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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주 Jul 19. 2024

여든 살 생일을 맞이한 나에게 쓰는 편지

여든 살 생일을 맞이한 나에게 쓰는 편지

가을이면 낙엽을 태우던 공원 샤쿠지고엔이 생각난다.

스물세 살의 가을로부터 얼마나 멀리 왔나.

그때는 모든 것이 신기했지. 호야역 주변을 거니는 사람들, 세이부선 안에 가득한 노인들. 그리고 오래 입어서 반들반들 윤이 나는 양복에 눈길이 갔었다. 오치아이 목욕탕에서 만난 아흔의 일본인 할머니와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 받을 때도 어렴풋이 나이가 들면 충분히 시간을 들여 자신을 돌봐야한다는 걸 느꼈다. 기모노 오비를 풀어 바구니에 넣고, 느릿느릿 앉아서 탈의하는 모습을 뒤로 한 채 내가 탕에 들어갔다 샤워까지 끝내고 나왔을 때도 아직도 옷을 벗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는데 팔십의 나도 그렇다. 스스로 씻고 입는 행위가 일상에서 많은 시간을 차지한다는 사실에 늘 놀라고는 한다.


나는 오랫동안 모아 두었던 자료나 책을 전부 정리해두었다. 티브이도 버리고, 서랍장도 버리고 계절옷 몇 벌을 버려서 매우 단정한 방을 만들었다. 고흐가 그린 방안처럼 침대 하나, 의자 두 개 그리고 책상이 있는 공간이 전부다.

무를 듬뿍 넣은 된장국도 좋고, 청국장도 좋고, 때로는 맑은 닭곰탕을 끓여 이른 저녁을 먹겠지. 아홉시면 하품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가 새벽이면 일어나서 새로 시작한 실용 영어회화 연습을 하겠지. 그리고 찻물을 끓여서 후룩후룩 마실거다. 뜨거운 차를 마시는데는 나를 감싸줄 의자가 필요하다. 팔걸이가 있고 어깨를 감싸주는 푹신한 의자. 나는 오디오북을 조금 듣다가 다시 잠이 들지도 모른다.


이윽고 아침이 되면 지팡이를 짚고 모닝빵을 사러 나가야지. 빵 하나와 딸기쨈과 치즈면 아침은 충분할 것이다. 일주일에 한번 가정 방문 의료진이 건강 체크를 하고 오후의 산책 때 얼마나 걸었는지 기록을 요구할 것이다. 점심은 복지관이나 도서관 식당을 이용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산책을 한 후 장을 봐오자. 버섯이나 청경채 등을 사서 가볍게 볶은 반찬으로 저녁을 먹으면 의자에서 오디오북을 들으며 잠시 졸다가 천천히 샤워를 하고 사이드 조명을 켜고 눕겠지. 그리고 기도할 것이다.

할머니랑 엄마 곁에 자다가 데려가 달라고.


사후에 살림 등을 치우는 곳은 미리 계약해 두고, 은행 계좌도 정리해서 하나만 써야지. 후견인 제도를 이용하면 이것도 미리 계약해둔 장례식과 수목장으로 마무리를 부탁할 수 있을 것이다. 관 안에 사진 몇 장 함께 태워주면 그후 부탁할 일은 가까운 지인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일만 남겠지 이것도 부음 전용 AI가 페이스북, 인스타, 밴드에 부고를 알리며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어야겠다. 약간의 여유가 있다면 남은 가족에게 제일 좋은 쌀 한 포대씩 나누고 싶다. 그동안 감사했다고 쌀을 먹는 동안만 애도해 달라고. 그래도 조금이라도 돈이 남으면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 가운데 도움이 필요한 한두 아이를 선정해주십사 주민센터 복지담당과 논의해 두고 이 사항도 후견인이 진행하도록 부탁해두자.


*이 글은 maymay님이 처음 쓰셔서 쓰게 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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