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무엇이 되고 싶은, 제제엄마의 처절한 자아 찾기 여정
제제는 요즘 주3회 영어학원을 간다. 학교에서 1시 20분에 하교해, 집에 와서, 입에 간식 하나를 물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양치까지 하고 집을 나선다. 집을 나서는 시간이 1시 43분 이전이어야, 1시 48분 버스를 충분히 탈 수 있다. 그런데, 제제는 요즘, 자꾸만 집에 늦게 나타난다. 하교길에 고양이들을 만나고 오기 때문이다. 제제는 배가 고프면 괴로운 아이다. 게다가 공중화장실 냄새나 차가운 변기 등을 힘들어 해, 집에서 편안하게 화장실에 가야하고, 복용하는 약 때문에, 피부가 마르기 때문에, 입냄새나 머리 냄새가 나는 편이라, 양치를 꼭 해야하고, 좋은 향이 나는 제품을 두피 쪽에 발라주어야, 귀가하는 4시 20분까지 제제도, 나도 마음이 편안하다. 가뜩이나 친구 사귀는 일이 힘든 제제인데, 친구들에게 안 좋은 인상을 주는 일은 아무래도 마뜩지 않다.
제제는, 귀가시간이 점점 늦어지더니 이제 1시 40분쯤 집에 나타나는 것이다. 급기야 나는 학교 앞에서 제제를 기다려, 데리고 오기로 했다. “엄마 저리 가! 나 혼자 갈거야. 나 이제 3학년이야. 혼자 갈 수 있어.” 내가 나타나면, 나를 째려보며, 나를 꼬집고 때리기까지 하는 제제. 눈물까지 흘리며, 제제는 나를 세차게 밀어낸다. 내가 그토록 기다리던 독립의 3학년이 왔다! 소리에 민감한 제제였기에, 피아노 학원은 절대 다니지 않겠다더니, 또래가 동네 피아노 학원 가방을 들고 혼자 왔다갔다 하는 게 부러웠는 지, 피아노도 등록해 달라더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잘 다닌다. 피아노 학원이, 길고양이들의 아지트 바로 앞인 것도 큰 이유다.
나는 제제가 나를 세차게 밀어낼 때마다 서운함에, 걱정되는 마음에, 사람들 보기 부끄러운 마음까지 더해져, “제제야, 너는 교실에서 세상 나이스한 사람인데, 길에서는 이렇게까지 사람들에게 화난 모습만을 보여야 겠니?” 나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나는 제제를 먼저 가라고 하고, 뒤에 서서 한참을 숨어 있다. 그러나 제제는 계속 가던 길을 돌아와, 나를 찾아내 역정을 내고, 다시 걷다가, 내가 보이는 것 같으면, 또 멈추고, 눈을 흘기며 울다 보니, 학원 차를 타야하는 1시 43분에 집을 나서는 일이 더 어려운 형편이 됐다. 물론, 내가 학원까지 차로 데려다 줘도 된다. 그렇지만, 제제는 3학년이니까, 아기처럼 엄마 차를 타기도 싫다는 것이다. 이렇게 민망한 실갱이를 하고, 우리 아파트 울타리를 통과하던 순간이었다.
“제이야 안녕!” 제이는 언제나처럼 대답이 없다. “............” “제이야 잘가!” 앞서 걸어가던 제제가 제이를 혼자 부르고, 혼자 인사를 하고, 멀어진다. 나는 또 제제에게 간섭이 하고싶어지고, 화도 나기 시작했다.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이런 일에, 나의 소중한 에너지를 쓰지 않아야 하는데 말이다.
제이는 지난해 제제와 같은 반 친구였기에, 이미 수 백 수 천 번 같은 일이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상냥하게, 제제 편을 들어주고, 상대를 이해하는 말을 제제에게 건네왔다. 그런 나는 그날 어디 간 것인지. 나도 모르게
나의 최고 분노 게이지까지 스스로를 맡겨 버렸다.
“제제야, 다시는 제이한테 인사 하지마! 사람이 인사를 하면, 받아줘야지. 단 한 번도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사람한테는 인사 안 해도 돼! 아니 아이가 인사를 안 받아주면, 어른이 나서서, 인사를 하라고 가르쳐야지.
잘 났어 증말!”
