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와 편견, 삶과 죽음에 관하여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아이는 완벽한 존재다.
영화 <나를 죽여줘 中>
난 뇌 손상이야. 감정 조절도 안 돼. 맨날 또라이 짓만 해. 그치만 나는 싸워. 난 혼자니까.
기철은 ‘우리’가 장애인에 대해 가지는 ‘편견’과 ‘오해’에 관해 이야기 한다.
‘태아알코올증후군’을 앓는 기철은 입은 걸고 조증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튀는 행동을 보인다. 현재의 아버지 민석은 기철을 가르켜 ‘참 좋은 아이’라고 말하지만, 그의 유별나게 돌출된 모습은 보는 이들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얼핏 보기에 그는 불량해 보이고, 어딘가 ‘모자라’ 보인다.
그러나 사실 기철은 보기보다 똑똑하고 보기완 다르게 속이 깊고 사실은 마음이 여린 청년이다.
나도 보통 사람처럼 살고 싶어.
현재는 ‘우리’가 터부시하는 장애인의 ‘성’과 ‘자립’에 관해 이야기한다.
곧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현재는 또래의 여느 아이가 다 그러하듯, 평범하게 여자에 관심도 많고 야동도 본다. 그의 꿈은 사실 여자친구를 사귀는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처럼 사는 것’이다. 여자친구를 사귀는 것은 단지 그 ‘평범함’의 일부에 불과하다.
평범하게 살기 위해선 아버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보통의 어른’들은 다들, ‘당연하게’ 그렇게 되니까. 하지만, 남들에게는 당연한 것이 현재에게는 까마득히 멀게만 느껴진다.
나에겐 심각한 장애를 가진 아들이 있고… 나한테 나는 없어.
민석은 ‘우리’가 쉬이 잊곤 하는 인간의 ‘존엄’, 그리고 ‘자아’에 관해 이야기한다.
현재의 아버지 민석은 시간 강사로 근근이 연명하며 현재를 돌보는데 ‘인생’을 바쳤다. 그런 민석에게 현재는 세상의 ‘시작과 끝’이다. 현재가 민석의 도움 없이는 못 하는 것이 더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상대를 놓지 못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돌봄이 필요한 현재가 아닌 돌봐야 하는 민석이다.
민석은 현재에게 자신이 한때 유망한 작가였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는다. ‘버려진 꿈’이라서 말할 필요가 없었던 게 아니라, 무시로 굴러다니며 발에 채이는 ‘희망’과 마주하는 것이 슬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상에 어떤 부모도 평생 같이 살 수는 없어.
기철은 현재와 다르게 기댈 사람 하나가 없다. 그의 목표는 지긋지긋한 장애인 시설을 벗어나 독립하는 것이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그곳은 ‘사람 살 곳’이 못 된다. 기철은 ‘아버지’가 있는 현재가 부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가 걱정된다.
사실은 기철뿐만 아니라 ‘모두’가 민석이 현재를 평생 돌봐줄 수 없다는 걸 안다. 기철은 끊임없이 ‘그 언젠가’를 위해 독립해야 한다고 현재를 설득한다. 현재가 독립해서 나가야 그의 아버지 역시 자기 인생을 즐기면서 살 수 있다며.
기철은 가장 좋은 친구이자 유일한 친구인 현재와 독립해서 단둘이 살고 싶어 하지만, 현재의 아버지 민석은 ‘장애인’인 두 사람이 단둘이 사는 것을 허락하지 ‘못’한다. 현재는 곧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물이 되지만, 민석에게 현재는 아버지의 도움 없이는 목욕조차 못 하는 ‘영원한 아이’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날 좋아해 주지 않을 거야. 난 괴물이니까.
어른이 되어가는 현재는 성에 눈을 떴다. 하지만 현재는 스스로 ‘장애인의 성’을 터부시하고 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남들처럼 ‘평범하게’ 여자친구를 사귀고 자연스럽게 서로를 원하는 것이지 기계적으로 욕구를 해소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몸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만’을 가감 없이 표출하며, 현재는 수치심을 느끼고 민석은 고뇌에 빠진다.
‘아버지라서 해줄 수 있는 것’과 ‘아버지만 해줄 수 있는 것’은 딜레마를 낳는다.
현재는 오늘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이 하나 더 늘었다.
아버지는 돈, 현재는 머리, 저는 힘.
기철은 그렇게 말했지만, 민석은 더 이상 돈을 벌 수 없는 처지가 된다. 우연한 사고로 인해 그는 자신의 몸속에서 죽음이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병원에서 퇴원해 직장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그의 ‘자리’는 사라진 후였다.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는 고통과 함께 ‘시간’을 잠재운다. 민석은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기분’이 들어 약을 먹는 것이 싫다. 하지만 그의 병세는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어 이제 약 없이는 한 시간도 버틸 수가 없다.
신은 인간에게 버틸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 준다는데, 딱히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민석은 ‘죽고 싶다’는 생각이 때때로 불현듯 머릿속을 스친다. 하지만 죽음의 목전에서도 아들을 걱정해야 하는 민석에게는 그마저도 사치다. 이 집이나마 유지하려면 보험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의 삶에는 마지막까지 ‘나’가 없다.
아빠는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 거야….
장애인활동보조사로 민석과 현재의 집에 살 수 있게 된 기철은 ‘독립의 꿈’을 이루었지만 어쩐지 자신이 생각했던 자유로운 삶과는 거리가 먼 것에 불만이 생긴다. 오빠와 조카에게 힘을 보태기 위해 현재의 고모 하영도 함께 집에 살게 되었지만, 빠듯한 형편에 하루 종일 물세, 전기세, 가스요금을 계산하고 집안일을 하느라 하루 24시간이 부족한 지경이다.
