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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닿 May 15. 2023

‘화해를 담은’ 일본 여행

교토에 가기로 선뜻 결정했다. 교회 주보에서 ‘화해를 담은 일본 기행’1) 안내를 발견한 직후였다.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키워드에 이끌렸다. ‘일본’ 그리고 ‘재일동포’. 영국 교환학생 시절 일본인 친구들을 몇 사귀었지만 일본은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4대에 걸친 재일조선인 가족사를 담은 《파친코》를 인상 깊게 읽은 차였다.


재일동포와 화해가 필요한 당사자는 일본 정부이겠거니 지레짐작했다. 《파친코》는 재일조선인 가족이 소외된 일본인들과 서로 도우며 살았다는 점도 주목하지만, 이들이 겪은 차별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행을 하는 동안 한국 역시 재일동포를 외면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토에 대한 첫인상


여행 첫날. 김포공항에서 간사이공항까지 비행시간은 2시간 반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과연 가깝고도 먼 나라. 공항을 빠져나와 고양이 캐릭터 키티가 그려진 하루카 열차를 탔는데, 제복을 입은 열차 직원은 허리를 숙여 인사하면서 열차 이용에 대해 친절하게 설명했다. 일본인의 투철한 직업의식에 대해선 들은 바가 있지만 어떤 정책이나 제도가 이를 가능케 하는지 궁금해졌다.


한 시간 정도 이동해 교토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마루타마치역에 도착하자 벌써 저녁이었다. 호텔 근처엔 낮은 건물들이 많았다. 옥상을 잘 활용하는 한국과 달리 일본 가정집은 대개 지붕이 있다. 천 년 동안 일본의 수도였던 교토는 문화유산이 많아 건물 높이나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짓는 것에 대한 기준이 까다롭다고 한다. 2인 1실 숙소에서 룸메이트와 이야기를 나누다 금세 잠이 들었다.


도시샤 대학에서 만난 윤동주


둘째 날은 도시샤 대학으로 향했다. 이마데가와역에 내려 3번 출구로 나가면 학교 건물과 이어진다. 캠퍼스 건물은 일관성이 있었다.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과 어두운 밤색 목재를 사용한 유럽풍 건물의 돌계단과 목재 난간에서 깊이 새겨진 세월을 느꼈다.


도시샤 대학은 윤동주가 1943년 경찰에 체포되기 전 다닌 학교로, 그를 추모하는 시비가 있는 곳이다. 태평양전쟁이 말미로 접어드는 시기, 윤동주는 조선인 학도병 징집과 교련 수업을 피하기 위해 도쿄의 릿쿄대에서 이곳으로 편입했다. 도시샤 대학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고등교육 기관으로서 국제적인 인재를 양육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고, 간도에서 태어나 용정, 평양, 서울, 도쿄와 교토에서 생활한 윤동주에게 이 대학 분위기는 어땠을까.


도시샤 대학의 설립 역사를 일별할 수 있는 해리스 이학관(Harris Science Hall Doshisha Gallery)을 나와 조금 걸으면 윤동주 시비를 볼 수 있다.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어 학교를 오래 다니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졸업생도 아닌 이의 시비가 있다는 게 놀랍다. 윤동주 자필 원고 필체 그대로 〈서시〉가 적혀있고, 일본어 번역도 병기했다. 한쪽에 세워진 안내판은 윤동주를 남한도 북한도 아닌 ‘코리아의 민족시인’이자 ‘독실한 크리스천 시인’이라고 소개한다. 시비는 윤동주 50주기였던 1995년, 도시샤 교우회 코리아 클럽의 발의로 세워졌다. 이 시비 건립을 목적으로 도시샤 대학을 졸업한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선총련), 재일본대한민국민단(한국민단) 재일동포 동창생들이 교우회를 조직한 배경이 있다. 도시샤 대학을 포함해 일본 각지에선 소수지만 윤동주를 추모하는 모임이 매년 진행된다. 그중엔 일본의 지식인과 시민들도 있다. 이들은 어떤 마음에서 윤동주를 추모하고 그의 시를 읽는 걸까? 시비 앞에서 나를 포함한 일행들은 윤동주의 시를 낭독했다.