제이와 제이 아빠는 멀어져 가고 있었지만, 나는 죄없는 제제를 다그쳤다. 제제는 그만 울음이 터졌다.
“엄마, 미안해. 다시는 인사 안 할게!”
“그래, 다시는 인사하지 마. 알았지?”
그보다 험한 말도 얼마든지, 내 입에서 뽑아낼 수 있을 것 같은 날이었다. 그런 일의 끝은 언제나처럼 내가 한없이 미워지는 일뿐일 텐데도 그날 나는 그랬다. 나도 알고 있었다. 제이라는 친구가 수줍음이 많은 친구라는 사실. 표정도 거의 바뀌지 않는 친구이기에, 인사할 수 없는 어떤 식의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었다.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는데도, 그날의 나는 분을 삭이는 일이 여느 때보다 어려웠다. 재이 아빠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나를 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나의 임계치를 넘어, 그 순간 터진 것이리라.
짐을 쌌다. 도저히 이 마음으로 서울에 있고 싶지 않았다. 마일리지로 그날 바로 출발가능한 여행지는 제주도 뿐이었다. 나의 또 다른 뇌관이 곧 터질 것이고, 이대로 손놓고 볼 수만은 없었다.
제제는 언어치료 대신, 집에만 오면, 구석에서 그림만 그려, 고립되려 하는 것을 막아야 했고, 그것을 위해서는 좋은 말동무가 필요했다.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수학 공부방을 해오시던, 아이를 다 키운 분이, 동네분의 소개로 올해 초부터 우리집에 오게 됐고, 아이들은 그녀를 할머니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요즘 제제는 집에 오시는 할머니 선생님에게 “언제 가실 거에요? 수학 공부하기 싫어요. 이제 그만 가세요.”라고 하는가 하면, 제제가 너무나 사랑하는 아빠에게 “내가 좋아하는 학원들도 다 그만둘게, 아빠 이제 집에 제발 일찍 와!”라고 하며, 아빠에게도 시위를 시작했다. “공부 싫어. 숙제 싫어. 아빠 오면 아빠랑 할거야.”를 매일같이 말했다.
수수 역시도 “할머니 선생님 못 오시게 해. 나는 집에 오면 공부만 해야하는 1학년으로 살기 싫어. 아무 옷이나 입고, 아무렇게 누워 책만 보고 싶어. 언니가 선생님이랑 공부하면, 나는 안 편해. 엄마랑 할머니 선생님이 계속 나한테 레이저 쏘는데, 마음이 편하겠어? 제발! 가족 아닌 사람이랑 이제 한 시간도 같이 있기 싫다구.” 이런 말들을 할머니 선생님 앞에서 계속 쏟아내기까지. 아이들의 시위의 강도는 날로 세져 갔다.
그랬다. 나는 수수 눈치를 여전히 살피며, 선행 영어학원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수수가 숙제를 하는 동안 제제도 공부하기를 바랐고, 둘다를 혼자 공부시키기엔 어려움이 있다고 생각했다. 강남의 초등 수학 최고 심화과정 학원인, 황소수학을 가기 위한 준비 학원격인, 사고력 수학학원을 6세부터 다녀온 수수에게, “이제 그만 다니자!”라고 말하는 데, 나는 2년이 걸렸다. 제제 대신 수수를 잘 키워야 한다는 마음으로부터 내가 완전히 손절한 이후였다. '대치동 수학'이라는 것이, 수능 전에 고등 수학을 여덟 바퀴 돌리는 것이 목표이며, 그러려면, 초등 5학년 때 중등 수학이 끝나야 한다는 말을 듣고 나자, 완전히 정리가 됐다. 대신, 수수는 집에서 연산만을 나와 꾸준히 하기로 했다. 그러나, 수수가 영어는 좋아한다고 생각했기에, 영어 선행은 놓지 못하고 있었다.
