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타공인 요똥인 나도 나름 한가지는 자신 있게 할 줄 아는 음식이 있다. 바로 대한민국 최애 간식 중 하나인 ‘떡볶이’다. 떡볶이 장인이 될 수 있었던 건 4살 어린 남동생 덕분이었다.
전말은 이러했다. 무교인 우리 남매는 과자 한 봉지에 홀려 동네 교회에 가게 되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지루한 예배가 끝나면 매주 다른 종류의 과자 한 봉지와 제법 빳빳한 종이에 숫자가 적힌 달란트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엄마는 결코 사주는 법이 없던 과자를 먹으러 교회에 가다 보니 달란트가 쌓였고, 그쯤 달란트 시장이 열렸다. 각종 먹거리와 학용품, 장난감 등이 즐비한 그곳에서, 나는 아직 착하고 순수한(아무것도 모르는) 유치원생인 동생의 달란트까지 교묘하게 갈취해 알록달록 예쁜 학용품 사기에 올인했다. 떡볶이를 먹고 싶다는 동생에게는 ‘네 달란트 이미 내가 다 썼다’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해, 저런 거 먹으면 엄마한테 혼난다는 그럴듯한 뻥을 쳤다.
10년쯤 후, 우연히 TV에서 먹음직스러운 떡볶이가 나왔다. 동생은 지나가는 말로 “맛있겠다.”라고 중얼거렸는데, 순간 말 못 할 죄책감 같은 게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아직도 책상 서랍 구석에 처박혀 가장자리가 누렇게 변해버린 쓰지도 않을 수첩 쪼가리나 사느라 어린 동생이 먹고 싶은 것도 안 사주다니. 그것도 동생 달란트까지 빼앗고. 나는 나쁜 누나였어. 옆에 앉아 있는 동생 녀석을 측은히 바라보다 말했다. “야. 떡볶이 먹고 싶냐?”
계란프라이와 라면 밖에 끓일 줄 모르던 나는, 동생을 위해 떡볶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요리법 따위는 찾아볼 생각도 안 한 채, 떡볶이에 뭐가 들어갈까를 생각하며 대중없이 막 넣었다. 일단 떡이랑 어묵이 들어갈 테고, 고추장이랑 고춧가루가 들어가겠지. 설탕도 들어가고. 물을 넣고 재료를 몽땅 넣어 끓였다. 간을 보니 무언가 많이 빠진 것 같은데, 뭔지 알 수가 없어 물엿과 마법의 가루인 라면 스프를 털어 넣었다. 너무 끓였는지 떡이 탱탱하게 불었다. 이 정도면 됐겠지? 동생과 식탁에 마주 앉아 떡볶이를 입에 넣었다. 뭔가 빠진 맛이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거 같다고 되뇌며 동생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녀석은 군말 없이 흡입하고 있었다. 오, 괜찮은가 보네. 그 후로 동생이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바로바로 만들어 주었다. 그때마다 동생은 그릇을 싹싹 비웠다.
아, 나 떡볶이에 소질 있나 보다. 생후 20년 만에 쓸만한 소질을 찾아내었다.
얼마 전 가족 식사를 하는데, 소금을 통째로 들이부었는지 소태처럼 짠 반찬이 있었다. 한 입 먹고 이건 도저히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모두에게 알렸다. 다들 그렇네 하며 동조했지만, 동생은 “괜찮은데.”라며 아무렇지 않게 음식을 씹어 넘겼다. 이게 괜찮다고? 짠 기운이 사라지지 않는 혀를 희석하기 위해 맨밥을 꾸역꾸역 먹으며 제정신이냐는 듯이 쳐다보고 있는데, 엄마가 말했다. “쟤는 입맛이 진짜 둔하더라~”
그에 동생은 “나는 맛을 잘 모르겠어. 상하거나 그런 거 아니면 웬만하면 다 괜찮던데.”라며 또 한 번 소금 범벅을 집어 먹었다.
아, 내가 만든 떡볶이를 잘 먹던 이유가 그래서였어?
같이 살면 닮는다고, 동생은 미각이 둔하지만 나는 눈치가 둔하다. 미각이 둔한 자와 눈치 없는 자의 콜라보라니. 무려 10여 년간 맛없는 떡볶이를 불평 없이 먹어준 미각과 그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눈치 덕에, 녀석은 맛없는 떡볶이를 원 없이 먹을 수 있었고 나는 떡볶이 근자감 속에서 우연한 재능발견에 ‘역시 난 꽤 괜찮은 인간’이라며 행복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