그곳엔 다녀간 사람들이 남긴 방명록이 담긴 박스도 놓여있었다. 어느 고등학교 국어 교사는 학생들이 배우는 첫 작품이 〈자화상〉임을 알렸고, 한 국문학도는 국산 쌀로 빚은 막걸리를 가져왔다며 외로웠던 윤동주의 타향살이를 위로했다.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신앙의 선배님이 걸어가신 길을 따라가겠습니다. 천국에서 뵙겠습니다. 2023. 2. 1.”라는 글에 눈길이 머물렀다.


우토로 마을을 찾아온 사람들


셋째 날 아침, 지하철을 타고 이세다역에 내려 우토로 마을에 도착했다. 2015년 MBC 〈무한도전〉 프로그램에서 지금은 돌아가신 강경남 할머니의 사연을 다루며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 마을로 알려졌다.


태평양전쟁 시기 일제는 조선인 1,300여 명을 동원해 군용 비행장을 짓다가 패망 후 이를 중단했다. 돌아갈 곳도 재산도 없는 이들은 한국과 일본 모두에게 외면당한 채 집단 합숙소(함바)를 짓고 마을을 이뤄 살았다. 1980년대까지 상하수도가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거주해오다가 강제 퇴거 위기에 처했다. 조선총련과 한국민단이 연대해 우토로 마을에 대한 진상 조사를 요구했고, 일본 활동가들도 ‘철거 반대!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을 결성했다. 한국 시민들도 여론을 모으고 모금 활동을 벌였고, 마침내 한국 정부가 토지 일부를 사들여 2018년 시영주택(市營住宅)을 건립할 수 있었다.

곧 쓰러질 것 같은 함바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그을린 스테인리스와 벽돌만 남아있는 몇 군데의 집터. 2021년 8월에 발생한 우토로 마을 방화 사건 때문이다. 집과 창고를 포함한 건물 7채, 전시를 목적으로 보관했던 우토로 마을 입간판 등 50여 점의 자료가 소실됐다. 체포된 방화범은 “한국이 싫었다”라고 진술했다. 범행 전, 그는 우토로 마을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한 번이라도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었을까?


마을을 통과해 우토로 평화 기념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길 왼편으로는 우토로 마을 주민들이 이주해 살고 있는 시영주택이 보였다. 일본에선 보기 드문 아파트 형태로, 현재 60가구 정도가 살고 있다. 길 오른편으로는 일본 자위대 주둔지가 이어지는데,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큰 규모였다.

우토로 평화 기념관 앞에는 작은 함바가 전시돼 있다. 실제로 쓰인 자재를 가져와 복원했다고 한다. 우토로 마을 1세대부터 그 후손들의 일상과 함바 내부 모습, 철거와 방화 당시 사진이 전시되어있다. 일어를 잘하는 일행이 벽에 붙은 설명을 낭독했다. “함바를 둘러싼 주민들의 생각은 다양하고 괴롭습니다. 과거를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보고 싶지 않다는 사람도 있고, 이것이 우리의 원점이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재일조선인 1세는 그래도 그때는 모두가 돕고 살았고, 그때의 생활이 제일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했습니다.” 우토로 마을에 남은 유일한 재일조선인 1세대였던 강경남 할머니는 2020년 눈을 감았고, 2세대마저 고령화로 접어들어 마을 인구는 점점 줄어들고 있다.


우토로 평화 기념관은 3층 건물이었다. 우토로 마을의 역사와 1세대 주민들이 살아온 모습을 소개하는 2-3층 전시실은 일어로만 설명되어 있는데, 우토로 평화 기념관 사이트에 들어가면 한국어와 영어 설명도 제공하고 있다. 가나(일본 문자)만 겨우 읽는 나로서는 1층 우토로 카페가 더 기억에 남는다.

