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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훈 Dec 27. 2023

가장 끝에 짓는 표정

Bill Evans & Jim Hall "Romain"


"이 곡은 나라는 사람이 어떤 일들을 겪었고 어떤 사람인지를 전체적으로 대신 이야기해 주고 있는 듯한 곡이야. 처음 들었을 때도 그랬어. 밖에서 들려온 음악이 아니라 안에서 피어오른 선율 같았지."


Bill evans와 Jim hall의 합주곡 "Romain"에 대해 나는 말하고 있었다. 늦은 밤의 자취방에서였고 놀러 온 친구와 위스키를 마시다가 음악 이야기를 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았다. 각자 26년 넘게 살아오며 들은 음악 중 "가장 마지막 순간에 들을 곡"들을 추려보기로 한 것이다. 시작하자마자 나는 "Romain"을 언급했는데 그 속결함에 놀란 친구가 대체 어떤 곡인지 궁금해하던 참이었다.


"일단 들어보자고."


CD 플레이어에 앨범을 넣어 재생했다. 제목은 Undercurrent. 저류. 쉽게 말해 아주 깊숙이 숨겨진 감정이나 움직임이라는 뜻이다. 그런 제목을 따르듯 이 앨범에는 하나하나 지나치기 힘든 내밀한 표현이 많아 곡들을 전부 짚고 넘어가고 싶었으나 지금은 그나마 내가 정한 대표곡 Romain을 틀기로 했다. 딸깍. 딸깍. 딸깍. 빨리 감기 버튼을 눌러 4번째 트랙에 도달하자 Romain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빌 에반스의 피아노 연주 첫 음이 내려앉았다.


 아 이런.


 나는 스피커 앞에서 탄식하고 말았다. 언제 들어도 이 첫 음부터 나는 순식간에 지난 삶으로 가라앉아버리는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천천히 떠올랐다. 한 음 한 음 겪으며 다시 파노라마를 압축해 경험했다. 곧 Jim Hall의 기타 연주가 곁들여지면 당시 내 감정들이 기포처럼 한꺼번에 생생하게 부유했다. 저류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들이었다.


"이런 분위기였구나."


친구가 그런 말을 해주는데 마치 내 감각 속으로 함께 들어와 둘러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우리는 위스키를 홀짝이고는 방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연주를 들었다.


"가사는 없네."

"맞아. 그런데 오히려 말로 하지 못한 것들이나 형용할 수 없는 것들까지 표현된 듯해."

"들으면서 느껴지는 것들이 너의 내면이라 생각하면 되지?"


나는 이 Romain의 선율이라면 감상자가 듣고 나에 대해 그 어떤 오해를 하더라도 괜찮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이 선율은 내 영혼과 가까웠으며 연주는 또 한 번 내 손을 떠난 글 같았다.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손등 위에 턱을 올렸다. 수많은 굴곡을 지나간 얼굴이 내려앉았다. 조금 감기는 눈꺼풀을 느끼며 나는 은은하게 들려오는 Romain에 얼굴을 맡겼다.


"웃고 있구나."

"맞아. 이젠 웃을 수 있어. 사실 처음 Romain 들었을 때 울었어. 몸이 너무 많은 것들을 겪어온 것 같아서. 그런데 곡이 끝날 때쯤에는 웃고 있더라. 내게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고 감내하기로 했지. 선율을 따라가다 보니 말이야."

"그래서 인생 마지막 순간에는 Romain을 듣고 싶다 한 거군."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작은방 안을 가득 메운 불빛과 Romain 속에서 생각했다.


'맞아. 분명 미소 지으면서 눈 감을 수 있을 거야.'


"이것 봐. 이거 너 아니야?"


친구는 그 사이 Romain을 검색하다가 어느 음악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보고는 내게 화면을 비춰주었다. 그 글은 딱 한 문장이었다.


- 저 Romain 첨 들었을 때 울었음 ㅋㅋㅋ-


"내가 쓴 글 아니야. 그런데 처음 들었을 때 울었다니 나랑 같네. 이 사람도 처음 듣자마자 자신의 지난 삶과 감정들을 떠올려 울었던 걸까. 게다가 뒤에 ㅋㅋㅋ 라니. 울었던 걸 이제는 웃으며 말하는 점까지 나랑 같군."


친구는 가만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왜?"

"지금 미소 짓는 네 얼굴 뒤로 얼마나 많은 울음들이 있었는지 가늠이 되는듯해서."

"알 것 같아?

"어렴풋이."


나는 잔을 들어 올려 위스키를 다시 마셨고 친구는 흔들리는 위스키 너머 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얼굴 안쪽 너머에 있는 흐름까지 친구가 보고 있는 것 같았다. Romain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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