현재는 아빠와 ‘함께 살 수 없는 때’가 가까워져 옴을 느낀다. 그는 그동안 스스로 터부시하며 거부했던 ‘기계’ 사용법을 배우고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으로 바꿔나가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당신이 원하는 건 뭐야? 지금 당신을 위해
수원은 민석의 유일한 ‘친구’이자 이해자다.
남들에게, 심지어 아들에게도 차마 하지 못했던 말들을 그녀에게는 할 수 있다.
수원은 민석을 좋아하지만, 아들 현재는 불편하고 어렵다. 지체 장애가 심한 현재의 말을 잘 못 알아듣는 것은 그녀에게 두려움마저 안겨준다.
하지만 죽음을 직감한 민석은 혼자 남겨질 아들이 걱정된다. ‘한 번씩 아들을 만나달라’는 민석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수원은 민석의 아들 현재와 마주할 용기를 낸다.
일주일에 한 번, 매주 화요일.
그녀는 현재와 함께 민석이 쓴 책을 읽어나가는 시간을 갖는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아줌마를 판단하지 않아요.
눈썰미가 좋은 기철은 단박에 수원의 ‘정체’를 파악한다.
“현재네 아버지를 보는 눈빛, 손가락의 반지 자국.”
수원은 당황하지만, 기철은 언제나 그랬듯 대수롭지 않게 해맑다.
다시는 병원에 안 가. 끔찍해.
날이 갈수록 병세가 악화되는 민석은 아들을 돌보는 일은커녕 이제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이 많아지는 몸이 되었다. 심한 발작으로 응급실에 실려간 적도 있다.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았던 민석은 하영과 현재에게 “병원에는 데려가지 말라”며 몇 번이나 당부한다.
직장은 잃었지만, 덕분에 시간은 많다. 모처럼 머리도 맑았다. 민석은 자신과 현재, 기철과 하영이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로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즐거운 마음으로 술술 써 내려갔지만, 노트에는 마구 휘갈겨진 낙서뿐이다. 기철은 “괜찮다”며 애써 웃지만, 그의 병은 이제 뇌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자신을 ‘잃게’ 만들고 있다.
민석은 그 순간에도 기철에게 “현재에게는 비밀로 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의 삶에는 마지막까지 아들 현재뿐이다.
아빠는 네 아빠만이 아니야. 내 오빠이기도 해.
민석은 아직 ‘나’가 남아 있을 때 ‘선택’할 수 있기를 원한다. 현재는 민석이 지금까지 자신을 돌봐왔던 것처럼, 아버지의 마지막을 자신이 ‘돌봐주겠다’고 결심한다.
아마도 그것은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민석이 생각하는 ‘나’일 것이다.
하지만 하영이 강력히 반대하고 나선다. 그녀가 그들의 선택을 반대하는 것에는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그저 사랑하는 가족이니까. 사랑하는 가족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아서. 그녀는 자신의 오빠를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되는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을 뿐이다.
민석이 발작을 일으키자 하영은 구급차를 부르려 한다. 하지만 현재는 “아빠가 병원에는 가기 싫다고 했다”며 그녀를 극구 말리고, 하영은 갈등에 빠진다.
아빠를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어.
‘희망’을 꾸었다.
현재의 고등학교 졸업식 날 민석이 늦잠 자는 것을 현재가 깨운다. 침대 위에서 투닥거리며 장난을 치던 두 사람은 현재의 졸업식을 준비한다. 현재는 민석의 수염이 지저분하다며 손수 면도도 해준다.
그러나, 꿈은 그저 꿈일 뿐이다.
기철은 ‘이 방법’은 분명히 문제가 될 것이라며, 어차피 자신은 전과도 있으니 상관없다면서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말하며 아빠를 위해 ‘목욕’을 준비한다.
영화 <나를 죽여줘>는 ‘우리’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많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 영화 속 인물들은 각자가 이 사회의 단상을 이야기하고 있는 동시에 ‘우리’ 자신이다.
극 초반에 ‘기철’을 보며 나는 의아함을 느꼈었다. 그의 얼핏 보면 불량하게까지 보이는 모습은 내가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쉽게 걷어낼 수 없을 편견과 오해를 적나라하게 지적했다.
실제로 기철을 ‘지적 장애’로 표현하는 글을 인터넷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다. 반면 극 중 기철은 본인의 입을 통해 자신에게 ‘정신장애’가 있음을 극 초반부터 몇 번이나 강조한다. 의도된 연출일지 모르겠으나, 내 뇌리에는 깊숙이 남았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편의 범주’를 벗어난 기철의 행동은 그런 ‘오해’와 ‘편견’을 자아낼 수밖에 없는 걸까.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존엄성’은 비단 존엄사뿐만 아니라 ‘연명치료’에 대입해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 민석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내가 내가 아니게 만드는’ 마약성 진통제를 달가워하지 않아 조금이라도 맑은 정신으로 대화하고 싶은 마음에 약을 거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견딜 수 없는 고통은 진통제를 거부하지 못하게 만들고 약에 취한 민석은 다른 사람과 대화조차 할 수 없는 몽롱한 의식의 저편에 잠식되어 버리며, 의식이 돌아왔을 때는 다시 자괴감에 빠져야만 했다.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에 우리는 어떤 의미를 두어야 할까.
‘우리’는 어쩌면 지금 순간에도 ‘나’를 어떠한 ‘틀’에 가두고 있는 건 아닐까.
극적인 상황에서 평온한 두 사람을 비추는 연출을 통해 ‘죽음은 불가피한 비극이어야만 하는가’하는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마지막 장면이 매우 인상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