큰맘 먹고 나는, “수수야 오늘부터 영어학원 그만두자. 그리고, 집 앞에 영어도서관 다니자. 너 원하는대로 마음껏 책읽는 올바른 초딩생활 한 번 해보자.”라고 제안했다. 그러자 수수는 “일단 어렵게 합격한 게 아까우니까, 게다가 다른 영어학원 가려면, 무조건 시험을 봐야할 거잖아. 그것도 너무 귀찮아. 2주 쉬는 제도를 활용해 보자! 그건 되지? 그 2주 안에, 월말 작문 시험, 반을 승급할 수 있는 중간고사도 안 쳐도 되니까, 그것만 해도 나는 한숨 돌릴 수 있어. 쓰기 싫은 작문은 한 번씩, ‘drop in’ 제도를 통해, 시간 벌어가며 다닌다면, 다른 과목은 또 다닐만은 해. 그리고 더 쉬운 영어학원 가면, 반 친구들이 자꾸 바뀌는 게 너무 번잡해. 분명 더 높은 학원으로 옮겨가는 친구들이 신경 쓰일 거라구. 적어도 지금 친구들은 웬만하면 계속 유지하잖아. 난 그런 점은 또 좋아. 더 다녀볼게.”라는 대답을 해왔다.
그리하여, 나는 수수를 정말 팽팽 놀게 해주며, 할머니 선생님마저 휴가를 드려, 오시지 않게하는 가운데, 몇 일을 살다보니, 집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고, 제제는 그림만 그리며,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수수가 아무 학원도, 방과후 수업도 하지 않고 12시, 1시에 학교에서 나오면, 10시간을 쫓아다니다 보니, 나는 체력이 완전고갈 되었다. 책 한 자 읽을 시간도 나지 않았다. 온전한 나의 시간은 거의 없었다. 사실, 수수가 주2회 2시간 20분 영어학원을 갈 때, 나는 완전히 자유해서, 책 읽고, 글쓰기도 할 수 있는 시간을 누렸다. 그 시간을 포기하고, 수수 뒤만 쫓아다니니, 숨이 턱 막혔다. 앞으로 남은 일주일 역시, 매일 수수에게 10시간씩 쫓아다닐 바에는, 나도 좀 즐거워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왕 노는 거, 남편은 결코 쓰지 않고 쌓인 채 없애기만 하는, 마일리지를 털어서, 제주도를 가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벌써, 제제, 수수와 셋이서만 제주도를 간 게 네 번째가 되었다.
다 놓고, 우리는 일단 떠났다. 떠난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은 없을 테지만. 하던 도박을 그만 두려면, 다른 도박판을 기웃거릴 게 아니라, 도박판을 확 뒤집어 엎어야 할테다. 이쯤 되니, 자식이라는 존재는, 내가 어찌 잘 한다고 되는 존재가 아님을 받아들이게 됐다. 이리 저리 몸을 틀어보아도, 사방이 막힌 것 같았다. 앞이 막히면, 완전히 돌아서서 걸어야 할 것이다.
제제와 수수는 같은 메시지를 나에게 계속 전하고 있었다. 그 메시지의 본질을 내가 피하지 않아야 할 것이며, 그리고 내가, 내 인생에게 원하는 것또한 무엇인지를 알아야 했다. 사실 제제는 하루 1시간 정도 하는, 세 자리수 나누기 한 자리가 요즘 부담스러워졌다. 그리고 두 아이 모두 엄마 사랑이 필요했다. 제제는 굳이 공부를 해야한다면, 엄마나 아빠와 하고 싶었다. 아이에게 영어학원에, 피아노, 특수체육, 미술/보컬 방과후 등 거의 매일 6시 즈음 끝나는 일상이 벅찼던 것 같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제제가 선택해서 시작한 루틴이다. 그런데, 하루의 집중력을 다 쓴 시간에 내키지 않는 수학까지 해야하는 일상은 너무나 고단했을 것이다.
제제는 수학공부가 하기 싫고, 수수역시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둘은 모두 엄마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했다. 하지만, 나는 늘 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고. 남편은 최선을 다해 일터를 지켜야 한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가능한 묘안이 필요했다.
“제제 어머니, 혹시 일 시작하셨어요? 아직은 제제가 엄마 손길이 많이 필요해요.
일 시작하시면 안 되실 것 같아요.” 1학년 담임 선생님의 말씀이 십분 이해가 되면서도,
“왜요? 저는 언제까지 제제 엄마 말고, 다른 무엇으로 살면 안 되는 걸까요?”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꿀꺽 삼켰다. 그건 내가 나한테 늘 하는 말이기에. 17개월 터울 아이들을 낳아 놓고도 늘, 어떤 일이든, 일을 갖고 싶었다. 나를 증명하고 싶은 마음, 나는, 내가 세상에 있다는 그 마음으로 가득차서 살아온 사람이었는데, 연년생을 기르며, 더구나 제제 엄마가 됨으로, 그건 오랜 시간 사치였다. 인간은 누구나, 다소간 나르시스트적인 자아가 있어야, 살아있는 자로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잠시라도 제제를 누가 돌봐주면, 나는 세 명 몫의 인생을 살다가 잠깐이지만, 멈춤 버튼을 작동할 수 있다고 느껴졌다.
