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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ra Kim Mar 23. 2021

책상에 발을 올려도 될까요?

의자에 잘 앉는 아이가 되기까지

우리 제제는 바르게 걷는 게 때로 힘든 중이다. 엄마인 나와 손을 잡고 걸을 때, 유난히 내 손과 팔에 힘이 들어간다. 걸을 때 앞을 보는 것, 즉 시야를 확보하고, 다리와 발에 힘을 적절히 분산시키고, 균형있게 걷는 것이 아직 쉽지만은 않다. 그래도 많이 발전 중이지만 말이다. 그러다보니, 바쁜 걸음을 걸어야할 때는 나도 모르게 아이 팔목을 세게 잡는다. 그리고 몸이 앞을 볼 수 있게 등을 자주 바로잡아준다. 그래야 앞으로 잘 나아가는 제제. 어떨 땐 나도 제제도 땀이 뻘뻘 날 때가 있다. 특히나 가파른 계단에서는 20kg 남짓한 제제를 안고 오르고 내리는 편이 어느 면에서는 마음이 편할 때도 있다.

     

그런데 제제가 치료를 다니는 센터는 하필 엘리베이터가 없는 낡은 건물 4층에 위치하고 있다. 거기다, 주차도 꽤 거리가 있는 곳에 해야했다. 차를 세우고, 아이와 건물까지 걸어가서, 다시 4층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날은 하루 써야할 에너지를 다 써버린 느낌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센터 선생님들은 부러 이사를 안 하는지도 모른다. 엄마와 아이가 센터에 올 때가 아니면, 언제 이렇게 고단한 계단을 택해서 매주 다정히 손을 잡고 걷겠는가 말이다.      


엘리베이터에서도 제제는 때로 서있기가 힘들다. 엘리베이터는 위아래로 움직이니 아이의 몸이 균형을 잡기 위해 흔들린다. 손잡이도 키에 비해 높은 곳에 있다 보니, 두 다리에 의지해 서있어야 하는데, 제제에게 쉽지만은 않다. 그러다보니 같이 승강기를 탄 누군가의 발을 밟기도 한다.                



한국 나이로 5세가 되면 수업시간에 의자에 앉아있는 훈련이 시작된다. 어느 기관이나 비슷히다.  의자에 앉으려면, 등을 곧게 세우고, 엉덩이를 의자 깊숙이 넣어야 자세유지에 유리하다. 그런데, 제제는 허리 펴는 자세가 쉽지 않으니, 자꾸만 등이 둥글게 된다. 이때 제제의 발이 책상위로 올라간다. 담임선생님은 아이가 다리를 책상에 걸치고 있는 사진을 찍어서, 톡으로 보내왔다. 다른 친구들도 수업시간에 제제를 보고 따라해서 곤란한 상황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센터에 가서 여쭤보니, 제제가 발을 책상에 올리고 있는 것은, 앉아있는 자세를 유지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이라는 것이다. 등이 구부러지니, 고개는 책상에 엎드릴 수밖에 없는 것. 그런데, 엎드려 있는 자세도 수업시간에 보기에 좋지 않을 것이다. 분명, 선생님이 아이를 바로 앉히기를 여러 차례, 아니 수십 번 도왔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아이는 엎드리지 않기 위해서 발을 책상 위로 올렸을 것이다. 그러면 허리가 의자에 가 찰싹 붙으니, 보다 안정적이었을 것이다.     


센터 선생님은, 제제가 가능하면 벽에 기댈 수 있는 자리에 앉으면 훨씬 편안하게 앉아있을 것이라고 했다. 서양에서는 이런 경우에 아이를 배려해서, 계속 발을 올릴 수 있게 허용하기도 하지만, 동양적 사고방식으로는 ‘버르장머리 없다’로 생각될 수도 있고, 선생님 수업하시는데 아이가 발을 신성한 책상 위에 얹는다고? 등등으로 좋게 보여지긴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친구들 보기에도 좋은 모델이 아닐테고. 


