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깃털 도둑이다.
『깃털 도둑』(커크 윌리스 존슨, 흐름출판, 2019)
깃털이라면 패딩을 고를 때 오리털인가, 구스인가. 솜털과 깃털의 함량은 얼마인지 따지는 정도만 알고 살았다. 모피 코트도 관심이 없다. 아니 모피 코트 자체를 반대한다. 체온을 잃지 않기 위해 다른 생명체의 가죽을 벗기는 일은 차마 못하겠다. 반면 나는 육식을 즐긴다. 게다가 많이 먹는다. 그러면서 먹는 것엔 특별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참 이율배반적이다.
『깃털 도둑』(커크 윌리스 존슨, 흐름출판, 2019)은 소설이라 생각하고 읽었는데 한 편의 다큐멘터리였다. 저자는 2009년에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썼다. 난민 구호 활동가인 저자는 여행 중에 영국 자연사 박물관에서 16종의 새 299마리를 훔쳐 달아난 에드윈 리스트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된다. 잃어버린 새들이 인류에 얼마나 큰 가치가 있는지 깨닫게 되면서 사건을 파헤친다.
플루트 연주에 재능을 보여 영국 왕립음악원에 입학한 에드윈은 낚시에 쓰이는 플라이 타잉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는 플라이 타잉의 재료로 쓰이는 새의 깃털을 사기 위해 어릴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해왔다. 스무 살이 된 에드윈은 트링 박물관을 관람 후 희귀 새 깃털을 갖기 위해 ‘박물관 침입 계획’을 세운다. 그에게 필요한 건 손전등, 돌멩이, 철사 절단기, 장갑, 유리 커터기가 전부였다. 이것들로 그는 거짓말처럼 깃털을 훔치는 데 성공했다. 그가 훔친 깃털의 인류학적 가치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이제는 학자들이 정글에 가서 200년 전의 가죽을 대체할 만한 새들을 잡아올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잃어버린 표본들이 중요한 가치를 지닌 것은 그만큼 역사가 오래되었기 때문이었다. 표본은 지나간 시대를 압축적으로 기록한 일종의 역사서였다. 따라서 박물관에서 표본을 훔쳤다는 것은 전 인류에게서 지식을 훔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p.204)
거짓말 같은 이야기는 계속된다. 1년 후 그는 잡히지만 ‘아스퍼거 증후군’(자폐성 질환) 진단받고 이전 판례를 인용한 판사에 의해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는다. 사건 이후 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에드윈은 이렇게 말한다. “물건을 훔쳐 나온 곳은 개인이 아니라 기관이고, 그 기관은 이제 과학적으로 의미 있는 연구를 수행하는 곳이 아니므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p.318) 에드윈을 도왔던 롱 응우엔도 친구를 믿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저자는 누군가는 책임을 느끼고 자신들의 행위가 잘못된 것임을 시인해주길 바랬지만 그들은 책임을 회피했다.
이 책은 독자에게 두 종류의 질문을 던진다. 첫째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다. ‘깃털 도둑을 인간의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가’, ‘돈에 대한 욕망은 탐욕이고 예술에 대한 욕망은 열정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열정과 집착의 경계는 무엇인가’, ‘왜 인간은 오리지널에 집착하는가.’
두 번째는 인간이 만들어낸 법의 공정성에 대해 묻는다. ‘왕립음악원의 젊은 음악가라는 배경이 판결에 주는 영향은 없었나.’ ‘심신 미약으로 인한 감형은 피해자의 정신적 좌절은 배제하므로 반쪽짜리 인권보호는 아닌가.’ ‘전문가의 의견이라고 해서 모두 수용해야 하는가.’와 같은 질문이다.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아스퍼거 증후군 진단 덕분에 에드윈이 감옥행을 면한 사건 2년 뒤, 미국 정신의학회는 “19년간 독립된 장애로 분류되어왔던 아스퍼거 증후군을 삭제했다.”(p.331)
작가의 질문과 달리 나의 질문은 이렇다. 죽은 새의 입장에서는 어떨까? 새를 잡아 박제하고 수집하는 탐험가나 사물함에 보관하는 박물관 큐레이터나 그것을 훔쳐 플라이 타잉을 만드는 깃털 도둑이나 매한가지다. 과학적 발전을 위해, 인류의 지적 재산을 위한 활동은 모두 인간을 위한 가치다. 육식을 즐기는 나는 적어도 새 앞에서는 깃털 도둑을 비난할 자격이 없는 건 확실하다.
다만, 인간이 만든 법이나 규칙은 좀 더 양심적으로 개선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인간의 진정성은 오리지널 깃털로 만든 예술적인 플라이보다 성찰하는 능력에 더 가까이 있지 않겠는가. 처벌은 피했을지 몰라도 그로 인해 인간으로서 성숙해질 기회를 잃은 에드윈 리스트에게 유감을 표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