1층에 들어서자마자 시끌시끌한 웃음소리가 들리고 김치전 냄새가 확 풍겼다. 우토로 마을 주민들과 푸른 조끼를 입은 청년들이 내부를 꽉 채우고 있었다. 기독간호대학교 학생들이었다.2) 간호대에서 우토로 마을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이었는데, 알고 보니 미션스쿨이었다. 한쪽에서 주민들 손을 맞잡고 손톱의 영양 상태를 확인했고, 혈압 등도 쟀다. 다른 한쪽에선 김치전, 건더기가 가득한 된장찌개 등을 만들었다. 정월 대보름을 맞아 찰밥과 부럼, 김치와 된장을 한국에서 소분해 가져왔다고 한다. 색동 치마저고리 그림을 색칠하고, 한국 트로트를 부르는 시간도 있었다.


같은 공간, 한쪽에선 우토로 마을을 다룬 신문 스크랩을 살펴보는 일본 시민 두 명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일본 패망 이후의 근대 사회학을 연구한다고 했다. 식민지와 만주의 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우토로 마을 방화 사건과 헤이트 스피치(hate speech)를 마주하며 차별과 폭력 문제를 들여다보고 싶었고, 우토로 평화 기념관이 세워졌다는 소식을 듣고 방문했다고 한다. 전시실에도 대여섯 명의 일본 시민이 있었다. 한 명 한 명에게 오늘 왜 이곳을 찾았는지 묻고 싶었지만, 다음 일정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일행들은 이날 저마다 다른 인상을 받았다. 어떤 이는 “우토로 마을 주민들을 도왔던 일본인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돼, 마음속으로 일본과 화해했다”고 말했다. 반대로 “우토로 마을 사람들이 일본 정부는 물론 한국 정부에게도 오랫동안 버려졌었다는 생각이 들어 화가 났다”는 이도 있었다. 또 다른 이는 우토로 마을 주민들의 웃음소리를 주목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이 있었음에도 그 순간 웃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해에서 키워드는 ‘사람’


우토로 마을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 관광지로 유명한 기온 거리를 들렀다. 이곳에서 우리 일행은 각자 흩어져 다녔는데 나는 헤맨 기억뿐이다. 나와 룸메이트 둘 다 핸드폰 로밍이 말썽을 부려 일본어 번역기를 사용할 수 없었다. 우리를 도운 건 편의점에서 계산을 기다리던 한 어르신이었다. 70대로 보였는데, 바깥에서 설명하시다가 결국 지하철역까지 직접 안내해주셨다. 미처 편의점에서 물건을 사지 못하신 것 같은데, 어차피 당신도 집 가는 길이라고. 도움받는 이의 국적이나 인종, 언어 수준, 성별 등에 따라 호감도나 도움의 수준이 크게 달라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외지로 나올 때면 어딜 가나 낯선 사람을 돕고자 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헤어지는 순간, 할아버지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만큼은 마음을 담아 짧은 일어로 건넸다.


그 전날 밤 일행 몇몇은 1층 라운지에 자유롭게 모였다. 연극배우인 룸메이트는 해외동포들과의 다양한 문화예술 교류에 관심을 보였고, 가이드를 담당한 박영춘 팀장은 이 기행의 취지를 말했다.


“화해에서 키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평화로 나아간다는 건 입장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이죠. 직접 교류해보면 결론적으로는 상대 의견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단정 짓고 판단했던 것 가운데 한 가지 정도는 동의할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할 수 있어요. 그런데 남북 관계만 하더라도 한국 사회에서는 말을 꺼내는 순간 프레임이 작동해버리죠. 남한에선 북한에 대한 지식과 연구가 넘쳐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죠. 그러니 프레임이 작동하는 사회를 벗어나보는 경험이 필요해요. 일본에서 재일동포를 통해 북한 문제를 살펴볼 수 있는 거죠. 그 과정을 함께 만들어갔으면 좋겠고, 한 교회 안에서나마 이런 생각을 이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리스도인이라면 프레임을 내려놓고 복음을 중심으로 사람을 먼저 만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요?”


