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놂작가 Jul 26. 2023

사라진 남자의 꼼장어

기운 센 을지로입구 식탐러의 워크&푸드 로그

종로2가와 3가 사이 소위 젊음의 거리라고 불리는 술집 골목엔 허름한 노포들이 즐비해 있다.

그 중 안국역 부근에 본점을 두고 있는 '공평동 꼼장어'는 내가 굉장히 즐겨 찾는 술집 중 하나다.

회사 인근에서 술을 마실 때면 열 번 중 두어 번 정도는 꼭 공평동 꼼장어 1호점이나 2호점으로 향하게 되니 이쯤 되면 단골이라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사실 나는 꼼장어를 못 먹는다.

외관이 징그럽기도 하고 눈 질끈 감고 먹어본 결과 식감도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평동 꼼장어에 가는 이유는 그곳의 분위기와 꼼장어라는 메뉴가 선사하는 특유의 남성적 바이브 때문이다.

철판 위에 익어가는 꼼장어며 불돼지를 앞에 두고 달디 단 소주를 목젖으로 마시며 사는 이야기를 하릴 없이 나누는 남자들의 우정.

쓰잘데기 없는 잡담에 조금은 거친 농담을 섞어 늘어 놓다가도 누군가 하나가 진지해지면 말 없이 술잔을 기울여 건배 한 번에 남은 술을 털어 넣고는 가만히 귀를 기울이는 그 분위기를 정말이지 좋아한다.



소주잔 부딪히는 소리, 정말 영롱하다.[사진 출처 : https://m.blog.naver.com/hyr67/221588500208]


그래서 나에게 꼼장어란 의리다.

바빠 미쳐 돌아가는 시즌에도 친구의 번개 약속을 잡는 전화 한 통에 이것 저것 재지 않고 오케이를 외치는 의리.

꼼장어를 먹지 못해도 불판에 꼼장어 구워서 꼼쏘나 한 잔 하자는 제안에 흔쾌히 동의하는 의리.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친구에게 서툰 위로의 말 대신 묵묵히 앞에 놓인 빈 잔을 채워주는 것으로 마음을 전하는 의리.


가끔은 예쁘게 차려 입고 팬시한 맛집에 가 수다를 떨거나 힙하다는 술집에 가서 이것 저것 주문해서 맛을 보고 싶은 욕구도 있지만 역시 나는 퇴근 후 당연하다는 듯 꼼장어 집에 가서 가방을 아무데나 내려 놓고 털썩 주저앉아 얼큰하게 소주 한 잔 먹는 편이 취향에 맞다.

숙취에 시달리며 다시 술을 마시면 내가 사람 새끼가 아니라고 공언하다가도 오후 5시쯤 되면 슬며시 여기 저기 연락해서 급 만남을 잡던 시절이 그립다.


아쉽게도 나와 꼼장어 바이브가 맞는 친구들은 대부분 남자 애들이고 그네들은 지금 모두 결혼해서 가정을 꾸린 아이 아빠이자 유부남이다.

아무리 우리끼리는 서로 호형호제 하는 불알 친구 사이라고 해도 친구의 부인에게 애꿎은 근심의 씨앗이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기 때문에 이제 나는 나의 꼼장어 친구들을 만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혼자 가서 마시기엔 그 정취가 살지 않아 내 추억의 공평동 꼼장어에도 발길을 끊은 지 오래다.

다시 거기에 가서 꼼장어에 소주 각 2병씩 하려면 차라리 결혼을 해서 아무 때나 만날 수 있는 남성 친구이자 남편을 만드는 방법 밖에는 없나?

아무래도 다시 태어나는 편이 빠르려나?

오늘따라 사라진 남자의 꼼장어가 그리운 날이다. 

작가의 이전글 크린이의 '23 오픈 참가기(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