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지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 나를 가려주기도 보여주기도 하는 것/ 내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옷/ 많은 실패를 안겨주었던 옷/ 나를 안정되게 하는 것.
나는 바지가 많다. 붙박이장 한 칸이 전부 바지일 정도로 많다. 그 중 삼분의 일은 실제로 입는 바지이고, 삼분의 일은 전에 입었거나 미래에 입을 바지이고, 나머지는 절대 입지 못할 거 같은 바지이다.
우선 실제로 입는 바지들은 내가 수많은 실패 끝에 찾아낸 내 몸에 꼭 맞는 예쁜 옷들이다. 나는 발목과 종아리, 허리는 가늘고 허벅지는 굵고 엉덩이는 크기 때문에 바지를 사기가 쉽지 않았다. 경험이라도 많았으면 모르겠으나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는 교복치마 안에서 살았고, 거의 유일한 바지였던 체육복은 학교에서 주는 대로 입었다. 그 때도 체육복 바지가 너무 좋아서 치마 안에 늘 바지를 입고 다녔던 것 같지만.
성인이 되어 본격적으로 쇼핑을 할 수 있었을 때에는 스키니진이라는 높은 장벽을 넘어야했다. 편하지도 어울리지도 않는 바지를 색색깔로 잘도 사 모았다. 나에게 2000년대는 암흑기(소녀시대 덕분에 컬러가 입혀졌지만)였다.
사고, 좌절하고, 실패하고 백 번쯤 반복했을 때 스키니는 정말 아니라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는 바지 자체를 포기했다. 속상한 마음으로 치마를 입었다. 예쁘고 편하다고 합리화하며 바지 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그 때 아랫배를 힘주고 다니느라 아직까지 복근이 남아있는 것 같다.
그러다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27살, 겨울이었다.
‘원피스 말고 이렇게 바지 세트는 어떠세요?’
점원이 검은색 블라우스와 짙은 붉은색의 바지 세트를 권했다. 너무너무 예뻤지만 또 좌절을 겪고 싶지 않아 망설여졌다. 좀 더 둘러보고 온다며 매장 나와 한참 백화점을 돌다가 결국은 돌아가 옷을 입어보았다.
‘아 이거구나! 나는 발목이 보이고 밑위가 긴 아래가 살짝 좁아지는 슬랙스가 찰떡이구나!!’
해방, 자유, 독립, 유레카를 비벼 만든 행복을 느꼈다. 처음으로 10만원이 넘는 바지를 샀다. 그 뒤로 나는 다시 바지를 사기 시작했다. 수입, 유럽사이즈 34나 36, 미국 사이즈 4나 6. 이 세 조건을 베이스로 허리가 작고 엉덩이와 허벅지는 넓어졌다가 약간 줄어드는 스타일이면 전부 입어봤다. 매장에 한번 들어가면 바지만 일곱벌씩 입어봤다. 골덴, 모직, 린넨, 데님 등 계절별로 차곡 차곡 사들였다.
이제 나는 8년차 경력의 바지부자다. 지금은 COS에서 3년 전에 산 남색 골덴 바지를 입고 있다. 그냥 골지가 아니라 그 간격이 잘고 두 줄씩 묶인 골덴이라 할머니가 될 때까지 촌스러운 느낌 없이 입을 수 있을 것 같다. 길이가 길었지만 자르지 않고 두번 접어서 발목이 보이게 입었다. 봄에는 검정이 섞인 생지데님을, 초여름엔 나일론 소재의 아랫단만 잔 주름이 있는 바지가 준비되어 있다.
바지를 입으면 급할 땐 뛰면 되고, 심심하면 따릉이를 탈 수 있다. 높은 바위도 성큼 올라갈 수 있고, 뛰어내리다가 넘어져도 대충 털고 일어나면 된다.
나는 바지 안에서 안정적이다. 보호받는다. 자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