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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Sep 07. 2018

뮤트, 당신의 그 어떤 멜로디로든.

음악하는 여자 #1

 

체화당에서의 공연 '한여름밤의 콘서트'



 

 꽤 오래, 나름 실전에 강한 편이라고 믿었다. 팀 과제의 발표도 줄곧 도맡아 왔고, 면접에서 고배를 마신 경험도 드물었으며, 기본적으로 사람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적어도 평가받는 것에 두려움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공연은. 왜 이렇게 익숙해지지가 않을까.


 '기억할 수 있는' 나이의 최전방에 음악과, 음악을 하고 싶은 내가 있었다. 주변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가장 큰 목소리로 매일매일 노래를 불렀다. 지금은 '코노'라는 약어로 불리는 코인 노래방이 '오락실 동전 노래방'이던 시절, 얼마 되지 않는 용돈 - 아마 하루 천 원이었던 것 같다 - 을 들고, 육상부 연습이 끝나면 나는 늘 노래를 부르러 갔다. 주로 자우림, 박기영, 에코, 린, 핑클. 불렀던 노래를 또 부르고, 또 불러도 늘 즐거웠다. 음역대가 높지 않아 웬만한 보컬리스트의 곡들은 가성으로 소화해야 했지만 그래도 목이 찢어져라 서너 곡, 용돈을 모아 한 시간, 그게 삶의 낙이었다. 만 13살의 나이로 데뷔했던 보아(선배님), 데뷔 전이었지만 다음 팬카페에서는 유명했던 소녀시대(선배님) 멤버들. 조금만 더 예뻤으면, 서울에 살았으면.. 도전해 보고 싶었던 길이었지만 결국은 현실로 돌아오곤 했다. 매주 주말 상경하며 연습생 생활을 하던 가장 친한 친구를 통해 대리만족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지방 소도시였지만 제법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면, 어른이 되면, 음악을 접할 기회가 분명히 올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주변엔 늘 '음악 하는 사람'이 있었다. 어쩌면 '시골'이라 불릴 규모의 고향에서, 의외로 고등학교 스쿨밴드 문화가 발달해 있었기 때문일까. 한 다리 건너면 밴드하는 오빠, 한 다리 건너면 호원대 다니는 언니였다. 음악을 좋아했지만 잘하진 못했던 내 눈에 그들은 너무나도 커 보였다. 나 따위가 음악을 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음역대도 넓지 못했고, 악기를 다룰 줄도 몰랐으며, 작곡에도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내 10대 시절, 가장 열심히 했던 것을 두 가지 고르라면, '노래 부르는 것'과 '글 쓰는 것'이었다. 재능은 확신할 수 없었지만 노력만큼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했다. 넓게 듣지 않았지만, 깊게, 오래 들었다.
 

 스무 살, 대학에 와서 마침내 용기를 내 밴드를 결성했다. 부푼 맘을 안고 멤버들을 모았다. 기타리스트의 추파로 결국은 함께 했던 친구에게 팀을 넘겨주고 나와야 했다. 그리고 또 방황. 천송이밴드가 있기까지 4년, 뮤트까지는 7년이었다.


