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 끝없이 달려가 안아주는 것, 누군가 혹은 날.

누구나 저작권을 가질 수 있기에

by 수인

한밤의 끝없는 낭떠러지에서, 나는 한숨과 눈물 대신 곡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꿈꿔왔던 일이었다. 노래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 마음 한 구석 늘 욕심이 있었지만, 느끼는 바를 곡으로 표현해 내기란 쉽지 않았다. 형식으로도 그랬고, 마음먹기로도 그랬다. 거창했고, 쉬이 범접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내 생이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하니, 저절로 노래가 나왔다. 어떤 고통도 악(樂)으로 승화했던 우리 조상님들처럼.


내가 살고 있던 곳은 2차선 도롯가 바로 옆 다세대 건물. 주인집, 그리고 같은 층 이웃집 한 가구, 총 세 가구로 단란했지만, 마치 골목 같은 도로통에 시장 상인들이고, 자전거고, 주민들이고, 마을버스고 할 것 없이 오전 오후 내내 시끌벅적했다. 불법 주차된 차와, 어디든 달릴 수 있는 이륜차와, 손에 손잡고 걸어가는 학생들로 북적이는 거리. 혼자 살고 있었지만 언제나 창문 너머 벽 너머 그들의 소리가 들렸기에, 그래도 낮동안에는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밤은 그야말로 낭떠러지였다. 누군가 톡, 하고 내 등을 떠 밀면 나는 하염없이 떨어질 수 있었다. 그곳은 죽음일 수도, 암흑일 수도, 정체일 수도 있었다. 이십 대 중반의, 어디 하나 기댈 곳 없는 상경한 여대생. 며칠 전 그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참이었다. 나의 세계였던 그는 얕게나마 평온한 잠의 세계로도 나를 인도해 주는 고마운 존재였다. 그가 사라진 밤, 나에게 잠도 이별을 고했다. 술을 마시면 영원히 잠들게 될까 봐 차마 술, 이라는 단어조차 생각할 엄두가 나지 않았고, 그저 뜬 눈으로. 몇 날 며칠을. 두려움에 떨면서, 울면서, 쓰러졌다가, 넘어졌다가 했더랬다.


나는 잘못한 게 없었다. 적어도 그때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잘못이 있다면, 진심을 다한 것. 너무 진심을 다해서, 무거워진 것. 처음부터 감당하기 어려울 거라고 몇 번이나 나를 설명했었다. 나란 여자가 얼마나 위태한지, 나에게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게 그의 손목을 발목을 어떻게 잡아 가두게 될지 몇 번이고 그를 설득했었다. 100일 가까이 밀어내고, 밀어내다 끝끝내 못 이긴 척 잡은 손이... 이제는. 저 밤의 너머에.


침대가 차가웠다. 앉지도 눕지도 못한 상태로, 멍하니. 무소음 시계에서도 소리가 들렸다. 몇 바퀴를, 돌고, 돌고, 돌아서... 들썩이고, 흐느끼고, 떨리고, 돌고, 돌아서... 이제는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나는 누구인지, 존재조차도 희미해져 갈 때 문득 멜로디가 들려왔다. 그것이 내 입가로부터 비롯된 건지 머릿통 속에서 울려 퍼진 건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놓쳐서는 안 됐다. 나는 살아야 했다.


침대 맡에 놓인 건반. 취미로 활동 중인 밴드에서 첫 공연을 위해 구매했다가 꽤 오랫동안 존재 자체로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 나를 포장만 해 줬던 물건. 건반을 쳐야 했다. 능숙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그 소리를 하나하나 담아냈다. 손발이 너무 시려서 건반에도 찬기가 고스란히 남았지만, 한 음 한 음 짚어가며 마음을 뱉어냈다. 잠들 수 없는 밤, 이제는 사라진 그의 온기를 그리며 좋았던 우리와 지금의 우리, 끝없는 밤과 헤매는 나를 담아낸 나의 첫 데뷔곡, '온기'였다.


