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창작 소설,2022 구미 문예공모전
아메리카노를 주문하자 원두를 선택하라는 아르바이트생의 대답이 돌아왔다. 원두에 대해 잘 알지 못해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지만, 어쩐지 쉽게 답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의 시큰둥한 시선이 나의 자격지심을 건드려서인지 어설프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고민하는 얼굴을 하고 미간을 찌푸리며 메뉴판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는 단어가 하나도 없었다. 최대한 자연스러운 얼굴을 애써지어 보이며 아프리카 어디쯤 있는 나라 이름의 원두를 말했다. 주문을 완료하고 한 층을 올라가면서 괜한 짓을 한 거 같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주위를 둘러보고 빛이 잘 들어오는 빈자리에 앉았다. 책을 읽기 위해 카페를 찾았지만 역시 책에는 손이 쉽게 가지 않았다. 책 대신 핸드폰을 쥔 채 짧은 동영상을 볼 수 있는 SNS에 접속했다. 내 인생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누군가의 인생들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한 남자와 여자가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는 무엇이 그렇게 재미있는지 연신 폭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있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둘은 영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순간 한국의 작은 도시에서 영어로 대화를 하고 있는 풍경이 주는 생경함. 내가 알고 있던 여자와 너무 닮아 느껴지는 익숙함. 양가적인 감정이 내 안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이내 당혹감이 찾아왔다. 내가 아는 그녀는 영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힐끔거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과거의 기억들이 노크도 없이 머릿속으로 침투해 들어왔다.
그녀를 알게 된 건 5년 전쯤이었다. 지인과의 술자리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쾌활한 사람이었다. 그것이 조울증의 한 증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자해를 했던 경험이 있었고 정신건강의학과를 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타지에서 일을 시작했다. 친구들은 부모의 돈으로 대학을 다니고 있었지만, 그녀는 부모에게 매달 생활비를 보내주었다. 다른 삶을 사는 친구들과 만나 나누는 대화는 서로를 연결해 주지 못했고 그녀에게 고립감만을 안겨주었다. 타지에서의 생활은 외로웠고 그녀는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다가온 남자들과의 연애는 잘 풀리지 않았고 그럴수록 그녀는 더욱더 기댈 곳을 찾아 헤맸다. 도착지를 찾지 못한 외로움은 질 나쁜 남자들과 유부남을 거치기도 했다.
우리 둘은 자주 술자리를 가졌는데 술을 마시면서 내는 그녀의 웃음소리는 독특했다. 비명에 가까운 웃음소리는 귀에 거슬릴 정도로 높은 음을 내어 나를 포함한 주위 사람들은 자주 놀랬다. 옆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불편한 시선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끔은 술을 많이 마시고 말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 일행들을 걱정시켰다. 복잡한 일에 대해서 질색했고 말과 행동은 언제나 즉흥적이었다. 화장과 옷차림도 과감한 편이였다. 방은 항상 정리가 되어 있지 않고 항상 화장품과 옷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자주 연락을 하곤 했다. 주변인들과는 다르게 잔소리를 거의 하지 않고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점이 그녀의 마음에 들었던 거 같다. 물론 나의 입장에서는 그녀를 억지로 통제하기보다는 지치기를 기다리는 편이 나아서 그렇게 한 것뿐이었다. 그녀와 몇 번의 잠자리를 가지기도 했지만 애인의 관계까지는 이어지지 않았다. 술로 채워진 각자의 열기를 상대방을 통해 발산할 뿐. 그 이상은 아니었다. 당연한 수순처럼 우리의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엷어졌다. 서로에게서 지속적인 매력을 발견하지 못했고, 대개가 그렇듯 시간이 지남에 따라 또 다른 인생으로 나아가면서 현재의 관계들은 소원해졌다. 이따금 지인을 통해 그녀의 소식을 조금이나마 들을 수 있었다. 회사에서 잘려 나와 고향으로 내려갔다는 얘기도 들려왔고, 자신의 인생에서 스스로를 잘라 냈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많은 소식 중 어떤 것이 진실인지는 알지 못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녀는 내 기억에서 멀어졌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걸어갔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짙은 청바지와 베이지색 셔츠를 입고 있었다. 왼쪽 손목에는 갈색 가죽 소재로 된 시계를 차고 있었다. 그녀는 회색 니트 원피스에 검은색 롱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다. 걸어가는 남자를 바라보다 잔을 들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정제된 여성미. 유창한 영어실력. 외모와 웃음소리는 비슷했지만 아무리 봐도 기억 속의 그녀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카페 안의 그녀는 여유가 있고 행복해 보였다.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인생을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자가 화장실을 다녀오자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출구 쪽으로 걸어갔다. 혹시나 하는 의심을 말끔히 거둬 낼 수 없어 나는 그녀를 다시 한번 유심히 살펴보았다. 살면서 익숙하게 받아온 남자들의 눈길에 대한 반응이었는지, 아니면 나를 알아본 건지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곤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고 그들의 등 뒤로 직원이 인사하는 소리가 들렸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숲을 바라보았다. 신이 던진 운명의 주사위가 결정한 두 여자의 인생에 대해 생각했다. 이유도 설명도 없이 누군가에게는 불행이 누군가에게는 행복의 운명이 당도한 두 여자의 인생에 대해. 민들레 홀씨 같은 행복이 우연히 내려앉은 인생을 살며 스스로가 이룩한 결과물이라 착각하며 인생을 긍정하고 있을 사람들. 성실히 살았지만 불행이라는 불청객을 만나 모질고 비참한 인생을 살고 있을 또 다른 사람들. 그들을 상상하며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눈을 떠 테이블을 바라보니 얼음을 머금은 커피가 보였다. 차가운 커피를 마시고 있는 나. 먼 곳 아프리카의 한 나라에서 태어나 뜨거운 태양을 온몸으로 견디며 커피 원두를 수확하고 있을 누군가. 우리 둘은 어떤 차이가 있어 이토록 다른 인생을 사는 것일까. 컵에 맺힌 물방울을 바라보다 불행이 비켜간 나의 인생에 새삼 감사해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커피를 옆으로 치워버리고 가지고 온 책은 다시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들어 연락처의 목록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다시 듣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