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세대 게임 - 오찬호
어느 덧 나이가 40이 되었다.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나이를 줄여주었지만 내가 살아온 세월 자체는 줄어들지 않았다.
지금 이 나이가 되어 여러 사람을 만나다 보니 모임마다 나의 위치가 다름을 느낀다. 어떤 자리에서는 막내가 되기도 하고, 다른 모임에서는 제법 많은 이들에게 형 또는 선배님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 ‘꼰대 같다’ 는 소리를 듣다가도, 가끔은 ‘MZ스럽다’ 라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 상이한 곳에서 듣는 각각의 평가는 나라는 사람이 어울리는 세대는 어디인가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했다.
‘꼰대’, ‘N포세대’, ‘MZ세대’, ‘잘파세대’ 등, 세대를 구별하는 이러한 표현들을 만들어 낸 것은, 특정 세대를 지칭할 때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 하나의 묶음으로 얘기하는 것이 그 시대의 특징을 간단 명료하게 표현 할 수 있어 경제적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모호하게만 생각했던 세대 구분에 대한 이러한 나의 인식을 새롭게 정의하게 해 준 책이 ‘세대 게임’ 이다.
‘세대 게임’의 저자는 세대 간의 대결 구도를 형성하고 세대 게임을 조장하여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이익을 취득하는 무리들이 있으며, 대중들은 그들이 펼쳐놓은 게임장에서 서로를 적으로 인식한 채 싸움을 벌이고 있다고 말한다. 이들이 조장한 세대 게임의 진정한 목적은 대중의 시선을 다른 쪽으로 유도하여 우리에게 당면한 시급하고 실제적인 문제들로부터 시선을 떨어뜨려 놓는 것이라 말한다.
안타깝게도 서구의 공격 대상인 노년 세대를 한국에 그대로 가져다 쓸 수는 없다. 그들의 사정이 너무 처참하기 때문이다. 대신 한국의 세대 전쟁론자들은 기성세대를 그 자리에 세운다. 젊은이들을 착취하여 화려한 삶을 즐기는 기성세대가 공격 대상이다
인용한 글에서 알 수 있듯이, 수입된 세대 전쟁이라는 개념은 한국 사회의 상황에 맞게 수정함으로써 보기 좋게 정착했다. 아군과 적군으로 나누어진 대중은 의견의 사실 여부는 따지지 않고 의견의 발화자가 나의 편인지 아닌지, 오직 피아식별에만 모든 기운을 쏟는다. 진실이 무엇인지를 구별 할 수 없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숨가쁜 현대인들은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학교를 졸업하고 치열한 취업시장을 통과하고 간신히 얻은 아파트에 들어간 대출 이자를 갚기도 버겁다. 결혼과 육아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삭막한 현실에서 1인분의 삶을 책임지기에 급급하다. 그들에게 누군가의 사정을 헤아리려는 수고는 사치이다.
더 나아가 대중은 자신의 적을 손쉽게 사회 악으로 규정한다. 악은 이해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타인을 존중하는 태도에 드는 시간과 노력을 아낄 수 있다. 상대방을 손쉽게 악으로 지칭함으로써 서로를 거리낌 없이 비난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세대 게임은 완성된다.
선과 악의 구도 설정은 사안을 논박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든다. 도덕적으로 명확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박근혜 정부 당시의 촛불 집회를 사례로 들며 세대 게임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박정희 정부 시절,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낸 노년 세대는 스스로를 부강한 대한민국을 만들어낸 주역이라 자부했다. 하지만 진보를 지향하는 당은 젊은 세대를 지지층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 청년층을 지원하면서 반대로 노년 세대를 외면했다. 그러한 노년 세대의 손을 잡아 준 것은 박정희 정부의 계승자인 박근혜 정부이다. 박근혜 정부는 그들의 노고를 인정하고 껴안음으로써 노년 세대를 자신의 지지층으로 결집시켰다.
그 결과 노년 세대들은 자신들의 땀으로 일구어낸 성취를 박근혜 정부와 분리해내지 못하고 동일시하게 되었다. 그런 그들에게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태라는 초유의 사건은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이었다. 그러한 정부의 부정과 몰락은 그들 스스로를 실패자로 느껴지게 하기에, 현실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웠다. 명백한 증거가 나온 이 사태를 마주하면서, 노년 세대는 당면한 현실을 받아들이고 촛불 세력에 합류한 이들과 이른바 태극기 부대, 촛불에 대항하는 맞불 세력으로 결집한 이들, 두 집단으로 양분하게 되었다.
