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일기

2020. 10. 25 일

by 홍석범

하루 종일 아키캐드를 붙잡고 있으면서 조금씩 연산적 사고방식에 익숙해지고 있다. 바닥과 벽, 지붕과 같은 구조체들이 요긴하게 분류되어 있고 각각의 모양은 몰프 툴로 쉽게 변형시킬 수 있다. 프로그램이 똑똑해서 이것저것 시도하다 보면 어느 순간 오류가 알아서 해결될 때도 있는데 문제는 내 머리가 이 프로그램보다 똑똑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래스호퍼 워크숍에서 함자는 프로그램을 잘 다룰 수 있기 위해서는 그 프로그램의 본성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말을 했었다. BIM은 건물의 모든 요소를 구체적으로 정의하기 때문에 거의 오차가 없는 콘크리트 물량을 사전에 알려주는 등 실무 전반에 걸쳐 실제 건물을 대변하는 중요한 데이터가 된다. 그러나 학생 수준에서 사용하는 대부분의 모델링 프로그램은 정보가 제외된 이미지 메이킹 용으로 지금까지 개인적으로 그 부류의 것들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이유는 단순히 심미적인 이유에서 렌더링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울하게도 현재 학생들 포트폴리오의 절대다수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 포토리얼리스틱한 렌더링 이미지들은 내가 느끼기에 아무런 깊이가 없고 보기에도 천박하다. 그런 이미지는 페이지가 펼쳐지자마자 빛을 잃는데 애초에 시간을 들여 자세히 볼 게 없기 때문이다. 렌더링은 특히 학교에서 제일 지양되어야 하는 가장 저급한 수준의 사실주의를 표방하며 나는 오블리크 드로잉을 원근법 드로잉보다 훨씬 선호하는 이유에서 마찬가지로 렌더링보다 그 외의 거의 모든 다른 표현법을 선호해왔다. 비슷한 의미에서 신 교수님은 언젠가 원근법 드로잉은 가장 비건축적인 표현 기법이라는 지적을 한 적이 있다. 원근법은 (렌더링 역시) 건축의 대상물을 보이는 모습에 충실하게 재현하는데, 그것은 건축가의 인식이 아닌 대중의 인식이기 때문이다.


원근법은 사진으로 귀결되었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다시 사진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탈 원근법이 발견되었다. 렌더링은 가장 지루한 종류의 사진으로 존재하지 않는 프로젝트의 그럴듯한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주는데 사이비 현실을 선전하는 것이 주목적인 이미지의 경우 잘못 이해된 ‘원근법’주의, 즉 단순히 눈 앞의 것을 재현하는 사진의 일차원적인 기능만을 표방하게 될 것이다. 실제 원근법주의는 보편성과는 반대되는 개념으로 외견상의 그럴듯한 재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인식 주체, 말하자면 내가 그 사물을 어떻게 보는가를 드러낸다. 그러나 대부분의 렌더링은 반대로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또는 보여질) 익명의 이미지를 드러낸다.


사진이라는 신기술이 처음 보급되었을 때 벤야민은 블로스펠트가 식물을 근접 촬영한 사진집에 대한 논평에서 사진은 우리에게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것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들의 미의식뿐만 아니라 인식 자체를 바꿀 것이라고 예견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블로스펠트는 식물학자도 사진가도 아닌 조각가였는데 일종의 예술적 배치 형태의 목록을 만들기 위해 식물들의 유기적 구조를 기록하길 원했다는 것이다. 그의 사진 스타일은 마치 정교한 라인 드로잉과 같은 효과를 내고 벤야민의 말대로 그것은 우리가 알던 식물을 전혀 새롭게 보도록 했다. 호크니는 사진기는 사물을 순수하게 기하학적으로만 본다고 말했는데 그는 몇 장의 인물이나 풍경 사진을 마음대로 연결해 하나의 콜라주를 만들거나 모터 드라이브가 달린 카메라로 연속 촬영한 사진들을 오려 붙여 한 장의 거대한 탈 원근법적인 사진을 만들었다.



이 툴을 가지고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은 사이비 현실이 아닌 오로지 사진기만을 통해 볼 수 있는 라인 빌라의 어떤 모습이다. 이 건물은 지어지지 않을 것이고 바로 그 측면에서 렌더링은 사진기를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여기서 실제 사진가와의 차이점은 나는 내가 원하는 결과물을 소급적으로 ‘찍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미지를 조작하기 위해서는 내가 사진을 찍을 때 얄팍하게나마 활용할 줄 아는 기술들을 접목시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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