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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jc Nov 02. 2020

부부 싸움에 관객이 있다면

부부 싸움에 패턴이 있다면 이것은 고전 중의 고전일 것이다:

한 사람은 ‘문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남편)

다른 사람은 ‘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문제를 다룰 때 꼭 나오는 신경질이나 화 말이다. (나)

이제 화낸 사람이 자신을 화나게 한 것이 누구인지 물을 차례이다. (남편)

그럼 나 때문이라는 거냐고 반문한다. 설사 그렇다 해도 화내지 않고 말로 하면 내가 알아듣고 고치지 않겠냐고 말한다. (나)


거의 싸우지 않는 우리 부부도 얼마 전 이 패턴에 휘말리고 말았다. 너무 뻔하지만 집안일 때문이었다.

표면적으로는 한 사람이 불균형한 빈도로 더 자주 집안일을 하는 것이 문제처럼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더러운 상태’에 대한 각자의 허용치가 달라 생긴 일이었다.


그니까 나는 설거지를 남편에게 미룰 생각이 아니었다. 이번 끼니까지 먹은 다음에 몰아서 하려고 했거나, 싱크대 앞에 서기 전 조금만 더 빈둥대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는 동안 남편은 그릇들이 쌓여 있는 싱크대가 너무 신경이 쓰여 본인이 직접 소매를 걷고 뜨거운 물을 틀고 소설을 들으며 접시를 닦기로 선택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남편이 더 자주 설거지를 하게 되었다.

in the kitchen

내가 할까? 라고 물으면 남편은 일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쉬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 나는 남편 주변을 서성이며 조명을 낮추고 재즈를 틀고 시선이 닿는 곳에 꽃과 촛불을 놓아 (마치 마사지 베드에 엎드리면 구멍 아래 이국적인 꽃이 보이는 것처럼) 낭만적인 노동 환경을 조성해 주곤 했다. 이곳에선 남편의 설거지 시간이 일종의 명상 시간으로 재정의 될 것이라 믿으며 말이다.

이런 날들이 반복되자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도 설거지하는 남편의 한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남편의 조용하고도 시끄러운 짜증 표출 방식이 나는 불편했다. 애초에 설거지를 안 할 생각이 없던 나로서는 설거지를 미룬 대가로 남편의 눈치를 보며 마음 불편하게 쉬는 것보다, 차라리 당장 벌떡 일어나 넷플릭스 따위를 보며 그릇을 닦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란히 소파에 앉아 정면을 응시하며 서로가 왜 감정이 상했는지를 이야기했다.


남편은 자꾸 이야기하면 잔소리 같아서 그냥 내가 하고 말지, 할 때가 많다고 했다. 나는 그래도 얘기 해줬음 좋겠다고 했다. 이야기가 돌다 보니 무엇이 문제인지 헷갈려져서 나는 문제를 다시 정의했다.


그러니까 나는 ‘더러운 상태’에 대해 남편보다 무디기 때문에 내가 청소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시점은 남편의 이상적인 타이밍을 이미 지나서 이다. 이것은 우리 부부에게 주어진 불변의 조건이다. (이걸 바꾸려고 하면 사단이 난다)


남편은 나에게 부탁(?)하거나 잔소리를 하는 것보다는 본인이 하는 쪽을 택했고, 그래서 남편이 설거지를 거의 매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설거지하는 남편의 짜증을 듣느니 내가 잔소리를 듣고 설거지를 하는 편이 좋다.


당번제 이야기도 나왔지만 둘 다 그렇게 해결하기를 원치는 않았다. 명쾌한 솔루션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우리는 어른인데 이것 하나 해결 못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제삼자가 이 장면을 보는 것을 상상해 보았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상한 기분을 누르며 앞만 쳐다보고 차분하게 얘기하는 부부. 관객은 귀를 기울여 내용을 들어본다.


아내: 오빠가 나보다 더 깔끔하기 때문에 내가 신경을 써도 성에 차지 않을 거야. 당번제는 어때.


남편: 그래도 당번제는 됐어. 내가 설거지 더 많이 하는 건 크게 개의치 않아. 내가 원하는건 너가 좀 주위를 둘러보는거야. 내 눈엔 보이는게 너한텐 안보이는 것 같아.


아내: (침묵)


남편: 이것만 지켜줘. 먹은 그릇은 식탁에 놓지 말고 바로 물에 담가놓자. 그리고 사용한 재료나 양념은 다시 넣어줘.


아내: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계속 했던 것 같은데. 알겠어.


이렇게 기운 빠지는 연극이 있나. 세상 심각한 톤으로 나누는 대화가 고작 이런 것이라니.


며칠이 지난 지금, 이 설거지 문제는 의외로 풀리게 되었다. 해법 중 하나로 나왔던 식기세척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말끔하게 닦인 그릇들이 따듯하게 건조되어 나오는 점이 나는 무척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내가 자발적으로 온갖 컵과 그릇들을 수시로 로딩/언로딩을 하는 중이다.


그래서 지금 당신은 “아내는 식기세척기와 합이 좋았고, 둘은 합세해서 남편을 설거지로부터 해방시켜주었습니다”로 행복하게 끝나는 이야기를 읽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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