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찬장 구석에 숨겨둔 파우치 안에서 담배를 꺼냈다.
에쎄 체인지 1미리.
재활용품을 가득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바지 주머니에 핸드폰과 담배, 라이터를 쑤셔 넣고 1층으로 내려간다.
분리수거를 마치고 끼고 있던 일회용 비닐 장갑까지 벗어 비닐류에 버린 뒤 조금 걸어 나와 재떨이로 쓰이는 빈 깡통 앞에 선다.
찰칵, 라이터에 불이 붙고 입에 문 채 톡 깨물어 민트향을 머금은 가느다란 담뱃대가 서서히 타오른다.
어떤 음악을 들으면 특정한 시간이나 공간이 생각나는 것처럼 담배를 피우면 그 특유의 향과 맛이 나를 몇 년쯤 전으로 데려간다.
퍽 혼란스럽고 격동적이었으며 무엇보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져 내렸던 불행의 언저리로.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순간들이지만 가끔씩 지금이 너무 괴롭거나 힘들 때면 다시금 나의 나락을 마주한다.
현재의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님을 스스로에게 주지시키기 위해, 이렇게 담배를 피운다.
효과는 굉장했다.
나는 순식간에 그 시절로 돌아가 격렬한 고통과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물론 이내 그 시간은 이미 나의 과거에 끝났으며 나를 위협하고 통제해 공포로 물들였던 그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이제 나는 안전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정을 찾는다.
그 이후로는 씁쓸함과 공허가 동시에 찾아온다.
아무에게도 완전히 털어놓지 못한 이야기, 진실을 말해본다 해도 그 누구도 믿지 못할 충격적인 사건이 실제로 내게 일어났고 지금까지 그랬듯 나는 이 모든 결과와 감정들을 오로지 스스로 견뎌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외롭게 한다.
그렇지만 괜찮다.
덕분에 다른 외로움은 잊혀졌고 슬픔도 옅어졌다.
담배 한 대가 다 탈 동안 나는 과거로 그리고 현재로 정처없이 고독 속을 헤매다 결국 평안을 찾는다.
현재의 불행은 과거의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시시한 감정에 불과하다.
그래서 끊으려던 담배를 버리지 못하고 이따금씩 손을 댈 수 밖에 없다.
어쩌면 나는 불행에 중독된 걸지도 모른다.
지금이 아닌 그 때의 강렬한 불행에.
그래선 안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 기억이 주는 강렬함과 현재에의 망각을 끊어낼 수가 없다.
냄새도 좋지 않고 입 안이 텁텁한 느낌도 싫지만 삶이 고단할 때 나는 어쩔 수 없이 과거로 손을 뻗는다.
깊이 들이마시고 길게 내뿜어지는 연기를 멍하니 바라보며 아직도 마음을 저릿하게 하는 고통과 공포를 떠올리다 보면 금세 괜찮아져 버리니까.
이 강력한 효과를 포기할 수 없어 오늘도 내 파우치 안에는 에쎄 체인지 1미리가 싸구려 라이타 몇 개와 함께 들어 있다.
언젠가 이 파우치 째로 쓰레기통에 던져 넣을 날이 올까?
과거의 불행으로 계속해서 되돌아가지 않아도 지금을 건강하고 밝게 이겨낼 시간이 내게도 찾아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