재일동포3)들을 통해 어떻게 북한 문제를 살필 수 있다는 걸까? 이는 마지막 날 일정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제는 없는 나라 ‘조선’을 택한 이들


마지막 날은 고려미술관을 가는 일정이었으나 겨울철 휴관으로 문을 닫았다. 안타까움이 컸다. 이곳을 세운 故 정조문 선생은 재일동포들에게 한국 문화재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일본에 흩어져 있던 한국 문화재를 40년 이상 수집한 조선 국적4) 재일동포 1세대다. 통일이 되기 전까지 북한, 남한 그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겠다고, 심지어 고향도 방문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이를 지켰다. 그는 어떤 마음으로 이런 결정을 했던 것일까. 조선 국적은 사실상 무국적이기 때문에 취업에서 차별을 당해온 역사도 있고, 지금도 해외여행 등 일상생활에서 불편함을 겪는다. 이제는 없는 나라, 조선을 국적으로 고수하는 소수의 사람들은 어떤 의식과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지 궁금했다.


이번 기행을 떠나기 전에 본 다큐멘터리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찍은 양영희 감독도 재일조선인 2세다. 제주 출신임에도 조선총련 활동을 열심히 하고, 북송 사업5) 때 세 아들을 북한에 보낸 어머니가 제주 4·3사건의 생존자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일본으로 건너온 제주 4·3사건 생존자들은 남한 정부를 두려워했고, 1975년 남한에서 유학하던 재일동포 등을 대상으로 간첩 조작 사건이 발생해 재일 사회에서 북한을 지지하는 이가 70%를 넘던 시대이기도 했다. 한편, 재일조선인 가운데는 남한과 달리 친일파를 청산하고 조선총련이 운영하는 조선학교6)를 통해 재일동포를 오랫동안 지원해온 북한을 더 가깝게 여기는 이들도 있다.


‘빨갱이’라는 프레임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이들의 삶. 이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었는데, 고려미술관을 못 가는 대신 자유 시간을 보내라며 은각사(지쇼지)를 추천받았다. 고대 교토의 역사 기념물인 이 사찰은 ‘철학의 길’로 이어져 있어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일행과 거리를 두고 걷다가 은각사에 도착하고 나선 본격적으로 따로 움직였다. 내내 개인 시간을 확보하지 못해 무척 혼자 있고 싶었다. 소나무와 이끼가 특색인 일본식 정원에 자리한 연못은 사찰 모습을 거울처럼 비췄다. 이날 날씨가 아주 맑았는데, 언덕에선 교토 시내가 내려다보였다.


우리가 나눈 대화


그래도 기억에 남는 것은 역시 함께했던 기억이다. 사람과의 기억. 대화했던 기억. 그리고 마음을 모아 기도했던 기억. 셋째 날 저녁, 일행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지난 며칠의 기억들을 꺼냈다. 다른 관점에서 한 번 더 여행지를 둘러보는 기분이었다.


마지막 날, 주일 아침엔 모두가 모여 예배를 드렸다. 윤동주의 〈팔복〉을 함께 읽고 함께 기도했다.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가 반복되고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라고 끝나는 이상한 시. 설교 내용 중에는 이런 내용도 있었다. 윤동주는, 힘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이 세상 자체에 대해 그리스도인으로서 슬픔과 부끄러움도 느꼈을지 모른다고. 진정한 슬픔이란 무엇인가, 화평케 하는 자로 부름받은 우리는 어떤 평화를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 어떤 이는 인간의 한계를 느끼면서 계속 하나님을 구하게 된다고 말했다.


내가 마음속으로 밑줄을 그은 말도 있었다.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온전하게 회복하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죠. 그러한 평화의 길로 가기 위해서는 모두가 죄인이라는 고백 속에서 서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지가 중요한 것 같아요. 나는 잘하고 상대방은 잘못했다는 생각이 너무 강하면 화해가 일어나기 어렵죠. 서로의 처지와 연약함, 부족함을 인정했을 때, 상대방을 바라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기고 거기서 평화가 시작되지 않을까요?”