진실을 받아 들이지 못한 맞불 세력은 자신들의 선택에 대한 합리성을 찾기 시작했다. 그들이 취한 방법은 정보 편식이다. 뉴스와 증거는 조작되었고 박근혜 대통령은 이용당한 것이다 라는 편향된 정보를 진실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자신들의 논리를 견고히 하기 위해 그들은 서로를 지지하며 그들만의 세상에 고립되어 버린다. 결국 음모론을 진실로 굳게 믿게 되고 그들은 심리적 안정감을 찾게 된다.
이후 이러한 인지부조화를 겪고 있는 사람들을 끌어안아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유입하려는 무리들이 생겨난다. 대표적으로 반지성적 우파는 인지부조화로 고통받는 이러한 세력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영역을 넓혀 나간다. 트럼프 전대통령이 출마한 미국의 대선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찾아 볼 수 있다. 트럼프 전대통령은 ‘미국 제일주의’라는 슬로건을 통해 유권자들을 양극단으로 밀어냄으로써 대중들의 표를 이끌어냈다.
중요한 것은 유권자들의 감정과 기분이다. 그것이 사실 따위에 방해받으면 안 된다. 그들의 기분에 거슬리지 않는 메시지가 중요하다
기분을 망치지 않아야 진리로 용인된다. 그래서 독일의 논평자들은 새로운 시대의 진실을 “느낌적 진실”이라고 표현한다. 진실은 느낌이 좋아야 한다. 아니, 느낌을 해치는 것이 진실일 리 없다.”
저자는 책을 통해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자신의 생계와 밀접하게 와 닿지 않는 사회문제에 대한 판단을 미디어에게 맡겨 버린다고 말한다. 미디어는 대중의 지휘자 역할을 자처하며 사회 문제에 대한 기울어진 보도를 쏟아내고, 이어서 현상에 대한 판결을 내리며 재판관의 역할까지 전담하게 된다. 그 결과 개개인은 어떠한 사실에 대해 숨어있는 진실을 파악하려 들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느라 여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론이라는 조명이 비추어는 주는 곳만 바라볼 뿐 어둠 속에 감춰진 진정한 진실은 보려 하지 않는다. 그럴수록 대중은 설계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마리오네트가 된다.
대중은 정교하고 매끄러운 미디어의 영향 아래 놓이며, 자신의 신념과 사고의 번거로움을 포기하고, 모든 평가와 판단을 미디어에 양도한다
이러한 암울한 현실에서 책의 말미에 저자는 미디어에 휘둘리지 않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자신은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고,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 아니다. 이해 없는 맹목적인 비난은 각자를 더욱 더 고립시킬 뿐이다. 우리들 모두는 평범하고 시시한 개인일 뿐이다. 미디어와 설계자들이 우리의 눈을 가리기 위해 씌워 놓은 막을 거둬 낼 때, 비로소 우리는 조금이나 진실된 모습으로 서로를 볼 수 있게 된다.
고통스러운 진실이라 할지라도 용기를 내어 그것을 마주 보며, 자신이 현재 서 있는 자리가 어디 인지를 명확하게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상대방을 단순하고 거칠게 판단하기 보다는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한 인간으로 바라보고 이해해 보려 해야 한다. 이것이 선행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되고 우리에게 당면한 문제를 조금 더 심도있게 바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어려움과 훼방이 있을 것이다. 최근에 사태를 볼 떄면 더욱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 정부의 일본 오염수에 보이는 태도, 극우 유투버의 차관 임명 및 국방부 장관 후보 지명 등. 이해 할 수 없는 코미디 같은 상황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감추고자 하는 진실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 머리 속에 맴돈다.
나의 반대편에서 나를 비난하는 이가 아닌 그 뒤에 숨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회를 분열시키는 진정한 악은 누구일까 라는 고민을 하게 해준 이 책에 감사하다. 사회를 바라보는 눈을 확장시켜 준 이 책은 너무도 소중하다. 감추고자 하는 진실이 겹겹히 에어싸고 있는 지금 이 시대에 더욱 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