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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닿 Mar 05. 2022

안부를 묻기 힘든 이때

《어떻게 지내요》,  시그리드 누네즈

밥은 잘 먹고 지내? 대학 시절 같은 동아리에서 친하게 지냈던 한 친구의 메시지였다. ‘잘 지내’도 아니고 ‘어떻게 지내’도 아닌 한 마디. 그는 몰랐겠지만, 조금 힘겨웠던 하루를 넘기는 데 지렛대가 되어주었다. 결코 자주 연락하는 다정한 사이가 아닌데, 최근 다른 친구 몇몇이 보내온 짓궂은 다른 메시지들도 몸속에 쌓아두었다. 나도 안부 묻는 일을 조금은 덜 게을리 하려고. 감정을 표현하고 사람을 대하는 게 서툴러서, 기억해두었다가 써먹으려고.


그러나 한편으로는 알고 있었다. 정말 누군가 힘들면 말을 건네기 어렵다는 것을. 그래서일까. 언젠가 한 번 읽고 치워두었던 이 소설의 제목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잘’ 죽고 싶다는 오랜 친구의 부탁


《어떻게 지내요》는 수전 손택을 회고한 산문 《우리가 사는 방식》으로 국내에 알려진 시그리드 누네즈의 신작 소설이다. 이야기의 중심축이 되는 인물은 ‘나’의 오랜 친구다. 50퍼센트 생존율의 말기 암 환자. 그는 아버지의 힘겨운 임종을 지켜봤기 때문에, 자신을 살려내지도 못할 고통스러운 치료를 받고 싶어 하지 않는다. 주위의 설득으로 마음을 바꾸지만 암은 전이됐다.


친구는 처음의 선택을 후회하며 다른 계획을 세운다. 자신이 원하는 때에 평온한, 나름의 품위가 있는 죽음을 선택하는 것. 그는 ‘나’에게 이를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이미 맘에 드는 장소와 안락사 약은 준비된 상태였다. 그러나 혹시 모를 잘못 될 일을 대비해 옆방에 있을 누군가가 필요하다. “내게 필요한 건 나와 함께 있어줄 사람이야.”


‘나’는 친구의 부탁을 들어줄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걸 안다. 그의 유일한 가족인 딸은 친구에게 오랫동안 적대감을 품어왔고, 다른 친한 친구들은 그가 끝까지 싸우기를 바라며 “어떤 종류의 조력 자살에도 절대 관여할 수 없다”고 거절했기 때문이다. 결국 “죽는 데 도움이 될 무엇이든 하겠다” 말하자, 친구는 안도감에 벅차 흐느낀다.


하지만 친구의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타지에 가서도, ‘나’는 내심 그의 결심을 믿지 않는다. 서로 농담을 주고받으며 깔깔대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로 장을 봐야 하는지 고민될 때, 적은 양을 적게 먹는 그와 달리 식욕이 넘치는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낄 때, 친구가 죽음을 앞두었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웃고 또 웃으며, 물에 빠져 상대를 구하려 무력하게 애쓰는 사람들처럼 서로를 부여잡고 목이 메어가”는 날들.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옛 친구와의 관계 또한 깊어져 간다. 몸짓과 표정만으로 서로 원하는 것을 알아차린다.

    

슬픔 앞에서 궁핍해지는 언어


이야기는 어둡게만 흘러가지 않는다. 이전과 같은 모습과 방식은 아닐지라도, 농담을 즐기는 친구의 성격은 여전하다. 같은 문학 잡지에서 일했던 ‘나’와 친구의 입을 통해 다양한 문학 작품과 영화들이 대화 속에 등장해 다채로운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런데 말문이 막히는 순간 또한 빈번하다. 모습이 변해버린 친구를 처음 봤을 때, 친구가 어려운 부탁을 해왔을 때, 점점 사그라지는 친구의 모습을 마주할 때― ‘나’는 말을 잃는다.

 

아무도 듣고 싶지 않고 누구에게도 위로가 되지 않는 형식적인 말. 하지만 그의 탓이 아니다. 우리 언어가 거칠고, 속 비고, 말라비틀어져서, 감정 앞에서 언제나 어리석어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것이니까.


