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채소인 줄 알았어
96년 1월 12일 결혼 10주년을 맞아 딸과의 여행을 계획했다. 아직 돌이 채 되지 않은 원준이는 인천 외갓집에 맡기고 우리 셋이서 뉴질랜드, 미지의 땅으로 향했다.
당시엔 뉴질랜드로 가는 직항이 없었다. 우리는 '피지'라는 섬에서 경유를 하게 되었다. 피지 공항 면세점에서 30대의 부부는 난생처음 흑인을 보았고,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흑인 아주머니의 상술에 넘어가 뱀 인형 두 마리를 구매했다. 딸은 차마 뱀 인형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지 못했다.
한국인들에겐 생소했던 뉴질랜드(반지의제왕 촬영 전이였다. 아, 텔레토비도 없던 시절)에서 가이드 아저씨의 존재는 한줄기 동아줄과 같았다. 그를 따라 바다 구경, 엄청 높고 소리가 컸던 폭포, 화산 등 멋진 곳을 열심히 따라다녔다. 식사는 가이드가 예약한 현지 식당에서 먹었다.
셋째 날 숙소에 들어오자 우리는 그제야 동네를 둘러볼 용기가 생겼다. 코앞에 나가는데도 돈주머니를 꽁꽁 숨겨 챙겼다. 아빠는 9살의 딸을 안고 다녔다.
마트에 들러 과일을 좀 사기로 했다. 사과, 레몬, 바나나 모두 아는 과일이다. 한국에서 비싼 오렌지 두 알과
-이건 뭐지? 과일인가?
-과일들이랑 같이 있으니까 과일 맞겠지?
-좀 묵직한데? 물이 많은가 봐.
-한번 사봐. 맥가이버 칼도 있으니까 잘라보면 돼.
호텔에 들어와 손을 씻고 과일을 골랐다.
-도대체 껍질을 어떻게 까는 거야?
-이리 줘봐.
느낌에 따라 길쭉하게, 싱가포르에서 망고를 먹어본 아빠가 망고를 자르듯 아보카도를 잘랐다.
덜 익은 과일의 속은 푸르뎅뎅한 연두색,
향기도 없고, 딱딱하고,
심지어 커다란 씨앗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과를 깎듯 껍질을 깎았더니 색이 벌써 갈변했다.
-자기가 먼저 먹어봐.
-이거 뭐야? 이거 과일 아니야
-어..? 진짜 이게 뭐야?
-엄마 나도
-이상해, 뱉지 마
으..... 응? 이게 뭐야?
-먹지 마 괜찮아
한 개에 5불은 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5불짜리 쓰레기를 샀다고 생각했다.
'이건 분명 불에 익혀먹는 거다.'
좋은 경험 했다.
다음 명절날:
-동서 그건 아보카도라는 거야. 껍질이 어두운 걸 골라서 반을 가른 다음에, 씨를 빼고 소금을 살짝 뿌려먹으면 맛있어.
-? 소금..? 과일이랑 소금이요?
그 뒤 한참의 시간이 지나 우리나라에서도 아보카도가 꽤 흔한 과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너무나 먼, 좀처럼 손이 가지 않는 두려운 존재랄까.
하루는 롯데마트에서 아보카도 행사를 하길래 두 알을 사다 놓았다. 집을 비운 사이 엄마에게 메시지가 왔다.
-딸, 아보카도 속을 파서 밥에 얹어먹었어. 간장 살짝 뿌려서 김이랑 먹으니까 맛있더라~
아참
한국에 돌아오니 기어다녔던 원준이가 걷고 있었다.
아이가 큰다는 것은 아보카도가 익는 속도만큼 빠르고, 또한 그만큼 순간을 예견할 수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