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훈 Jan 31. 2024

여정

김디지 "부메랑 (D's Jazz Improve Ver.)"


자주 가는 카페, 처음 간 여행지 숙소, 계약하고 들어선 새 집. 어디든 들어서면 내가 먼저 확인하는 건 창가였다. 햇빛은 잘 드는지, 풍경은 좋은지 등 살피기 위해서였는데 나는 인생이란 어떤 창가들을 거쳐왔는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창가는 내다보는 곳이면서도 돌아보는 곳이라 할 수 있었다. 바깥을 볼 때면 눈으로는 앞을 보고 있으면서도 머리로는 그간 걸어온 길이 떠오르곤 했으니까. 여기까지 왔구나. 내일 걸을 길이 저기 있구나 하며 다양한 길을 회상하거나 상상하곤 했다. 글을 쓸 때도 창문 근처에 있는 것을 선호했는데 쓰다가 막힐 땐 창밖을 보면 다시 이어나가는 일에 꽤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여러 창가를 지나치며 살아왔다. 여기 와서 행복하다고 느끼게 하는 창가도 있는 반면 추락해버릴 정도로 마음이 죄다 꺾여버린 채 선 창가도 있었다. 내 글은 어쩌면 그 창가들에서의 시간이 만든 발자취이기도 했다.


 서러워도 걸어야 할 길이었다고. 그리해야만 했다고.


들으면 창가들을 스르륵 회상하게 하는 곡도 나는 알고 있었는데 바로 "부메랑"이라는 곡이었다. 래퍼 P-type(피타입)의 곡을 김디지라는 프로듀서가 재지하게 리믹스한 곡이었다. 서러워도 걸어왔다는 피타입의 서늘한 목소리와 위태로운 분위기의 피아노 연주 합이 이색적인 시너지를 발휘하는 곡이었다.


힘겹게, 지겹게, 고난을 견디며 길을 걸었다고 발음마다 꾹 꾹 힘을 담아 뱉는 피타입의 랩은 피아노 연주를 마치 살얼음판처럼 느껴지도록 했다. 그가 걸어온 인생에는 추운 바람이 들어오고 살얼음판이 내다보이는 창가가 많았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길이라 여기며 꿋꿋하게 나아갔고 앨범을 몇 장 냈으며 좋은 평가를 받는 멋진 순간도 많이 만들어나갔다.


나 역시 몇 권의 책을 냈고 반응을 얻었으며 계속해서 창가를 지나왔다. 많은 글을 창가에서 써왔다. 시린 바람을 맞으며 외롭게 썼다. 삶의 여러 희로애락을 담아 가면서도 너무나 힘들고 좌절스러울 때 "왜 하필 이 길을 택했나" 등의 생각도 들었다. 왜 나는 이런 고된 길을 걷고 있나. 그래도 창가에서 글을 쓰며 이 모든 길이 작품의 자양분이 되리라 믿었다. 이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걸을 길이라는 사명감으로 창가를 사랑하기로 했다. "부메랑"은 고난과 결심에 관한 곡이었다. 자칫하면 차가울 수 있는 곡이었지만 그래도  따스하게 만들어주던 건 종종 받쳐주는 브라스 연주였다.


우우웅 하고 뱃고동 소리처럼 울리는 브라스 연주는 살얼음판을 부수고 햇살 비치는 바다 위 여객선 창가를 떠올리게 했다. 꼭 이 삶이라는 여정이 고난만으로 차있는 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배를 타고 넘실대는 듯한 두근거림을 주었으며 햇살이 드는 듯한 온화함으로 풍경을 순식간에 채웠다. 이제는 웅장하게까지 들리는 브라스 연주. 서러워도 걸어야 할 길에 불어넣어 주는 활력을 상징하는 듯했다. 황홀한 창밖, 넘실대는 희열, 창작해나갈 설렘. 계속해서 내 길을 걸은 이유는 그러한 풍경이 종종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햇빛이 드는 오피스텔에서 나는 새로운 책 작업을 계속해나갔다. 쓰다가 의자에 기댄 채 잠깐 햇살을 만끽했다. 오랜만에 듣고 싶어지는 음악이 있었다. "부메랑"을 틀었다. 창밖을 보자 저 너머 어딘가에는 몇 년 전의 내가 중학교 창가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점심시간을 보내고 있을 듯했다. 운동장에서 학생들은 축구를 하며 뛰고 있었고 교실의 책상 앞에는 공책이 펼쳐져 있었다. 한창 무언가를 쓴다는 일에 매료되어 있던 때였다. 그때 이미 나는 "부메랑"을 듣고 있었다. 각오를 다지는 눈빛으로 앞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부는 바람, 넘어가는 페이지, 소년들의 외침, 정오의 햇살. 그리고 살아가는 나. 무어든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는 마음. 앞에 놓인 길이 힘든 길이어도 계속 걷겠다고 다짐하는 내가 교실 창밖으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무슨 뜻인지는 아나?
 새로이 펼쳐질 나날
 한가운데 우리가 산단 걸 의미해
 이 기회 뒤에 다가올 다음을 준비해

 

우우웅. 브라스 연주가 울렸다. 창밖은 내일을 맞이하고 있었다. "부메랑"의 피아노 소리는 이제 위태롭기보다는  지난 조각조각들을 그러모으는 소리로 들렸다. 그리해야만 했다고. 출발된 여정은 몇 년이 넘도록 이어졌고 계속해서 새로운 풍경을 마주해가며 나는 창가를 다니고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가장 끝에 짓는 표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