 작곡은 우연한 기회에 시작했다. 아직까지도 작곡, 이란 말이 부끄럽지만, 지금은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는 유진이(활동명 Yireum)와의 팀 해체와 당시 만나던 사람과의 위기가 그 계기였다. 내 목소리에 맞는 곡. 내가 부르고 싶은 곡. 내가 하고 싶은 얘기가 담긴 가사. 결국은 누군가의 공감을 사는 일이 가장 중요하겠지만, 또한 내가 전달하고픈 마음을 담고 싶었다. 내 시간, 내 기억, 멈춰진 순간과 그 안의 감정. 눈물과 행복. 진심이 담기니 멜로디는 쉽게 나왔다. 잠 못 이루던 밤, 한참을 뒤척이다 끝내 짧은 잠마저 악몽으로 깼던 이른 새벽.. 사무치게 그리운 그와 그의 온기를 그리며 십여 분간 키보드를 쳤다. 그에게 전하고 싶은 말들을 불렀다. 첫 곡, '온기'였다. 그 후에도 문득 떠오르는 멜로디와, 동시에 나오는 가사. 잊지 않도록 녹음해 뒀다가 어울리는 화음을 쳐 보고, 구성을 잡았다.
 사실 그 이전에도 혼자 흥얼거린 멜로디로 짤막한 곡들을 만든 적이 있었다. 유진이는 그 곡들을 모두 예뻐해 줬지만, 곡이라고 부르기엔 완결되지 않은 부분들이 많아 함께 부분부분 편곡을 하며 곡의 구성을 배워나갔다. 내가 스스로 만든 형태로는, 남자친구에게 음성메시지로 혹은 귀여운 동영상으로 불러줄 노래, 딱 그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온기' 역시 처음엔 '노래'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의심했었다. 기타 멤버와 함께 반주를 완성하고, 실로폰과 퍼커션으로 악기 구성을 보완하고, 정제된 형태의 보컬을 입히고 나서야.. 비로소 믿게 되었다. 내 노래를 할 수 있게 되었다고.


 간절히 바랐고, 오래 꿈꿨던 일. 너무나 다행히도, 20대를 넘기지 않고 시작할 수 있었던 일. 내가 만든 노래를 내 목소리로 불러내는 것. 취미 밴드, 직장인 밴드를 통해 무대에 오른 경험이 제법 쌓였음에도 불구하고, '내 공연'이 익숙해지지 않는 것에는 이런 이유들이 있지 않을까, 한 번씩 자신에게 되물어본다. 정말 잘 하고 싶은 마음, 내가 낳은 내 자식을 세상에 내놓고 '알아주세요- 이해해 주세요- 공감해 주세요-' 절실히 기도하는 마음. 그 누구의 이야기도 될 수 있지만 또한 더할 나위 없이 내 이야기인 이 노래를 함께 안아주세요, 욕심내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 하고. 자아성찰하는 마음에서, 우리의 팀명인 '뮤트(mu:te)'에는 이런 의미도 담았다. 소리가 없을 음악일 리 만무하지만, 이 멜로디와 가사가 '누구에게나 그들 자신의 이야기로 재해석되길 바라요.' 

 

 2017년 11월 첫 버스킹, 2018년 2월 첫 공연을 시작으로 EP를 내기 전까지 월 최소 1회씩은 무대에 오르기를 목표했지만, 이번 여름날들은 지체된 음원 작업으로 인해 유독 공백이 길었던 참이었다. 그러다 우연히 마주하게 된, 따뜻하고 아늑한 그러나 그 무엇보다 단단한 곳 '체화당'에서의 공연. 3주간의 기획부터 공연 준비, 진행, 마무리까지 함께 했던 점도 특별했지만, 유리창 너머 어둑한 밤하늘을 배경으로 오렌지빛 조명 아래 앉아 노래하던 나는 마치 음악을, 이 공연을, 이 순간을 향해 달려온 지난날들을 거슬러 노래하는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꿈꾸던 만큼 아름다운 장소여서 그랬는지,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을 앞에 두고 노래할 수 있었기 때문인지, 함께 공연했던 새내기 아티스트분들의 떨림이 예전 - 사실, 여전한 - 내 모습을 떠올리게 해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완벽하진 않지만 나를 꼬박 담아낸 노래들을 세상에 내보일 날까지, 그리 멀진 않은 것 같다.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었으면 좋겠단 생각도 한다. 내가 위로받고, 공감하고, 털어냈듯 누군가도 한 번쯤 '이런 감정이 있었지,' 하고 마음을 더듬어 볼 수 있는 노래를 만들어 나가고 싶다. 단 한 사람만이 들어주는 노래라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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