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치로 생일 초에 불을 붙이다.
어제 이사를 마쳤다. 바리바리 싸들고 온 짐에 터져나갈것 같은 새집을 닦고 구석구석을 씻어내느라 허리가 나갈 지경이었다. 몸도 힘들지만 마음 한 켠을 지그시 누르는 불편한 무게가 나를 조금 더 힘겹게 했다.
이름 조차 낯선 자치구에서 또 다시 삶의 터전을 꾸려 나가야한다는 사실에 홀로 떨어진 이방인 처럼 외로웠다.
나는 애석하게도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다. 불안한 것을 못 견디는 성격이라서 그런지 익숙하고 편한 것, 안정적인 포지션에 기대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여러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에 얽혀 안정적으로 꾸려놓은 터전 밖으로 나와야하는 순간들이 있다. 아주 오래 전 내 조상이 더 이상 채집할 것이 없어 다른 동굴로 떠나온 것과 같은 이유로, 나도 이사를 와야 했던 것이다.
이사를 마친 다음 날은 나의 생일이었다.
여러 사람들에게 장문의 메시지를 받고 애정어린 선물을 받는 기쁜 날이지만 원래 생일을 같이 보내기로 약속한 엄마는 바쁜 일이 있었고, 남자친구는 피치못할 사유로 본가에 내려가 있었다. 서울에 살고 있는 친구들은 몇 있지만 선뜻 내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시간을 내달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딱 세명을 빼고.
나는 그 중에 중학생 때 부터 알아왔던 K와 시간을 보냈다. 오늘까지 해치워야하는 방청소를 일정량 끝내고 난 저녁 시간이었다. 우린 내가 좋아하는 프랜차이즈 맥시칸 집에 가서 맛있음에 몸을 부르르 떨며 식사를 하고, 유독 더 입에 착 붙는 병맥주를 곁들여가며 여러가지 수다를 늘여놓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선 아무런 서치도 없이 마음에 드는 카페를 발견해 들어갔다. 주문을 받은 직원분이 쿠폰을 받을건지 물어보셨는데 실물 쿠폰을 잘 모으지 않는 내가 거절하자마자 K가 대뜸 달라고 말했다. 적어도 40분은 걸리는 역에 살고 있는 친구라서 의아하게 쳐다봤더니 강제로 쿠폰을 쥐여주며 말했다. "앞으로 나랑 자주 올테니까 챙겨둬." 그게 너무 어이 없어서 말문이 막히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마음에 드는 자리에 앉자마자 화장실이 급해서 볼 일을 보고 나오려는데 친구가 무척 다급한 말투로 "나오지마! 나오면 안 돼!" 라고 외쳤다. 몹시 긴박하고 큰 일이라도 난 듯한 말투여서 진심으로 몇 초간 밖에 전쟁이라도 났나 생각했다. 전쟁은 아무래도 현실성이 조금 떨어지는 것 같아서 침착하고 평범하게 다시 생각해보기로 했다. 오늘은 내 생일이고, 무언가를 내게 들키고 싶지 않아 한다. 아하!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필시 생일 케이크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겠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세면대에서 최대한 느릿느릿 다시 한 번 손을 씻었다. 어라, 마침 핸드 솝이 이솝꺼네. 하하. 이거 그냥 지나칠 수가 없구만. 아주 박박, 구석구석 씻어주겠어. 하면서.
손을 다 씻어갈 때 쯤 화장실 입구의 얇은 커텐 너머로 두개의 불빛이 이상할 정도로 크고 환하게 피어올랐다. 이어 케잌을 조심조심 내려놓고 내게 다가오는 실루엣이 보였다. 차가워진 손을 탈탈 털며 물었다. "나 이제 나가도 되니?" 친구가 답했다. "나와도 돼! 아씨 다 들켰어!!" 나가면서 다시 내가 뭐라고 궁시렁거렸는데, 지금 기억나는 건 친구가 그 사람 많은 카페에서 높낮이를 전혀 신경쓰지 않고 불러주던 생일 축하 노래 뿐이다. 그렇게 당당하고 나를 그 공간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생일 축하 노래는 정말 오랜만이거나 처음인 것 같았다. 초반에는 기쁘면서도 눈치가 보여 주변을 스윽 둘러봤는데, 직원 두 분께서 함께 웃으면서 박수를 쳐주셨다. 그걸 확인하자마자 안심이 되고 즐거워져서 꾸벅 인사를 하고, 마무리는 파티를 즐기는 개츠비 처럼 양팔을 옆으로 뻗고 어깨를 으쓱이면서 미소를 짓는 오만한 포즈로 피날레를 장식했다.
자리에 앉고서야 생일 초에 관한 후일담을 들었는데, 친구가 다른 카페에서 미리 사온 케이크에 대한 양해를 구하고 불을 빌리려하자 비흡연자라 라이터가 없다고 하셨단다. 주인 두 분께서 잠시 고민을 한 끝에 토치로 불을 붙여주셨다고. 와규 초밥을 만들 때 엄청난 화력으로 불을 뿜어내며 고기를 익히는 그 토치로 말이다. 그제야 커텐 너머에서 이상할 정도로 환했던 불의 정체를 납득하게 되었다. 너무 웃기고 신기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듣다가 크게 웃었다. 갑자기 이번 생일이 엄청나게 느껴졌다. 마치 2020년에 일어날 엄청난 일의 전조 같았달까. 친구와 나는 생일 초를 토치로 켜다니 스케일이 다르다. 벌써 대성할 기운이다. 하면서 깔깔깔 웃었다.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사는 동네와 친구의 직장이 꽤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집에 가구를 제대로 들이고 자리를 갖춰놓으면 자주 와서 지내고 가기로 했다. 세상에 혼자인 듯한 기분이 들 때, 이렇게 마음의 빈 자리에 꼭 끼워 맞춘듯 들어와주는 사람이 있어서 참 감사하다. 덕분에 새로운 환경에서 시작하는 앞으로의 내 삶이 얼마나 풍성해질지 기대가 된다.
오늘 낮 까지만 해도 낯선 환경을 둘러보며 이게 잘 한 일일까? 불안해하고, 그 마음을 훔쳐내듯 방의 구석구석을 닦았는데, 친구가 들어와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 동네가 더 익숙해지고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한 기대감이 생겼다.
더 이상 열매 맺지 않는 나무 앞에서 다시 잎이 돋아나기만을 기다리지 않고, 과감히 동굴을 이동해 다양한 과실들을 맛봤던 선조들의 삶 처럼 다른 곳에서 다양한 삶을 체득할 내 앞날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그 친구에게 정말로 고마운 하루이자, 뜻 깊은 생일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사진으로 남기지 않았기에 글로써 기록한다. 나의 무척이나 주관적인 시선으로 간직하는 추억이라 더욱 의미가 깊다.
새로 이사한 집에 아직 원탁을 조립하지 못했지만 조만간 설치해서 거기서 글을 써나갈 계획이다.
그게 이 브런치의 명이 원탁의 세희인 이유다. 전투하듯 밖에서 돈을 벌고, 집에 돌아와서 노트북을 켜서 문장을 고르고 생각을 적어내려가는 일이 쉽지만은 않겠지만, 앞으로 잘해보고 싶다.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스토리텔러라는 꿈에 한발짝 다가가기 위해서.
내가 노트북을 켤 수 있게 많은 생각을 불어 넣어주고 이사한 후 초고속으로 평안한 밤을 선물해준 K에게 진심으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