내가 ‘제제 엄마로만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견딜 수 없는 날에는, 금 시세를 따져, 사고 파는가 하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기업들의 가치, 요즘 어떤 산업이 가장 첨단을 리드하는 지 알고, 거기에 돈을 넣고, 응원하며, 그 기업이 잘 되기를 기도하며, 주식 투자를 통해, 하루 단 얼마라도 벌어야, 내가 여기, 세상에 존재하는 생산적인 사람처럼 느껴져, 하루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가치가 상승할만한 물건을 샀다가, 파는 당근거래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오늘도, 그 언젠가 90만원에 구매했던 목걸이를 120만원에 팔고, 그 돈을 내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기업의 미래를 응원하며, 주식을 샀다. 오늘도 내가 죽지 않고, 여기 살아서, 누군가와 연결이 되면 그보다 족한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제나처럼 여행은 옳았다. 몸은 고단했지만, 우리는 보다 더 똘똘 뭉쳤고, 눈앞에 펼쳐질 하루를 의무감이 아닌, 함께함의 즐거움이라는 목표 아래, 같이 설계하고 살 수 있었다. 인생이 복잡한 이유는 너무 멀리 보고, 너무 많은 염려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오늘 뭐 먹지? 내일 여행도 망치지 않게, 좋은 컨디션을 위해 어서 잠자리에 들자’ 정도의 단순한 기준만으로도 충분히 웃고, 살만한 하루하루였다. 여기에 더해, 너무 많은 타인들의 기준 역시도, 떠나서 바라보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게 느껴졌다. 나를 소중히 하지 않는 사람은, 그저 지나가는 사람 1,2,3일테다. 여행중에 만나고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는 사람들처럼.
길 위에서, 우리는 자유해졌고,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회복해 가고 있었다. 조금 더 친해져서 돌아왔기에, 자신이 사랑하는 삶의 가치에 대해 보다 명료하게 서로에게 말해주게 되었다. 수수는 정말 많이 울고,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다. “사랑해 수수야. 언니에게만 엄마가 마음이 늘 바쁜 건 아니야. 네가 울어야지만 엄마가 너를 돌아봐주는 게 아니라, 너가 너임을 증명하지 않아도, 엄마는 수수 너가 소중해. 아무 이유 없이도 너는 사랑받아 마땅해”라고. 더 많이 말해주어야 하는 일이었음을 알게 됐다.
“아빠는 2045년에 나랑 미국 간대. 2055년에 나랑 로마 가고. 지금은 안된대.” 너무나 사랑하는 아빠와 함께 여행할 수 없음에 아이들은 속상한 마음이 가득하지만, “아빠는 지금 바쁘게 일을 하는 게 마음이 편한 시절을 살고 있으니, 그러라고 하자. 그게 아빠가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믿자. 그게 우리 마음에도 좋은 일이니까.”라고 나는 대답해 주었다. 세상에 없는 것을 있다고 여기며 사는 것만큼 끔찍한 일도 없을 것이다.
네 번째쯤 연달아 제주도를 가다 보니, 유명하다는 곳을 찾아 굳이 가지 않게 됐다. 그저 절벽이 아름다운 카페에서 반나절을 보내고, 그곳에서 처음 보는 노란 코스모스와도 사랑에 푹 빠졌다. 특이한 건축 양식을 가진 도서관에서도 반나절을 보냈다. 그 도서관 위에 펼쳐진 가을 하늘의 아름다움은, 제주도 어느 책에도 없는 절경이었다. 이런 외진 곳에 누가 책을 사러올까 싶은 곳에, 서점과 카페와 교회가 함께 있었다. 얼굴이 잘 생각나지 않는 선배와 뒤늦게 목회자가 된 남편분이 일군 공간이었다. 거기 사는 4인 가족이 퍽 부러워진 제제와 수수는 그곳에 사는 아이들처럼, 자연속에 자주 있고 싶다고 말했다. 섭지코지를 보러 가려다가, 낮잠을 자버려서, 뒤늦게 깜깜한 어둠 속에서 본 일몰 광경 역시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공주 침대에서 꼭 자야한다는 수수의 제안대로, 여태 가보지 못한 제주의 남동쪽으로 가다 보니, 아이들이 너무나 좋아하는 놀이터들이 많았다. 고구마와 어묵을 무한대로 준다는 호텔 수영장을 기대하며 가보니, 수영 장에서 제공하는 뜨끈뜨끈한 치킨 한 마리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맛이 일품이었다.