이런 경험은 우리 일상에서도 비일비재하다. 나의 경우엔 학교를 졸업하고 2년 가까이 지속된 코로나로 친구들을 잘 만나지 못했는데, 연락도 그렇게 자주 하지는 못했다. 여러 가지 일로 바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또래 청년인 친구들의 삶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말을 자주 삼켰다. 안 그래도 ‘괜찮은’ 일자리가 없는 구직 시장이 코로나로 꽝꽝 얼어붙었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어려운 소식을 어렵게 전하기도 했다. 안 좋은 소식을 훨씬 많이 듣는 나날들. 결코 무관심해서가 아닌데, ‘어떻게 지내냐’ 묻는 게 점점 어려워지고, 연락을 해서도 오래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언어가 궁핍해졌다.


이같은 언어의 무력함과 관련해, 소설 속 인물들도 바벨탑 이야기를 떠올린다. 신이 인간의 교만을 막고자 여러 언어를 만들어냈다는 내용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아무도 모르게 ‘모든’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도록 한 게 아닐까 싶다고.  


사랑하는 사람끼리도? 미소를 띠며, 떠보듯이, 기대하면서, 내가 물었다. 우리가 막 사귀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는 그저 미소만 보였다. 하지만 몇 년 후, 쓰라린 헤어짐의 순간에 쓰라린 대답이 나왔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가장 그렇지.   


나아가 소설은 언어가 실패한 순간 도착하는 것들을 담아낸다. 친구에 대한 슬픔으로 힘들어하는 ‘나’를 이름 모를 이웃이 안아주는 모습에서. 그리고 열심히 단어를 차례로 놓아보려 애쓰지만 결국 실패하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가 견디며 살 수 있는 이유  


그런데 만약 이 책을 죽음을 앞둔 소중한 친구와의 우정 이야기로 읽는다면, 이 소설이 가진 고유한 목소리를 느끼지 못할 것 같다. 죽음을 앞둔 친구 이야기를 다룬 소설은 많으니까. 이 소설은 그로부터 한발 더 나아간다. 전체 분량의 절반 가까이, 결코 적지 않은 비중을 들여 이 소설이 그리고 있는 건 ‘그렇게 가깝지 않은 이웃들의 일상’이다.


그래서인지, 등장하는 이웃들은 스토리를 진행시키기 위한 도구가 아닌 실재하는 한 존재로 느껴진다. 인간이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없을 거라 여기면서도 손자들에게 떳떳하기 위해 강연하는 ‘나’의 전 애인, 보이스피싱인 줄 알면서도 사기꾼과 대화하고 싶어 하는 이웃집 할머니와 그녀를 돌보는 유일한 사람인 아들, 남편을 잃고 자꾸만 ‘나’의 집 문을 두드리는 이웃집 여자, 성폭력 위기에 시시각각 놓이는 여성들, 어느 날 뜻 모를 눈물을 훔치는 ‘나’가 묵는 집의 호스트, 가까스로 구조된 아기 고양이….  


그런 이웃들을 인식하는 ‘나’가 탁월한 인격을 가진 것은 아니다. 버거운 어려움에 처한 이웃과 자연스레 멀어지는 상황이 찾아오자 안심하기도 하니까. 그럼에도 ‘나’는 이들의 존재를 놓치지 않는다. 어려운 부탁을 해온 친구의 마음을 헤아렸던 것처럼, 이웃이 겪었을 어려움을 헤아리고, 고양이가 겪었을 폭력을 상상한다. 지하철에서, 공원에서 모르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고 이들이 나누는 일상적 대화에도 귀를 기울인다. 마주치는 사람들 나름대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는 걸, 신을 믿지 않더라도 언젠가 간절한 기도 한 번쯤은 해봤으리라는 걸 알기 때문에.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했다.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서 내게도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생각하는 사람과 내게는 절대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생각하는 사람. 첫 번째 유형의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견디며 살고,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


이 소설은 그런 이야기다. 위로에도, 애도에도 실패하는 언어를 가진 인간들이 말 대신 부둥켜안는 이야기. 분노와 슬픔으로 몸을 떨다가도 슬랩스틱 같은 유머가 빛을 발하는 이야기. 죽음뿐 아니라 소외되어 온 질병과 나이 듦을 마주하는 이야기. 그래서 책을 덮고 나면 내게 안부를 물어온 친구들처럼, 누군가의 안부를 묻고 싶어진다. 끝내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할 지라도.


※ 인문교양 잡지 월간 유레카 2021년 12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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