도 몸부림치며 글을 쓰는 나와, 우리의 모습이 보이는 게 놀랍다.
작희는 유령처럼 나타나는 여자에게 묻는다. "당신도 쓰는 여자입니까?"라고. 마치 인종, 계층, 고향을 묻듯이. 이것들은 정체성을 형성하는 요소들이다. 작희에게 '쓰는 여자'는 자신의 정체성 그 자체다. 누군가에겐, 고향이나 인종, 국적보다, 쓴다는 게 가장 큰 정체성이 되기도 한다.
* 책엔 여성들의 따뜻한 연대 이야기가 펼쳐진다. 홀로 서고 싶었으나 집안의 결정으로 시집을 가게 된 중숙은 평생 펼치지 못한 꿈을 품고 살아간다. 그런 상황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여자아이 점예는 중숙을 마음으로 따른다. 중숙도 피붙이처럼 점예를 아낀다. 중숙은 점예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후원하기도 한다. 중숙이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서로를 이해하고 보살피는 둘의 교류는 계속된다.
중숙이 작희를 낳고, 중숙-점예의 연대는 작희까지 확장된다. 중숙의 얄미운 시누이였던 경혜가 마약과 도박에 빠진 남편에게 학대를 받으면서, 연대한 세 여성은 경혜의 남편을 찾아가 투쟁한다. 결국 경혜까지 그 여성들의 연대에 속한다. 후에는 작희 아버지의 첩인 미설까지도 마음으로 연대한다. 그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구속받고 압제당한다. 조금씩 다른 억압을 경험하고 있지만, 그들은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한다.
현재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은섬은, 시대를 뛰어넘어 작희 주변의 여성들과 연대한다. 은섬은 작희가 도둑맞은 작품을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 주려고 애쓴다.
작희 주변의 여성들이 서로 그러했듯, 깊은 연대는 서로에 대한 앎에서 나온다. 작가는 씨실과 날실을 엮듯, 시대를 초월한 여성들의 따뜻한 연대를 그려냈고, 그 여성들이 마주한 엄혹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읽는 내내 따뜻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단정하고 흡인력 있는 문장은 <쓰는 여자, 작희>의 읽기 체험을 더 풍성하게 한다. 오래도록 사랑받을 것 같은, 그랬으면 하면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