*


따뜻한 네 온기에 눈을 감아요

살며시 등 뒤에 고갤 대고

눈 감고 네 뒤에 살짝 안으면

어느새 난 고이 잠이 들어요


따뜻한 네 향기 포근한 두 팔

아픈 내색 없이 팔베개하고

둘이서 함께 저무는 달 아래

꿈속으로 가요 나 행복해요


언제고 이렇게 함께라면

무엇도 두렵지 않을 텐데

혼자서 누워 그때를 떠올리면

문득 어둠이 날 덮쳐요


허전한 옆자리 네가 없는 곳

혼자서도 깊이 잠들 수 있어

조금 무서운 꿈에 힘들겠지만

익숙해지겠지 내일에는


*


예기치 못한 순간, 아니 예정되어 있던 순간 날 찾아온 곡. 내 언어, 내 목소리, 내 마음으로 빚어낸 멜로디. 밑그림부터 온전함을 갖추기까지 하나하나 펼쳐져 되려 나를 이끈 곡은 '온기'가 처음이었다. 나에게 치우쳐 있어 나를 구원해 준 곡. 부유하던 감정이 형태를 띠기 시작하면서, 끝을 모르던 실연의 밤은 조금씩 새로운 하루를 향해 밝아갔다. 나를 위로하며, 나는 밤의 바다에서 조금씩 떠올랐다. 가장 내밀한 마음을, 가장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에게 내밀었다. '온기'를 발표할 수 있게 힘을 나눠준, 기타리스트 박민석 씨였다. 민석 씨는 음악인에게는 다소 드문, 카이스트 수학과 박사 출신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래서일까, 막연히 그가 하는 음악은 그저 짙기만 해서 가벼울 내 음악을 더 계산적으로, 직관적으로 변모시켜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술적으로 뛰어난 음악이 아니었기에 더 그에게 평가받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진실되게, 있는 그대로, 전부 들어주었다. 허공에서 종이 위로 잡아 둔 멜로디를, 누구나 들을 수 있는 형태로 만들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해 주었다. 그리고 이름을 붙여 주었다. '나만 아는 내 노래'가 아니라, '한송이'가 부른 '온기'라는 곡으로 세상에 알려질 수 있도록, 유통사 배급 계약 진행을 도맡아줌과 더불어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정식 회원으로 등록해 준 것이다. 2016년 어느 깊고 깊은 밤 청파동의 한 작은 방에서 흘린 한 사람의 눈물이 저작(咀嚼)되어 하나의 노래로, 어엿한 저작권(著作權)을 가진 곡으로 태어난 날이었다.


저작권자는 곡이 재생될 때마다 일정한 대가를 지급받는다. 금액은 중요하지 않았다. 언제 어디선가 존재했던 나만의 슬픔이, 언제 어딘가의 누군가에게 전해져 소리를 내는 기분이었다. '저도 알아요, 그 기분.' 한 번 토닥. '우리 잘 살아봐요, 혼자서도.' 또 한 번 토닥. 매달 저작권협회에서 보내오는 저작권료 지급 내역서는 금전으로서의 가치를 넘어 그때의 내가 끝내 주저앉지 않았다는 반증이었다. 나에게 온기를 전해준 것은 나 자신이었다. 그렇게 매달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나를 향해 달려와 나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나 역시 매일, 매 순간, 많은 저작권자들에게 달려가 안아주고,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말을 걸고 있다.


한편 모두가 보호하고 있다.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고 타인의 마음을 소비하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형태가 없어 무던히 낭비하기 쉬운 것들. 하지만 그렇기에 연약하고,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많은 작품들에 '당연한 대가'를 지불하고, 손상시키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저작권은 그런 것이다. 마음에 붙여진 이름, 시간의 기록, 존재의 물증. 더 많은 밤이 새로운 아침을 맞을 수 있게, 곁에서 지켜봐 주는 것. 누군가의 인생, 나아가 심지어는 나 자신에게 존재할지도 모르는 어떤 순간까지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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