아이들이 잘 놀때마다, 나도 충분히 쉴 수 있었다. 그 시간에 나는 꼼짝없이 독서할 수 있었고, 인생 그림책들을 거기서 여러 권 만났다. 무엇보다 제제는 길고양이들을 스무 마리는 족히 만났다. 제제는 길 위에서, 엄마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챗쥐피티를 자주 활용했다.
“나누기를 빨리 못해도 괜찮아 제제야. 제제는 AI를 정말 잘 다루잖아. 챗GPT가 제제의 웬만한 질문들에 솔루션을 줄거야. 엄마는 AI 관련 주식을 열심히 사모아서, 그것들이 더욱 제제 삶을 낫게 하기를 응원하고 기도할거야.”
오늘, 엘리베이터 안전점검 시간이 길어져서, 길 위에서 시간을 허비하게 되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두 시간 내리 운동장에서 아이들의 운동회를 지켜보다 와서, 목이 칼칼해졌다. 춥기도 하고, 한시 바삐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엘리베이터가 재개되길 기다리던 이웃 중에, 강아지와 너무도 다정한 대화를 나누는 분과 그 시간을 함께 보내게 됐다. 나는 이전과는 다르게 여행하는 자처럼, 이웃과의 사귐을 하고 있었다. 그는 뉴욕에서, 전세계를 무대로 비즈니스를 해온 80세의 남자 사람이었는데, 그 어떤 여자 어른보다도 대화가 즐거웠다. 코스닥과 나스닥을 거쳐온 그는, 비트코인 세계의 매력에 대해 알려주는가 하면, 주린이인 나에게 유용한 팁들을 전수해 주며, 즐거운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 어디에서도 듣기 어려운 40년 가량의 투자 전문가의 투자 여정을 우연히 들은 것이다. 나도 최근 AI 관련주에 대해 시간을 할애해 알게 된 이야기들을 그에게 들려주었다
여행하기 전이었다면, 입 꾹 닫고, 혼자 19층 나의 집까지 외로이 무거운 걸음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그분과, 강아지와 함께 계단을 오르다 보니, 19층도 금방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수없이 마주쳐온 이웃이었는데, 오늘 그 춥고 불편한 여정 위에 있지 않았다면, 결코 마주하지 못했을 대화였다. 인생의 모퉁이마다 이처럼 계획하지 않았던, 그전에는 보지 못했던 이면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 생각하니, 기대가 된다.
오늘도 처음 보는 제약회사들의 상한가를 보며, 나는 설렜다. 운영하던 에어비앤비를 정리하며, 꺾인 수입 그래프 만큼이나, 낮아진 자존감의 자리에, 나는 새로운 기업들을 알아가는 재미를 채워가고 있다. 그 회사들의 시가총액과 순이익 그래프와 부채율과 외국인 투자자들의 투자 움직임은, 열매 맺을 식물을 기대하는 농부의 마음같이 좋다. 열심히, 자기 분야를 키워가는 기업들을 알아보고, 응원해주며, 나도 부요해져서, 아이들과 계속 자연속에 있고 싶어졌다. 길 위에서, 우리가 진짜 원하는 인생을 알아가고, 혹은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진 채, 아무것도 안하는 시간 역시 맞이하기를. 우리의 삶을 타인들의 길에서 찾지 않고, 내 길을 나만의 길로 만들어 가는 제제와 수수와 내가 되기를. 완벽한 준비가 없어도, 충분히 괜찮은 매일을 일궈가는 우리 자신을 만나고, 그런 자신을 존중해가는 우리가 되기를. 다음에는 더 길게, 조금은 더 먼곳으로 걸음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엄마 혼자 아이 둘과, 떠난 네 번째 여행일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