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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크라테스 Jun 19. 2024

유학생의 37851번째 위기

지옥에서 부활했다 예수처럼 이렇게

1. 벌써 2주 전 일이다. 내 논문의 진척상활을 본 지도교수의 평가는 아주 비관적이었다.

나는 분명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고

이대로는 논문을 제시간에 완성할 수 없겠다는 불안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틀 뒤 지도교수의 60세 생일을 기념하는 발표가 열렸다.

독일의 유명 교수들이 다 모여서 발표하는 그 자리에서

나는 그들의 모습과 나의 모습 사이에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간극을 느꼈다.

언어도 문화도 지식도 모든 게 저 사람들은 아예 다른 세계의 사람 같았고

나는 내 옷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그래서 항상 이렇게 목이 졸린 듯 힘든 나날이었구나

그렇게 나는 더 이상은 공부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2. 그렇게 한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가고 있을 때

아니 이미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나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어떤 자그마한 불씨를 느꼈다.

지금 당장 내 손으로 끝내는 게 아니라

연말까지는 열심히 해보자.

이번에 안되면 진짜 그만두자.

그렇게 반격이 시작되었다.


3. 너무나 무기력했지만, 일단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책을 펴고 무작정 읽고 무작정 써 내려갔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때까지 달렸다.

집에 오면 찬물로 샤워해서 정신을 차린 뒤 다시 글을 썼다.

그렇게 갑자기 뇌가 각성되었다.

위산이 역류해서 밥을 잘 먹지 못했다.

자려고 누워도 글에 대한 생각이 나서 잠을 자지 못했다.

그렇게 3일이 지나고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기 시작했다. 

건강을 위해 양배추로 죽을 끓여서 먹었고

나가서 달렸다.

순식간에 3KG 정도가 빠졌다. 

그래도 살 빠지니 기분은 좋았다.

그렇게 다시 나의 테제를 정리해서 지도교수에게 제출했다.


4. 그리고 어제 내가 강의하는 곳에서

쉬는 시간에 할머님 한 분이 내게 오셨다.

'예전부터 말씀드리고 싶었는데 선생님이 수업을 너무 잘해주시는 것 같아요. 쉽고 재미있는데 집에 가서 책을 다시 보면 내용은 하나도 안 빠지고 다 설명해 주셨더라고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다른 할머님들의 칭찬이 이어졌고

학기의 마지막 수업이라 받은 수업료 봉투에는 100유로의 보너스가 더 들어있었다.

돈도 돈이지만 이 길이 내게 맞지 않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내가 공부는 몰라도 설명하는 것에는 재능이 있구나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일에 남이 좋아해 주면

이대로 조금 더 해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유학생활의 37851번째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지옥에서 부활했다.

올해 연말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승부를 보겠다는 그 다짐을 가슴에 품고

또 오늘 하루도 묵묵히 살아나간다.  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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