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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앙가주 Dec 19. 2022

그 여름날(3)

짧은 창작 소설


 약속 당일 민우와 나는 둘이서 먼저 부산역에서 만났다. 더위가 시작되는 6월의 태양은 지면으로 뜨거운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구름도 태양을 피해 어디론가 가버렸는지 자그마한 그늘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손으로 훔쳐내며 근처에 시원한 카페라도 들어가자고 했지만, 민우는 오랜만에 부산에 내려왔으니 이 도시의 최신 트렌드를 느껴봐야 한다며 가장 번화한 곳으로 가자고 주장했다. 오늘 기온이 몇 도인줄 아냐며 짜증을 내려다 에어컨 바람을 쐬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에 일단 녀석의 의견에 동조 후 택시를 잡았다. 택시 안의 에어컨 바람 덕분에 몸속 더위가 잦아들자 나는 우리가 이미 트렌드와 멀어진 지 오랜데 그런 곳을 왜 가냐며 불평을 쏟아냈지만 우리는 이미 번화가에 진입한 상태였다. 


 목적지에 도착 후 택시에서 내려 거리를 둘러보다 보니 젊음의 기운 같은 것이 어렴풋하게 느껴졌다. 활기 넘치는 사람들이 내뿜는 생동감 같은 것이 나에게도 전염이 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신이 나서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더위에 지쳐갔지만 아랫배에는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얼마간의 시간을 그렇게 보내다 보니 차가운 커피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주위를 둘러보다 루프탑이 있는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아이스커피를 주문한 후 옥상에 마련된 테이블에 앉아서 커피를 마셨다. 테이블 위에 설치된 파라솔이 해를 가려 그늘을 만들어 주었고 옥상으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옷 안으로 들어와 땀을 식혀주었다. 민우는 이렇게 시원한데 진작에 카페를 오자고 하지 않았냐며 장난스럽게 쏘아 붙였다. 니가 먼저 말을 하지 그랬냐며 되받아쳤지만 그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거리를 내려다보며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나도 녀석을 외면한 채 길거리를 내려다보며 요즘 회사 일은 어떠냐며 근황을 물었다. 


 “회사 일은 동심원이지. 지루하고 뻔한 동심원. 매일 동심원 그리며 산다.”

 적절한 비유라는 생각이 들어 슬며시 웃음이 났다.

 “연필로 종이 위에 동심원을 한없이 그리면 결국 종이 찢어진다. 가끔 다른 도형도 그리면서 살아.”

 “벌써 찢어진 종이가 수백 장이다. 다른 도형 그리는 법은 까먹은 지 오래다.”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민우의 목소리를 들으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위로할 말을 찾으려 했지만 내 머리 안의 서랍 속에는 그런 말들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고 커피가 얼마 남지 않은 잔만 바라보며 빨대를 손으로 돌려보았다. 

 “그래도 휴가 쓸 수 있는 거 보니 요즘에는 많이 안 바쁜 거 아니냐? 수민이는 휴가도 마음대로 못 쓰고 회사에 아예 손발 다 묶여 있던데.”


 나는 다른 친구의 불행을 통해 그를 조금이나마 위로하려 했다. 내가 예상했던 반응과는 달리 녀석은 자세를 고쳐 잡으며 미간을 찌푸린 채 진지한 얼굴로 최근에 고민이 생겼다며 말을 꺼냈다.

 요즘 회사 업무가 줄어서 편해지긴 했는데 회사 내에 입지가 점점 줄어들어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다고 했고, 이제 막 세 살이 된 그의 아들을 좋은 환경에서 키우기 위해 자신의 희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긴 고민 끝에 전도유망하지만 업무량이 많기로 유명한 부서로 자원을 했다고 했다. 그 부서는 월요일에 출근해서 일요일에 퇴근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악명 높은 부서였다. 나는 민우가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 헌납하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될까 봐 걱정이 되었지만 많은 날 동안 고민하고 어렵게 내린 그의 결정을 마음속으로라도 응원해 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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