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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lues May 08. 2019

어둠 속에서

2019.05.09

번아웃 증후군 이후에 상황을 정의하는 의학 용어가 개발되었으면 좋겠어.
번아웃의 스무 배, 서른 배는 족히 넘는 고통의 시간을 정의할 어떤 말이
그러면 내 상황을 스스로 인지할 때에 조금은 더 쉽게 설명할 수 있을 텐데.

'힘들었던 어느 시간들을 회상하며 웃을 수 있는 지금'이라는 말을 했던
시절의 내가 많이 방심하고 건방졌구나 라는 생각을 했을 때는 이미
어딘가 끝인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둠 속 깊은 곳으로 하염없이 떨어지고 있을 때였어.

종교를 떠나 신이라는 존재는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을 주고,
더 강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 담금질을 한다는 내용.

나는 그 말을 생각할 때마다 더 강해지고 싶지 않으니 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
이 정도 담금질 만으로도 충분히 튼튼하고 멋진, 평생을 문제없이 잘 살아갈 수
있을 만큼의 모습이 갖춰졌다고 그러니까 그만 좀 하라고 울부짖었어.

볼이 새빨갛게 부어오를 정도로 뺨을 수천번 맞으며 이건 너무나 아프구나 생각이 들 때쯤
허벅지를 칼로 수백 번 찌르고, 결국에 총으로 발가락을 하나씩 쏘는 느낌.
그래서 충분히 힘들었던 상황이 맞았음에도, 나는 그 시간을 온전히 힘들었던 시간이라
부를 수 없음에 서글퍼하고 끝나지 않는 고문 속에서 그래도 희망을 믿고 웃음이
많았던 뺨 맞던 시절의 나를 그리워하고 있어.

그리고 살면서 절대 이렇게는 되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했던
예전의 나 모습을 그리워하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나 싫어서 몸부림치고 있어.

믿지도 않던 삼십 대의 지옥 같던 삼재를 이겨내며 그래, 삼재니까 그렇겠지 라는
합리화로 버텨온 시간의 끝엔 소위 말하는 대박이나 성공이 기다리지는 않아도
너무나 힘들었던 시간만큼의 상대적인 평온과 안정 정도는 찾아올 줄 알았어.
그런 생각 또한 건방짐이었어.

분명 모든 건 내 부족함과 잘못에서 출발했을 거야.
목표가, 기대감이 너무 커서 나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해 찾아오는 허무함이라 말할 수도 있어
하지만 누군가가 살아가며 한 분야의 일을 20년 가까이하며
수십 줄의 커리어를 잘 쌓아가면서도 여전히 20년 전과 똑같이
금전적인 상황에 허덕이며 헤매는 건 어디서부터가 잘못된 걸까
그렇게 바라던 내 이야기를 책으로 출간하는 꿈을 이루고도,
심지어 4달 사이 미리 준비한 두 권의 책을 출간해 놓고도
현실이 전혀 바뀌지 않고 시대와 트렌드에 도태되어 그저 그런 퇴물이 되어가는 기분으로
지금까지 해 온 내 모든 작품과 노력이 부정당하는 느낌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나는 쓰고 그리는 일을 평생 하고 싶었는데.
요즘은 그림을 그릴 수가 없어.
그런데도 이렇게 꾸역꾸역 무언가를 쓰고 있는 걸 보면 나는 참 잘 살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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