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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당신의 기억은 믿을 수 있는가

by 최영인 마음여행자

줄리언 반스의 맨부커상 수상작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덮는 순간, 나는 다시 첫 페이지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화자인 토니의 시각에 온전히 몰입했기에, 뒤늦게 드러난 진실 앞에서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소설은 인간 기억의 불확실성과 시간의 무상함이 빚어낸 파국을 섬세한 언어로 엮어내며, 독자들을 사유의 복잡한 미로로 초대한다.


소설은 노년의 토니가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젊은 시절의 열정, 우정, 사랑과 배신에 대한 그의 기억은 선명해 보인다. 그러나 어느 날 도착한 한 통의 편지는 그의 평온한 삶을 산산조각 낸다. 과거 여자친구 베로니카의 어머니 유품 속 일기장에는 토니가 애써 잊거나 외면했던 진실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 진실은 오래전 토니가 친구 에이드리언과 베로니카의 관계에 격분하여 보낸 한 통의 편지였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마주한 그 편지 속 ‘날것의 언어’를 읽은 토니는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그는 한동안 젊은 날의 치기와 질투로 돌리며 죄책감을 회피한다. 그러나 그 편지가 불러온 파국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토니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막다른 지점에 다다른다. 소설은 그 지점에서 막을 내리며, 독자를 섣부른 위안이 아닌 차가운 깨달음 앞에 세운다.


주인공 토니의 모습은 결코 특별하지 않다. 그는 ‘평균적인 삶’에 안주하고,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며 자기 합리화에 익숙하다. ‘이만하면 나쁘지 않다’는 자기 위안 속에 살아가지만, 과거의 그림자가 불현듯 되살아날 때 그는 깊은 회한에 빠진다.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사과조차 아무 의미가 없다는 깨달음 속에서 그는 남은 생을 견뎌야 하는 운명에 놓인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기억의 ‘왜곡’을 기본값으로 설정한다. 우리는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진실마저 편의에 맞게 재구성한다. 소설은 그렇게 편집된 기억이 결국 진실이 아닌 주관적 서사에 불과하다는 점을 냉정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반스가 포착한 것은 기억의 오류만이 아니다. 그는 동시에 시간의 불가역성을 깊이 다룬다. 과거는 결코 되돌릴 수 없고, 토니는 저지른 실수를 만회할 수 없다. 이미 흘러간 시간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마주하는 것뿐이며, 그 지점에서 인간은 잔인한 운명과 맞닥뜨린다.


토니가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후회가 아닌 ‘뒤늦은 회한’이다. 후회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더 나았을 텐데’라는 아쉬움에 머문다면, 회한은 ‘내가 그렇게 했기에 누군가 상처를 입었고,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는 도덕적·정서적 책임을 포함한다. 그래서 토니는 죄책감과 속죄 욕구, 그리고 무력감이 뒤섞인 고통을 견뎌야 한다.


소설은 이 ‘회한’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축적’이라는 개념을 통해 드러낸다. 축적은 단순히 물질적 개념이 아니라, 경험과 기억, 선택과 관계가 시간 속에 켜켜이 쌓인 총합을 뜻한다. 삶은 단순한 시간의 나열이 아니라, 누적된 경험과 관계가 서로 얽히고 곱해져 만들어진 결과다. 토니의 삶은 평범해 보이지만, 과거의 선택과 사건들이 층층이 쌓여 지금의 그를 규정한다. 어떤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 있지만, 어떤 기억은 희미해지거나 삭제되어 편집된 채 남는다.


결국 토니는 축적된 기억과 선택 속에서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베로니카와 에이드리언의 관계에서 그가 무심코 취한 행동은 단순한 개인적 선택이 아니라 타인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반스는 이를 통해 “자신의 의도와 무관하게 벌어진 일 앞에서 인간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라는 근본적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토니는 “설령 내가 잘못 기억했더라도, 결과에 대한 책임은 결코 피할 수 없다”는 도덕적 자각에 도달한다.


이처럼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인간이 짊어져야 하는 도덕적 불가피성을 탐구한다. 기억은 불완전하고,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지만, 우리는 자신의 행위와 그것이 타인에게 남긴 영향을 외면할 수 없다. 토니의 회한은 그 불가피성을 비극적으로 드러내는 문학적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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