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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aopal May 09. 2020

인간이 되기 위한 수업, 그것은 대체

논란의 화제작, 인간 수업

 논란의 드라마, 인간 수업을 꽤나 빠른 시간 내에 정주행 했다. 논란의 이유를 알고 싶기도 했고 호불호가 많이 갈리기도 했지만 결국 내 스스로 의견을 정립하고 싶었기에.


 길티 플레져라고 해야 할까,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해야 할까. 최근 따라 범죄자에게 감정을 이입시키는 드라마 혹은 영화가 많이 등장하고 있는 것 같다. (대표적으로는 영화 '조커'가 있겠지) 결국 범죄자를 이해시키려는 목적보다는 사회를 비판하고자 하는데에 그 목적이 더 크겠지만 여전히 많은 논란거리가 있는 것은 사실. 


 내가 인간 수업을 보면서 기타 연출, 연기, 서사보다 더욱 알고 싶고 궁금해진 점은 '삼촌'이 가지는 사회에 속하고자 하는 열망이었다. 

 그는 남들과 똑같은 학교생활, 사회생활을 누리고자 돈을 벌어야 했다. 계산을 해보니 9,000만 원이 필요했던 상황. 그래서 미성년 성매매를 알선하는 일을 하게 되고 스스로를 삼촌이라 칭하게 된다. 

 당연히 왜 하필 미성년 성매매인가?라는 의문점도 없는 건 아니지만 그보다는 왜 그렇게 사회에 속하고 싶어 하는가? 에 대한 의문점이었다. 집 나간 엄마, 최하류 인생을 살고 있는 아빠. 

 그 부모를 보며 그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살기 위한 열망이 더욱 커다래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삼촌에게 이입이 더 안됐던 점은, 

 대학까지 가고 취직까지 하면서 사회에 어떻게든 속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반-사회적인 일을 통해 그 기반을 마련한다는 것. 

 그것이 모순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면서 흥미로운 지점이기도 했다.



 이 드라마에는 여러 다른 형태의 악인들이 등장한다. 선천적인 소시오패스로 추정되는 '배규리', 학교라는 작은 사회 안에서 그 명망을 유지하고 싶어 스스로 일진 남자 친구의 돈줄이 되는 '서민희', 여자 친구가 안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을 알지만 그녀에게서 받는 돈이 좋아 그를 묵인했던 '곽기태', 정의롭게 보이긴 하지만 결국 미성년자 성매매 일에 가담하고 있는 '이실장'까지. 

 누구 한 명에게 편을 들 수 없다. 각자의 사정이 어떻든 간에 말이다. 

 좋은 인물은 단 한 명도 없다. 


 오히려 조금 아이러니 한 점은, 제일 소시오패스적인 성향을 띄는 '배규리'가 주인공의 은밀한 사업을 알기 시작하면서 일은 더욱 뒤죽박죽으로 꼬이고 만다. 어쩌면 제일 타인에 대한 감정이 없는 배규리가 주인공이 벌이는 악한 짓을 어떻게든 밖으로 까발리려 발악하는 모습으로 보일 정도. 그녀가 개입되고 나서는 되는 일이 없다. 

 그래서 배규리가 최대 빌런으로 느껴지기도, 착한 관점에서 보면 그녀로 인해 지수에 대한 수사망이 점점 좁혀져서 잘했다고 느껴지기도. 여하튼 누구에게든 좋은 감정도 나쁜 감정도 들게 하지 않는다. 

 

 결국 인간 수업은 시청자로 하여금 직-간접적인 소시오패스의 감정상태를 강제로 이입시켰다고 해야 할까. 

 그런 의도였다면 대성공이라고 할 법도 하다. 


 그뿐만 아니라 최근 N번방 사건 때문에 가뜩이나 미성년 성범죄에 날카로워진 한국 시청자들에게는 더 많은 논란거리를 안겨줄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다. 물론 드라마가 만들어지는 특성상, 극본 작업, 수정, 연출 등 못해도 최소 1년 이상은 걸렸을 텐데 개봉을 이 시점에 한 것이 의도된 것인지 아니면 철저히 계약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의도가 어찌 되었든 논란을 증폭시킨 것은 팩트니 더욱 이입이 안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범죄가 탄생하는 데에는 수많은 이유가 있다. 영화 조커에서 처럼 정말 사회적으로 철저히 고립된 인간이 악이 끝까지 차올라 사회를 대상으로 복수하고픈 마음이 가득해서일 수도, 단순히 자신의 흥미를 위해서든 우리는 그 이유를 속속들이 알 수 없다. 지수가 자신의 조그마한 집을 끌고 다니며 평생을 살아가는 소라게를 자신의 분신처럼 아낀 것. 범죄를 저지르면서까지 사회에 그토록 속하고 싶어 했던 것. 그가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그토록 사회를 향해 울부짖고 있었던 모든 고성방가는 우리에게로 향해있다. 그리고 그 소음의 원인은 분명 사회에도 있을 테다. 


 이런 종류의 드라마나 영화가 나올 때마다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구조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할까. 범죄자를 욕하며 논란을 증폭시켜야 할까. 

 스토리와 인물을 배제하고 한국에서 이런 작품이 나왔다는 점에서 박수를 쳐줘야 할까. 

 점점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난감해진다. 


 소라게는 절대 자신의 집을 까발리지 않는다. 

 그곳에 숨기만 할 뿐. 

 소라게의 진정한 집은 어딜까. 자신의 등에 있는 조그마한 세상인가, 아니면 그것을 짊어지고 돌아다니고 있는 유리박스 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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