그러려면 우리, 우선 만나야겠다.


* 각주

1) (재)한빛누리가 기획하고 나들목교회네트워크가 참여하는 평화 기행은 연변, 조선족, 북한에 대해 새롭게 생각해볼 수 있도록 북·중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통일비전트립을 진행해왔다.(본지는 2017년 9월호[제322호]에서 이와 관련해 박영춘 한빛누리 민족화해사업팀장을 인터뷰한 바 있다.) 코로나 때문에 중단되었던 통일비전트립이 이번 일본 기행을 기점으로 다시 시작됐다. 내가 속한 팀은 3박 4일 일정으로 박영춘 팀장을 포함해 9명이 출발했다.


2) 인터뷰를 한 고정옥 교수를 포함한 교직원 2명과 학생 12명은 2월 4일과 5일 이틀간 이곳에 머물러 43명의 우토로 마을 주민들을 만났다. 마을 주민들의 혈압과 산소 포화도, 체온을 측정하는 기초적인 건강관리를 진행했고, 한국 음식을 만드는 등 그리움을 달래줄 수 있는 일을 기획했다. 고 교수는 교회에서 식당 봉사를 오랫동안 해와서 일을 빠르게 할 수 있었다, 레시피를 알려달라는 주민도 있었다며 웃었다. 또, 이번 봉사가 섬김과 나눔이라는 기독교 정신을 학생들이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고 말했다. 이번 방문은 매년 진행해온 해외 봉사 프로그램(워크 캠프 챌린지)의 일환으로, 올해 우토로 마을이 선정된 것은 김미희 기독간호대학교 총장의 아이디어였다.


3) 식민지 시기 일본 내 조선인은 1911년 2,527명에서 1945년 110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현재 등록된 재일동포는 2020년 말 기준 약 45만 명이다. (일본 법무성 산하 입국관리국 통계)


4) 재일동포가 선택할 수 있는 국적은 크게 세 가지다. 재일동포임을 숨기고 일본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일본 국적, 역사의식과 정체성을 고수하면서도 해외여행 등 일상생활에서 불편함이 없는 대한민국 국적, 그리고 조선 국적(사실상 무국적)인데, 일본과 북한은 지금까지 수교가 맺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북한 국적을 취득할 수 없다. 재일조선인 축구 선수 안영학은 조선 국적을 지키면서 감수해야 하는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지키는 장기적인 목표”라고 말한 바 있다. 일본 정부 통계에 의하면 2021년 기준 조선적 보유자는 2만 6천 명 정도다.


5) 일본 정부는 북한 정부와 합작하여 1959년부터 1984년까지 9만 명 넘는 재일조선인을 북한으로 보냈다. 일본은 재일조선인을 자국에서 내쫓고 싶어 했고, 북한은 ‘천리마 운동’ 등 양적 성장을 위해 노동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북송 이후 양영희 감독의 오빠들은 일본 재입국이 불허됐고, 양영희 감독도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 제작 후 북한 입국이 금지됐다.


6) 해방 후 재일조선인들은 국어강습소를 세웠는데 이후 조선총련이 세워지고 이 활동가들에 의해 조선인학교로 확립된다. 북한은 1957년부터 조선학교를 교육 원조비 등을 통해 지원해왔으나 남한은 재일동포의 민족교육을 외면해왔다. 일본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조선학교는 2018년 64개교가 남아있다. 조선학교에 대해 더 알고 싶다면 이를 다룬 다큐멘터리 〈우리 학교〉를 참조할 것. 본지는 2015-2016년 조선학교 이슈를 다룬 ‘백우영의 ‘몽당연필’’을 연재한 바 있다.


김다혜

본지 기자. 다양한 배경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 소통하는 일에 관심이 있다. 교회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 <복음과상황> 388호 커버스토리 ‘진정한 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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