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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Aug 15. 2021

꼭 뭐가 돼야 하나?

발 닿는 데로 성장하기

어릴 땐 자꾸 뭐가 돼야 된다고 생각했다.

『별과 별자리』라는 과학 만화책을 다 읽고 난 후에 하늘을 보고 저게 처녀자리가 아닐까? 궁금해했던 밤이 있다. 그럼 그날 저녁 일기장엔 어김없이 별에 대한 이야기를 적었다.

오늘 별을 찾아봤다. 하늘의 별엔 모두 각자의 자리가 있고 거기에 담긴 이야기가 너무 재밌다. 페르세포네. 처녀자리. 궁수자리...


일기장은 매일 아침 거둬서 교탁에 제출됐는데 하교할 때쯤 돌려받을 수 있었다. 집에 와서 일기장을 펼치니 선생님이 빨간 글씨로 밑에다 메모를 달아놓았다.


"우리 슬기는 천문학자가 되고 싶나 보네? 앞으로도 별자리 많이 찾아서 적어주세요."


천문학자가 뭔지도 몰랐는데 그 후로 내 꿈은 천문학자가 됐다. 정확히 말해 천문학자가 되려면 내가 싫어하는 수리를 잘해야 되고 국내에 천문학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걸 알기 전까지 내 꿈은 천문학자였다. 교과서에서 첨성대 그림을 찢어다가 별과 별자리 책에 꽂아놓았다.



좀 더 커서 내 꿈은 피아니스트였다.

피아노를 좋아해서는 아니었고 학원을 오래 다니다 보니 주변 사람들이 다 피아니스트 될 거지? 물어봐서였다. 아니, 난 피아니스트 안 될 거야.라고 말하기에 학원을 다니는 이유가 없어져버리는 것 같아서 응. 피아니스트.라고 대답해버렸다. 꿈이라고 발음하면 뭔가 정말 거대하고 거창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이렇게 간단히 정해지다니 이제와 생각해보니 우스운 것이었다.


피아노 학원을 거의 10년은 다닌 것 같은데 악보를 보는 건 항상 어려웠다. 검은 건 문자고 흰 건 종이였는데 누가 이렇게 형이상학적인 그림을 그려놓은 건지 싶었다. 한 구간을 틀리면 다음 마디로 넘어가지 못한 채 계속해서 같은 구간을 반복했다. 손가락이 너무 아팠다.


피아노 한 대 당 한 명씩 배정된 골방에서 나는 자주 딴짓을 했다. 엘리제를 위하여의 엘리제는 누구일까. 오펜바흐 오페레타 천국과 지옥 서곡에 오페레타는 뭘 뜻하는 걸까. 바흐는 왜 머리를 땋았을까. 천국과 지옥은 어떻게 생겼을까. 공상하고 앉아있으면 어김없이 선생님이 방문을 열었다.


피아노 선생님은 콩쿨을 나가려면 이 악보를 모조리 외워서 완벽하게 쳐야 한다고 했다. 자주 화를 냈다.


"이렇게 치라니까! 이거! 이거!"

건반 위에서 선생님의 손가락 뼈가 가없이 돌출됐다. 그럴 때면 피아노 음이 강강강하고 내 귀에 내리 꽂혔다. 차마 그 앞에서 나는 콩쿨을 나가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할 수 없어서 울음을 삼키며 건반을 두드렸다. 콩쿨 날짜는 갈수록 가까워져 왔는데 손가락은 아프고 물러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나는 곡을 전부 다 외워버렸다. 물론 악보를 보고 외운 건 아니었다. 틀릴 때마다 선생님이 쳐주는 걸 귀로 듣고 외웠다. 혼나기 싫어서 통으로 외워버린 소나티네 때문인지 그 후로 나는 절대음감이 됐다.


피아노를 그만둔 지 십몇년이 지난 지금도 어떤 곡을 듣든 계이름이 술술 나올 만큼 생활에 전혀 쓸데없는 신기한 능력을 얻게 됐다. 그마저도 정상적으로 익힌 게 아니라서 온음은 정확히 맞추지만 반음은 듣고 맞추기 어려울 때가 많다.


"재능 있어요 어머니. 슬기는 하면 잘할 것 같은데 딴생각도 많이 하고 눈만 깜박하면 늘 책만 끼고 있어서요."


책을 끼고 산다.라는 여섯 글자에 방점을 찍어버린 엄마는 그다음 달 피아노 학원 등록을 끊어버렸다.


"너는 공부해야 돼. 그렇게 책을 좋아하는데."


동화책과 소설책과 만화책을 좋아하는 게 공부로 이어질지는 몰랐는데, 어찌 됐든 엄마가 하라 그러니깐 열심히 해야 했다. 성적이 좋았고 욕심도 많았다. 매 학년 반장을 도맡아 했고 적극적이었다. 손들고 내 생각을 발표하는 게 너무 좋았다. 뜻밖에 다리를 다치기 전까지는 착하고 똑 부러지는 딸이었다.



2탄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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