그런데, 무엇보다도 아이의 발달을 존중하고, 격려하는 것이 교육의 우선이 된다고 한다면, 아이가 허리를 붙이고 앉는 데 도움이 되게, 발판을 마련해준다거나, 벽에 의자를 놓아서, 의자가 적어도 움직이지 않게 고정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방법을 들었지만, 우리 제제만 수업을 하는 상황도 아니었고, 아이들이 조화롭게 지낼 수 있게 하기 위한 방침으로 자리를 계속 바꿔서 앉혀야 하다보니, 쉽지 않았다. 거기다 교사에게서 제제가 가까운 곳에 앉혀서 보조해 주시려다보니, 어찌됐건 상황이 개선되기는 어려웠다. 제제는 계속 엎드려 있거나, 발을 책상에 올려서, 선생님이 바로 앉혀야하는 아이인 채로 다섯 살 상반기를 보냈다. 그런데, 지나고 생각하니, 그 나름 선생님들이 제제를 조화로운 상황 가운데 적응시키기 위해 얼마나 물리적으로 힘들었을까 싶다. 보다 적극적으로 선생님께 앞서 기술한대로 도와달라고 말씀드렸다면 좋았을까. 


내가 알기로, 제제가 다섯 살에 다녔던 기관은 제제를 참 예뻐하고, 어떻게든 아이의 성장을 도우려 애쓴 선생님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엄마와 아이, 그리고 치료센터와 유치원이 더욱 긴밀하게 아이의 상태에 대해 소통했어야 했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찌됐건, 제제가 앉은 자세는 모범답안은 아니었기에, 앉는 법을 계속 고쳐주려는 주위의 도움이 되려 아이에게는 좌절감을 주었던 것 같다. 이 당시, 아이에게서 무엇보다 좌절감이 크다는 것을 제제의 언어에서 느꼈다. 바로 앉아야지, 또또또! 같은 아이를 나무라는 말이 아이 주변에 맴도는 것을 느꼈다. 의자에 앉으면서 혼잣말처럼 아이가 그런 말을 중얼거렸을 때, 마음이 참 아팠다. 아이가 성장함을 어느 선까지 바라 보고, 어느 지점까지 도와야 할 지를 결정하고, 커뮤니케이션 하는 게 참 쉽지 않음을 느낀다. 제제는 그냥 그 시간에 충실해서 다섯 살을 살아낸 것이리라. 그러니 나도 흘러간 시간은 그 시간대로의 성장을 긍정하는 데서 그치기로 했다.       



아이가 책상에서 자리를 지켜야만 하는 유치원에 다니는 게 그래서 힘들었음을 받아들였다. 마침 코로나가 심해지면서, 센터도 쉬고, 되도록 엄마와 많은 시간을 보내며, 이따금 국공립 어린이집에도 다니곤 했다. 6개월이지만, 아이에게 좀 쉼을 주고 싶었다. 연말에 가까워 태어난 아이인지라, 같은 연령의 아이들에 비해 모든 게 버거웠을 제제를 위해, 6개월만이라도 한 살 어린 연령의 반에서 지내게 했다. 아이는 거짓말처럼 편안해지고, 밝아졌다. 그리고 여섯 살이 되던 3월에 아이를 같은 연령의 친구들이 있는 유치원으로 다시 보냈다.          



“어머니, 제제가 오늘은 오전에 엎드리지 않고, 정자세로 최장시간 잘 앉아있었어요. 유치원에서도 많이 칭찬해줬어요. 집에서도 잘 했다고 많이 격려해 주세요.”   

   

“선생님, 제제는 발달전문가로부터 듣기로 근긴장도가 또래에 비해 조금 낮은 편이래요. 그래서 앉아있는 게 아직은 조금 어려울 수도 있어요. 장시간 착석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칭찬해줘야 한다고 하네요,” 

    

“그런 것 같았어요. 그런데 하루하루 너무 다른 모습이에요. 스스로 허리를 세우고 잘 앉아 있는 아이가 되고 있어요.”     


선생님이 아이에게 응원을 쏟아부어주고 계심을 느꼈다. 빨리 자라서, 조화롭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 자체로 그대로 봐주시는 여유가 느껴졌다. 그 사이 제제도 많이 자랐을 것이다. 다섯 살 제제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니 말이다. 이후에도 유치원 선생님은 제제에게 의자를 벽에 바싹 붙이고 앉아있게 해주셨다. 숫자를 익힐 때에도, 다른 친구들은 연필을 잡고 쓰게 한다면, 제제는 편한 자세에서 좋아하는 가베를 만지며 익힐 수 있게 배려해 주셨다. 기관에서 즐겁게 배운 덕인지, 집에서도 아이는 아주 즐거운 얼굴로 영어든, 한글이든, 수세기든 배움에 목마른 사람처럼 이것저것 엄마에게 물어보고, 스스로 책으로 매칭하는 즐거움에 푹 빠져있다. "써보고 싶어요!" 하며, 연필을 잡고, 그림도 나날이 완성도있게 그려나간다.


