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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기 Jun 21. 2021

날이 너무 좋아서 회사 가기 싫네

성수동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봇이라는 로봇 카페다. 이 카페는 로봇이 커피를 내리고 디저트를 만든다. 커피 맛이 좋은데 언제 가든 이 맛이 변함이 없을 거라는 게 큰 장점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장점은... 이곳의 테라스다. 탁 트인 옥상 테라스에서 받는 햇빛, 저 멀리 보이는 지상철의 움직임이 마음에 쏙 든다. 정말이지 아무 생각 없이 쉴 수 있는 몇 안 되는 순간이다.


오전부터 바쁘게 업무를 보고 점심에 봇에 가서 동료들과 함께 커피를 마신 날이었다.  


"슬기님, 새벽에 운동하고 오셨어요?"

"아니요. 오늘은 늦게 일어나서 퇴근하고 가려고요"


대화를 듣고 있던 또 다른 동료가 불쑥 물었다. 여기 함께 온 건 처음이었다.


"며칠이나 가요? 월화수목금?"

"네. 지키려고 노력해요."


 말에 놀란 그가 물었다.


"주말에는 안 가시죠?"


일할 때 합이 잘 맞아 좋아하는 동료였다. 오늘은 또 같이 무슨 일을 할까 출근길이 설렐 만큼 좋은 적도 있었다.


"평일에 못 갈 때는 가요. 주 오일 지키려고 노력하거든요."


동료는 질색했다. 그러고서도 호기심이 일었는지 재차 물어왔다.


"가기 싫을 때 없어요?"  

"가기 싫을 때도 있죠."


이해가 안된다는 듯 바라보는 동료를 향해 어색하게 웃다 고개를 돌렸다. 지상철오고 있었다. 좀 아까 지나간 것 같은데 다시 또 들어오는 거였다. 2호선이 순환선이라서다.  





아침에 일어나 일을 하고 하루 한 시간 운동을 한 후 잠이 드는 일.

자칫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 일상은 순환선처럼 매일같이 반복되는 내 루틴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기 싫을 땐 하지 않는 게 좋다고 한다… 너무 열심히 살 필요가 없다 한다… 그래 봤자 달라지는 건 없는 세상이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틴을 만들고 정해져 있는 레일처럼 이걸 계속 유지하려 하는 편이다.

 

"남들이 언니 보고 프로열정러라고 하지 않아?"


친한 동생이 이렇게 말할 만큼 나는 시간 단위로 일, 운동 스케줄을 조율하는 편인데 의식적으로 부지런해지려 노력한다. 이건 내가 천성적으로 부지런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계처럼 딱딱 떨어지면 좋겠지만 영 쉽지가 않다. 그렇다면 대체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20대의 절반을 있는 돈 없는 돈을 모두 끌어모아 여행을 다녔다. 연간 해외여행을 세네 번, 많게는 다서 여섯 번까지도 가면서 '나는 왜 이렇게 떠나고 싶을까'에 대해서 자주 생각했다. 명품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허례허식을 좇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경험을 하고 싶었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가능성이 많은 내가 되고 싶었다. 바꿔 말하면 그때의 나는 가능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느낌이었고 스스로의 입지 또한 작다고 느꼈던 것 같다. 마크 맨슨의 책 <신경 끄기의 기술>에는 이런 말이 나오는데


폭넓은 경험을 추구하면, 새로운 사람이나 사물, 새로운 사건을 하나씩 접할 때마다 얻는 것이 줄어든다. 처음으로 집을 떠나 다른 나라를 방문하면 세상을 보는 눈이 확 바뀌는데, 그건 기존의 관점이 좁은 경험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20개국을 돌아다니고 나면, 21번째 나라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줄어든다. 또 50개국을 돌아다니고 나서 51번째 나라를 갔을 때 얻을 수 있는 건 그보다 훨씬 더 적어진다.


여행을 밥 먹듯 다닐 땐 공감하지 못했는데 지금 다시 읽으니 왠지 그럴듯한 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달라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일상에 루틴을 만들고, 되도록이면 이를 벗어나지 않으려는 이유가 여기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


당장에 운동을 안 가도  건강은 괜찮겠지만, 일을 열심히 해도 어차피 근로 소득은 정해져 있겠지만 습관처럼 하는 일들이 지금 있는 자리에 발을 붙이게 하니까, 떠나지 않으려고 일상에 더 지극한 게 아닐까.


"나는 진짜 다 싫어지면 동남아 가서 다이빙하고 살려고."


실제로 이런 말을 입버릇처럼 할 만큼 거주지나 생활권역에 대해 별 미련이 없을 때가 있었다. 지금과는 전혀 다르게 말이다.




지상철이 또 들어오고 있었다. 적당한 시간 간격을 두고 똑같은 레일에 비슷한 속도로 들어오는 건데도 이상하게 볼 때마다 좋았다. 로봇이 정량대로 똑같이 블랜딩 했겠지만 이 곳 커피는 올 때마다 맛있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하는데 옆에서 동료가 말했다.


"이제 돌아갈까요?"


점심시간이 벌써 끝나 있었다. 테라스에서 내려오며 에게 물었다.


"오늘 여기 안 왔으면 후회했겠죠?"

"네. 좋네요. 생각보다 더"


돌아가는 길엔 입버릇처럼 투정을 했다.


"날이 너무 좋아서 회사 가기 싫네."


이렇게 말해도 들어가면 또 열심히 일할 거면서 날씨 탓에 괜한 투정을 부리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투정을 부리는 와중에도 어느새 둘둘이 모여 업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좋은 게 왜 좋을까.  일을 좋게 만들어야 할까. 운동을 왜 힘들게 해야 하는 걸까. 그래도 이런 질문을 계속하는 게 아무 생각 없이 지내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령 매일 하는 운동에서 나는 이런 순간이 참 좋았다. 

"아 정말 힘드네…" 운동 끝나고 탈진하는 사람들 입이 웃고 있을 때. 기진맥진해서 골골대면서도 "근데 재밌죠?"라고 말할 때. 나 또한 "아 죽을 것 같아…"라고 말하면서도 다음 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았다."라고 미소를 감추지 못할 때.


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엄청 도움이 것 같은 순간.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디어나 콘텐츠를 냈다고 생각될 때 기분이 좋았다. 문제 해결을 통해 상황을 호전시키며 뿌듯해할 때도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힘든 순간에도 '좋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좋고, 내가 하는 운동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운동이기 때문에 좋고, 일을 열심히 하든 그냥 대충 하든 사는 게 크게 달라지지 않겠지만 순간의 보람 때문이라도 이왕이면 잘해보고 싶은 게 크다.


이를 알게 되니 등 뒤로 내리쬐는 볕이 유난히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오후였다. 물론 날이 너무 좋아서 그대로 들어가긴 왠지 모르게 억울한 날이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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