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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COMFY Aug 04. 2022

문어 지지마

코로나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



대학교 졸업을 목전에 뒀던 2014년 여름은 내 인생에서 가장 무덥고, 가장 우울했던 시기였다. 당시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거친 사회로 뛰어드느냐 아니면 졸업을 연기하고 대학생 신분을 유지하느냐를 사이에 두고 골머리를 앓았다.

현실을 직시하자면 졸업하자마자 내가 취업할 가능성은 없어 보였다. 매년 듣는 얘기지만 그해 유독 아프게 들렸던 ‘극심한 청년 취업난’이라는 뉴스도 불안감 조성에 한몫했다. 고심 끝에 ‘아무래도 졸업하고 백수 신분보단 그래도 대학생이 낫겠지?’라는 허울 좋은 결론에 이르렀고, 결국 졸업 연기를 신청했다. 하지만 실은 나는 아직 사회에 나갈 용기가 없었던 것이었고, 선택한 것이 아니라 도망친 것이 좀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내 선택에 자신이 없었다. 그것은 정답을 알 수 없는 문제였으므로 내 선택에 대한 불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졌다. 그렇게 커진 불안은 결국 내 미래까지 집어삼켰다.


‘빨리 졸업할 걸 그랬나? 취업 못 하면 어쩌지. 그러면 결혼도 못 할 거고, 나는 뭐 먹고살지? 나 제대로 살아온 걸까? 와, 내 인생 망했네?’


그날 이후 종종 자려고 누우면 암울한 미래가 오롯이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아서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런 밤에는 부모님에 대한 죄송함과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지 못했다는 실망감 같은 것들에 끊임없이 시달렸고, 결국 눈물로 베갯잇을 적시는 날도 더러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괴로운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나를 포함해 백수와 대학생 사이에 끼어버린 4명은 취업 준비 명목으로 매일 학교 도서관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모두가 같은 고민으로 괴로워하고 있던 터라 우리는 모이면 항상 누가 더 우울한지를 두고 경쟁했다. 대결의 끝은 4명 모두 우울한 패잔병이 될 것이란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결국 우울할 때는 술이 약이라며 우리는 맥주를 마시러 갔다.

당시 학교 주변을 배회하던 우울한 패잔병들은 우리만이 아니었다. 주점의 낡은 출입문 종소리가 멈출 새도 없이 패잔병들은 계속해서 모여들었다. 그러다 보니 처음엔 4명으로 시작했지만, 어느샌가 그 수는 늘어나기도 했다. 개중에는 나와는 달리 졸업은 했지만, 학교에서 취업 준비를 하는 선배들도 있었다. 하루는 옆자리에서 술을 먹던 한 선배가 우리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야, 너희 대학생 신분이 좋은 거야. 졸업하지 말고 버텨. 취업하고 졸업해.”


사실 선배가 말하지 않았어도, 우리는 버티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래도 선배의 말은 적어도 ‘우리는 틀리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안도감을 줬다. 그땐 술값을 내주는 것보다 그 한 마디가 더 힘이 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선배가 대기업에 취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날 우리는 술값도 안내는 형이었다며 선배의 쪼잔함을 안주 삼았다.


어려운 취업 시장 속에서도 가뭄에 콩 나듯 취업에 성공한 친구들이 있었는데, 이 친구들의 입버릇도 하나같이 학교에서 버티라는 것이었다. 화장품 회사에 인턴으로 취업한 한 친구는 대학생 때가 행복한 거고, 사회는 지옥이니까 거기서 버티야 된다며, 버티겠다고 제발 약속해달라고 했다. 쪼잔한 선배와 달리 친구는 '나는 돈이라도 받으면서 버티는 중이니까, 오늘  값은 내가 계산할게'라고 했다. 을 얻어먹고 나니 버텨달라는 친구와의 약속을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나는 열심히 버텼다. 그렇게 버티다 보니 운이 좋게도 어느 순간 취업까지 할 수 있었다. 같은 해 다른 친구 3명도 모두 취업에 성공했고, 그중 한 명은 얼마 전 결혼까지 했다. 직장도 못 구하고, 신부도 못 구해서 우리 가문은 우리 대에서 끊기게 생겼다던 그 4명이 말이다. 하지만 취업만 하면 모든 근심이 끝날 것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현실은 새로운 시련의 연속이었다. 인생에서 정답을 알 수 없는 문제들은 수시로 내 앞을 가로막았고, 선택 이후에 따라오는 암울하고 참담한 기분 또한 아무리 꼭꼭 숨어도 기어코 나를 찾아내 따라왔다. 그럴 때마다 학생 때가 좋은 줄 알라던 친구 말이 생각나곤 했다. 결국 인생은 버티는 것의 연속이라는 것을 매일같이 깨닫는다.


나는 대학생 때 느꼈던 그 우울함을 요즘 다시 느낀다. 아니 어쩌면 모두 같은 기분이지 싶다. 주말 오후 느닷없이 낮잠을 깨우는 윗집 공사 소리처럼, 예고 없이 들이닥친 코로나는 우리 일상을 마구 휘저어놨다. 매일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이 시간을 보내야 할까?’와 같은 질문을 다시 할 정도로 말이다. 9년 전 나는 그때 어떻게 고통의 시간을 버텼을까. 버틸 만큼 내가 강했던 것인지, 버티고 나니까 강해진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때 내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힘든 사람이 나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만나면 우울해지는 친구들도 버티고, 먼저 졸업한 선배도, 회사에 다니는 친구도 결국 버티며 산다. 소설 <데미안>으로 유명한 ‘헤르만 헤세’는 그의 시 <내 젊음의 초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때 내 앞에 비추어진 길은

나에게 많은 번민의 밤과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 길을 나는 이제 다시는 걷고 싶지 않다.


고매한 노벨 문학상 수상자도 결국 우리와 다름없이 번민과 괴로움을 버티며 살았다. 인생 난이도가 하루가 다르게 어려워지는 요즘이지만 그래도 우울한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도 꽤 힘이 된다.


End데믹인 줄 알았으나 눈 씻고 다시 보니 And데믹이었단 사실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는 요즘이다. 코로나가 앞에 있다면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 아이가’라는 장동건의 철 지난 유행어를 던지고만 싶다. 당최 끝나긴 할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우울한 시간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간절한 기도밖에는 없다. 우리가 겪는 이 고난이 곧 그리고 무탈하게 끝나게 해 달라는 악에 받친 기도 말이다. 내 기도가 언제쯤 먹힐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함께 버텨보자고 하고 싶다. 그 과정에서 힘들 때면 나 같은 사람도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으면 좋겠다. 모자란 나도 죽기 살기로 버티고 있으니까. 우리 모두 심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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