다행이다. 그저 우리 제제가 이런 성장의 상태에 있는 것에 대해 웃어주시고 귀여워해주시고, 기다려주시고, 다정하게 기회를 주시는 선생님을 만나서. 그리고 다섯 살 제제는 이제 여섯 살로 꽤나 많이 컸다. 근긴장도도 너무나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조금 천천히 자라고 있었던 것일 뿐. 내가 밤잠을 설치며 걱정하던 다섯 살 제제는 이제 내 앞에 없다.      


“사과같은 내 얼굴 예쁘기도 하지요. 눈도 반짝, 코도 반짝, 입도 반짝 반짝!

눈도 세모, 코도 세모, 입도 세모, 세모!

입도 길쭉, 코도 길쭉, 귀도 길쭉 길쭉! ...”     


버전을 달리해서 아이가 목이 터져라 노래하는데 목소리에 자신감이 가득 차있다. 잘 할 수 있다는 격려와 실제로 잘 했을 때 받은 칭찬의 기쁨이 아이를 매일매일 조금씩 자라게 했으리라. 그리고 어느 시기에 느릿했던 성장 곡선이, 어느새 가파른 기울기로 껑충껑충 한꺼번에 오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 달 가량 치료를 쉬고 갔더니, 센터 선생님들이 제제를 보시고 수업시간 내내 감탄사를 연발하셨다. 혹시나 제제가 성장에 속도가 붙은 시기임을 옆에서 듣게 되어, 다른 엄마나 아이가 마음이 상대적으로 어려워질까봐 주위를 살폈다. 3월은 좌절로 가득한 엄마들이 센터에 많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의 상태에 대해 새로 만난 유치원 선생님, 학교 교사, 주변 친구, 또는 그 친구의 엄마들에게까지 이해를 구하는 말과 표정을 해야하는 달이기 때문이다.           


어른인 나도 바르게 앉아있는 게 때로는 많이 힘들다. 내가 허리가 아프다고 하면, 남편은 당연한 결과라고 한다. 평소 앉아있는 자세가 좋지 않은데, 허리가 괜찮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참 크고 있는 아이가 어찌 완벽한 자세로 늘 잘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하니, 감사함부터 찾게 된다.          


아이가 다섯 살에 있었던 일들은 복기하기조차 힘들 때가 많다. 남의 일처럼 쓰기가 쉽지 않다. 그때 아이가 겪었을 몸의 버거움, 주변사람들의 어려움, 그리고 내가 겪었던 마음의 소동이 모두 생각나기 때문에.     


이루 헤어릴 수도 없다. 자식을 기르며, 내 아이가 어떠하다는 이유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훌쩍여보지 않은 사람은 그 마음을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센터에서 만나는 여러 아이들을 대할 때마다, 어떤 의미로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기가 쉽지 않다. 다 알 수 없지만, 제제와 다르게 무언가 힘든 시간을 아이와 엄마가 함께 보내고 있을 테니. 언어로 설명이 잘 안 되는, 혹은 몸의 감각을 적절히 쓸 수 없을 때가 많은 아이들. 그리고 안타깝지만, 도울 방법이 묘연한 순간들을 그저 지켜보며, 기다려온 엄마들. 그리고, 그 세월이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아득함 가운데 살아온 시간들. 그 모든 시간과 존재 앞에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며 또한 숙연해지곤 한다. 내가 견디기 힘든 순간들마다, 그 여러 엄마들을 생각한다. 그 엄마들이 아이의 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더없이 차근차근, 채근하지 않고 그 순간을 미소로 견뎌냈던 것을 스승 삼는다. 내가 그러지 못할 때마다, 그런 모델로서의 엄마들에게 감사하게 된다. 다 자라고나면 이 순간의 삶에 충실했던 아이와 나의 마음이 사라질까하여, 핀으로 하나하나 고정하는 마음으로 써두게 된다. 오늘도 무사해서, 감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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