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성장통, 그리고 그 곁의 흔쾌한 사랑 노래
느리지만 계속 자라는, 우리 첫째의 초등 입학기 1
어떤 고문도 이 만큼 아플까 싶게, 속이 따끔따금 따갑고, 눈물이 자주 고였던 2023년 3월. 그럼에도 특별히 이 봄은 죽기 전, 살면서 가장 좋았던 열 장면을 꼽으라면 그 중에 한 장면으로 꼽히리라.
지금은 제제가 너무너무 걱정되고 아프지? 자식한테 이렇게 정성을 쏟고, 내 몸과 시간을 다 던져 넣는 게, 내 인생만 놓고봤을 땐, 조금 아깝기도 하고 말야. 근데 있잖아. 이 나이가 되면, 자식이 얼마나 잘 커 있나가, 인생 성적표더라. 부모된 사람들은 다 그렇더라고. 얼마나 많은 부와 명예를 쌓았냐 보다, 내 울타리 안에서 나를 보고 자란 내 자식들이, 얼마나 세상 속에서 조화롭게 잘 살아가고 있느냐, 하는 것 말야. 아이들이 결국 나라는 사람을 모델 삼아, 세상으로 자라 나가는 거니까. 거기에 조금 투자하고 있다고 생각해봐. 아주 중요한 일에 에너지를 쏟고 있으니, 내 인생이 덜 아까울 꺼야. 그리고 이 힘듬은 생각보다 금방 지나가 버린다. 그만큼 지나고나면 아쉬운 시간이라는 거지. 그러니 이때 아이랑 좋은 기억을 사진첩에 차곡차곡 쌓아 넣는다고 생각해보면 참 좋을 것 같아. 이 녀석이 나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할까 보다는, 요놈이랑 나랑 아주 재밌게 지지고 볶을 수 있는, 농도 깊은 사랑의 시간이네. 하고 생각해 보면, 지금보다 더 깔깔깔, 알콩달콩 재밌을 순 없나, 하는 행복한 고민으로 발전도 되고 말야.
입학하고 우리 제제가 힘든 일주일을 보내는 동안, 받았던 가장 따사로운 위로의 말이었다. 언제나 손자와 온몸으로, 진짜 신이나서 재미나게 놀아주시던 이웃 할머니의 말씀이었다. 그것도 아주 흔쾌히. 자식에게 흔쾌한 사랑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신 어르신의 말씀은 내게 큰 감동이었다. 두 아이 육아에 대한 피로감이 잦은 나에 비해, 할머니는 손주를 보시는 몸과 마음이 언제나 가볍고 경쾌하시다.
나는 연년생 둘 아이 주6일 혼자육아가 언제나 버겁다는 생각이 먼저였고, 모성애가 내겐 없는 것인가 돌이켜보기도 하는, 죄책감이 많은 엄마다. (물론 죄책감 육아가 안 좋다는 건 알지만) 그러던 중, 친정어머니께서 고백해주셨다. 나도 타고난 모성애는 별로 없어. 부모라는 의무감으로 자식한테 대하는 거지. 그래도 넌 나보다 나은 것 같은데, 하시며 셀프디스겸 위로도 건네주셨다. 엄마도 외손주로 인해 속아파하는 딸이 못내 아픈 걸로 봐서, 모성애가 없지 않으신 건데. 타고난 성정이, 아이를 아주 예뻐하는 편은 아니라는 말씀일테다. 사랑이 때마다 다른 형태일 수 있지만, 보다 고운 형태이고 싶다는 생각을 이 봄, 할머니를 통해 하게 되었다.
3월 첫째 주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써야할까. 아무튼 결국 사람 이야기다. 어찌해야할 지 몰랐던 새로운 세계에 놓여, 자기도 모르던 자신과 맞딱뜨려 당혹스러웠던 제제(여러가지 형태의 퇴행, 이를테면 언어 틱 등)는 이내, 친구들에게서, 귀엽고 함께 해주고 싶은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다. 제제와 나는 언제나처럼, 좋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위기를 신나게, 무엇보다 활짝 웃으며, 언제나처럼 감격해서 자주 울기도하며, 극복해나가고 있다.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 나라는 존재가 언제나 번듯할 수 만은 없지 않는가. 모자라지만, 곁을 함께할 이로서 한쪽이 조금 더 큰 언덕이 되어주기도 하는 것이 사랑일 수 있음도 배운다.
제제가 아니라면 이 기쁨을 어찌 알았을까 싶다. 친구 대하는 게 아직은 꽤 어려운 우리 아이에게, 먼저 와서 말 걸어주는 친구들의 반짝이는 얼굴과 이름의 예쁨을 말이다. 제제가 잘 챙기지 못한 가방을 흔쾌히 옆에서서 걸어오며 같이 들어주는 친구의 손을, 나는 이 고마운 손길과 눈길을 알 턱이 없었을 것이다. 모두 다 가지지 않아서 알게되는 기쁨. 겨울 빈 땅에서 솟아났기에 그 생명력이 더 신비한 봄 새싹처럼.
이웃 할머니 말대로, 금세 지나가고 있나보다. 3월 마지막 주에 나는 벌써 감사한 이름을 30명도 넘게 호명하고 있다. 연말 연기대상 시상식 여배우처럼, 잊은 스탭의 이름은 없을까 돌아보게하는 이 든든한 봄의 사람들을 오래 추억할 것이다.
금요일 하교 후, 학교앞 공원에 울려퍼지는 가위바위보 소리. 우리 제제가 그 틈에 서서 팔을 흔들며 이겼다! 하며 눈이 없어지게 웃던 그 시간을, 어찌 잊을까. 엄마랑 아빠랑 동생이랑 수백수천번 연습했던 그 눈물의 가위바위보를 혼자가 아닌, 친구들과 신나게 함께라니. 엄마는 제제로 인하여, 또 이렇게, 좋아서 자주 운다.
물론, 제제는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 자주 혼자 놀고, 친구의 부름에도 멍할 것이고, 바로 응답하지 못해 허둥지둥 하다보면 친구 얻기도 다소 어려울 것이다. 수백명 친구들이 곁에 있어도, 홀로 서 있을 시간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분명히 자랄 것이다. 음식물을 받아들인 몸이 그 영양분을 누수없이 아이가 자라는데 다 쓰는 만큼, 아이의 사회성도 적당히가 아닌, 날마다 최대치로 자라리라. 그리고 그 곁에 있는 나도, 다소 혼자인 아이들에게 한마디 말을 더 보태는 어른이 되어 갈 수 있기를. 보다 어려운 육아를 하는 아이 엄마들에게 따스한 이웃이 될 수 있는 어른으로 한 뼘 자라갈 것을 믿어 본다.
봄날의 햇살같은 우리 모두를 생각하니, 때론 울지만, 동시에 문득문득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