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중매로 선을 보고 결혼하게 된 어머니는 남편을 따라 경북 울진으로 이사를 갔다. 울진에서 오징어잡이 배를 타고 뱃일을 하던 아버지는 벌이가 시원잖아 생계를 잇기가 어려워지자 부모님은 결단을 내렸다. 아버지에게 새로 주어진 일은 주왕산 자락에 화전민처럼 터를 잡고, 숯가마에서 숯을 생산하는 일이었다. 어머니의 부지런한 노고가 뒤따랐지만 그 일로 하나둘 늘어나는 자식들과 함께 밥벌어 먹고 살기가 수월찮았다. 때마침 영천에 계셨던 외할아버지의 조언이 부모님께 천금같은 기회를 제공했다. "새마음으로 무엇이든 하면 된다"는 기치로 새마을운동을 일으켜 농어촌에 일대 혁신을 불러온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5개년의 소식을 듣고, "박서방 울산으로 가게나. 절대 후회 않을걸세"라고 인생길에 정확한 길 안내를 하셨다. 엄청 개발된다는 외할아버지의 조언대로 향후 수십년에 걸쳐 중화학공업과 자동차와 선박및 석유화학 등 한국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감당했던 울산이다. 선진국의 발전상을 지독하게 흠모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은 개발도상국에서 벤치마킹의 롤모델처럼 잘 알려져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발전상을 따라하며 카피했던 나라들마다 경제 수준이 쑥쑥 성장하게 됐다고 전해왔다. 러시아와 2년 넘게 전쟁을 치르는 젤렌스키 대통령도 한국의 경제발전과 한강의 기적을 따라하고 싶다고 전했고, 윤석열 대통령과 원희룡 전 국토부장관이 포화 속을 헤치고 관계자들을 찾아 만나 열띤 토론을 나누었다.
어쨌든 가난한 농촌 출신의 부모님이 울산에 정착했던 것이 신의 한 수처럼 주효했다. 울산에서 사글세방부터 시작해서 전월세를 전전한지 20여년 만에 마침내 우리 부모님에게 꿈에도 그리던 내 집 장만의 마스터플랜이 성취됐다. 그곳이 울산 남구의 야음체육관 근처 현재의 우리집이다. 60년된 야음시장을 뒤따르던 체육관시장이 번개시장으로 이름을 알렸는데 변전소 건너편에서 부터 엄마집의 바로 앞 골목에까지 재개발이 진행돼 상전벽해를 이루어가고 있다.
전국 최고 부자도시로 이름을 알렸던 울산에서 부친은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감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생각할 때마다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는 것이 아버지는 거개 술에 불콰하게 취해서 삶의 중심을 갈 지자로 걸을 때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나마 장녀였던 큰 누나와 둘째 누나가 어린 동생들을 건사하니 어머니가 아침 일찍 온 가족 밥상을 차려주고, 부리나케 회사 차에 몸을 싣고가 하루종일 고단한 노동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겨우 집에 도착하면 자식들 입에 들어갈 밥상부터 또 차려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어머니의 근면과 성실한 삶이 고스란히 자녀들에게 밥상머리 교육이 되고도 남았다. 어머니의 설교는 입을 열어 말로 가르친 것이 아니라 매사 몸부터 앞서는 행동으로 증명되었던 것이다. 현재 어머니의 집에 입주하기까지 신화부락 인근의 만수밭에서부터 여천국민학교에서 지나는 길가 전셋집을 거쳤고, 그후 공단 들어가는 배과수원이 즐비했던 조합을 거쳐 야음동 두어 곳을 더 경유해 지금의 엄마집에 도달했다. 집성촌 출신의 어머니가 친인척 경조사를 일일이 챙기며 성장하는 자녀들 5남매를 길러내는 과정은 전원일기 양촌리 김회장댁과 아주 빼닮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부창부수라는 말처럼 부친의 방황을 모친의 뼈깎는 헌신으로 커버했다고 표현하면 정확할 것이다. 그렇게 울산에 정착한 부부의 5남매는 소천하신 부모님의 의 세대를 또 다른 시간에, 또 다른 환경에서 계승해나가고 있는 것이다. 환갑에 돌아가신 아버지에 비해 30년 더 살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3년 전 돌아가셨다. 일생 꿈꾸던 내 집 마련을 달성하고 자녀들에 이어 손자들까지 장성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흐믓해했는데 치매 증세로 인해 요양병원에서 6년 넘는 세월을 보낸 것이 너무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일생을 쉼없이 달려왔건만 요양병원에서 긴 세월 갇혀지내듯 시간을 보낸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주인 잃은 집은 요양병원 7년 세월과 소천하고 지금까지 3년 해서 10년 세월이 유수같이 흘러갔다. 야음동 일대 재개발이 활발히 진행중인데 엄마집 블록이 속한 번개시장 이곳만 재개발이 더디다. 일전에 살펴보니 엄마집의 열쇠 구멍이 일부 헐어버렸다. 들어가기는 겨우 들어맞는데 도통 빠지지 않는 열쇠에 급기야 약한 열쇠 허리통이 똑 부러져버렸다. 엄마집 짐을 치우고 재개발을 기다리는 입장에서 새 열쇠를 맞추게 되었다. 지난 과거에 사용됐던 자물쇠는 이제 수명이 다했다. 불과 30~40년 전 삼천리는 초만원이라고 매스컴에서 얼마나 떠들었던가. 그렇게 과출산을 나무랐던 정부 정책은 작금엔 저출산의 깊은 수렁에 빠졌다. 얼마나 근시안적인 대책인가.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열쇠가 필요하다. 설혹 한 두개 열쇠를 잃어버려도 걱정 말 것은 마스터키가 있기 때문이다. 엄마집의 열쇠는 새 거로 바뀌어 필자의 손에 쥐어져있다. 언젠가 내 손의 열쇠도 내 아들과 후손이 물려받을 것이다. 바람처럼 물처럼 흘러가은 것이 인생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