쯔양과 서민재의 기사로 재점화된 고통에 대하여
하트시그널2에 출연했던 서민재가 가수 남태현과 마약 스캔들 이후 연애 당시 겪었던 데이트 폭력에 대한 브런치 글을 올려서 관심을 가지고 읽어 보았다.
원래 하트시그널을 재밌게 봤었고 그 중에서도 밝고 갓생 사는 이미지로 건강한 느낌을 주었던 서민재라는 출연자에 대해 개인적으로 호감이 있었다.
방송 이후 갑자기 연예인 병에 걸렸는지 잘 다니던 회사도 퇴사하고 왠지 굉장히 건강하지 못하게 다이어트를 한 듯한 마르고 퀭한 모습으로 SNS에 노출되길래 아 방송이 사람 하나 또 망쳤구나 싶었는데 유명인과 사귀다가 마약에까지 손을 댔던 거라니, 충격이었다.
그런 서민재가 약에 취해 횡설수설 남태현이 약쟁이라는 사실을 본인 SNS에 공개적으로 밝혔을 때만 해도 그냥 끼리끼리 만났구나 싶었다.
그러다 브런치에 담담히 적어 내려간 데이트폭력 기록을 읽었을 때 조금 마음이 먹먹했던 것 같다.
그녀는 글에서 여러 번 '창피하다' 는 표현을 썼다.
그게 그렇게 공감될 수가 없었다.
피해를 당한 건, 다친 건 나인데도 왜 내가 창피해야 했을까.
정작 창피할 짓을 한 놈은 저리도 뻔뻔한데 왜 창피함은 오롯이 피해자인 내가 짊어지고 가야 했을까.
그리고 어제, 유튜버 쯔양이 무려 4년에 걸친 전남친의 데이트폭력과 스토킹, 협박 및 공갈에 대한 피해 사실을 라이브 방송으로 밝혔다.
방송 중 계속해서 손을 가만 두지 못하고 불안에 하는 모습, 쉴새 없이 방황하는 눈동자와 떨리는 목소리가 몇 년 전의 내 모습과 겹쳐져 기분이 이상했다.
구독자 천만 명에 예쁜 얼굴, 선한 태도 그리고 어린 나이까지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던 그녀가 네모난 방송 화면 안에서 너무나 작고 연약하고 초라해 보였다.
곧 부서질 것만 같은 모습으로 쯔양은 말했다.
끝까지 피해 사실이 알려지지 않길 원했다고.
아마 쯔양 역시 창피했을 것이다.
서민재도, 쯔양도, 그리고 나도 우리가 당한 이 고통이 여전히 창피하고 할 수만 있다면 그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은 채 잊고 덮고 묻고 살아가고 싶다.
그러나 서민재와 쯔양은 유명인인 탓에 어쩔 수 없이 타의에 의해 스스로의 피해 사실을 말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고 어렵고 힘들게 입을 뗐을 것이다.
그리고 유명인이 아닌 나는 그들이 안타깝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전부 털어놓고 후련해지고 싶은 마음과 평생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가슴 속에 묻고 살아가고 싶은 마음이 공존해 양가감정으로 괴롭지만, 유명인이라는 이유로 원치 않은 때에 원치 않은 방식으로 피해 사실을 털어 놓고 심지어 조롱에 조리돌림까지 견뎌야 하는 저들이 짠하다.
쯔양 방송을 보고 나서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그녀가 겪은 일련의 사건들이 너무도 소름끼치도록 내 경우와 닮아 있었다.
익명의 힘을 빌어도 도저히 여기에 쓸 수 없는 끔찍한 사건들과 그걸 빌미로 한 협박, 폭언, 금전 갈취, 가스라이팅, 스토킹들이 마치 어제 일어난 일처럼 다시 떠올라 몸이 자꾸만 움츠러 들었다.
다 극복하고 모두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자만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려 쉬이 잠들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그 끔찍한 얼굴과 쉴새 없이 쏟아져 나오던 폭언들이 떠올라 공포에 사로잡혔다.
어릴 적부터 똑똑하다는 말을 안 들었던 적이 없는 데다 자타공인 기센 여자였던 나조차도 그런 상황에 직면하면 금세 자아를 잃게 된다.
이혼을 겪으며 내가 가장 약했던 순간에, 나약해진 그 틈새를 노려 목덜미를 물어 뜯기며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판단할 수 없는 상태로 전락해 버렸다.
주위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었고 그랬기에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가족에게조차 피해 사실을 말하지 못한 채 홀로 끙끙 앓아야 했다.
창피했으니까, 그리고 무언가 행동에 옮기기엔 너무도 무력했으니까.
나를 둘러싼 각종 억측과 무성한 소문도 당시엔 전혀 알 수 없었고 알았다 한들 대처할 수 없었을 거다.
그 때의 나는 생존만이 유일한 목표였기 때문에, 당장 내일 내가 살아 있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기 때문에 다른 것들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아침이 오면 그저 하루를 시작하고 밤이 오면 내일 나를 죽이는 게 그 사람일지 혹은 나 스스로일지 생각하다 지쳐 잠이 들곤 했다.
내가 죽어야 이 고통이 끝나겠구나 싶어서 몇 번이고 깊게 그었던 손목엔 아직도 흉터가 남아 있다.
희한하게도 저들의 말로는 늘 같다.
극단적 선택.
언론이 순화한 이 표현이 늘 저들의 끝이다.
내게 준 극심한 피해는 만분의 일도 보상하지 않은 채, 그 어떤 용서를 구하지도 않은 채 참 쉽게도 죽어버린다.
무책임하고 뻔뻔하고 하찮다.
당시 뒤늦게 울며 털어 놓은 내 이야기에 두 발 벗고 나서준 친구 덕분에 유능하고 멋진 변호사님을 만났다.
변호사님은 나와의 상담 이후 마치 자기 일처럼 분노하시면서도 차분하고 냉정하게 내가 취할 수 있는 조치들에 대해 알려 주셨다.
한 페이지에 다 들어가기도 빠듯한 죄목들과 증거들을 나열하며 초범이어도 이 정도면 죄질이 너무 나빠 무조건 실형을 살 거라고 하셨다.
여전히 두려움 때문에 고소를 망설이는 나를 처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며 단호하지만 부드럽게 설득해 주셨고, 언젠가 죗값을 치른 후 석방되어 나에게 해꼬지를 할 거라는 생각에 망설이고 망설이다 이러나 저러나 괴롭힘이 계속될 거라면 마지막 발버둥으로 힘껏 물기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 결심하게 되었다.
고소가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접근 금지 조치를 받은 가해자는 접근 금지 기간 중에도 끊임없이 수백 통의 전화와 문자로 협박과 구애를 일삼았고 급기야 우리집 앞에 찾아와 나를 기다리다가 잠복 수사를 하고 있던 경찰에 의해 현장 체포되었다.
왜 거기에 있었냐는 경찰의 질문에 나를 죽이려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답변한 가해자는 재판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으니 다시 생각하고 얘기하라는 경찰의 권유에도 흔들림 없이 정말 죽이려고 했다고 반복함으로써 잠정조치 4호 처분을 받아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이후 구속 수사 결정에 따라 구치소로 이감된 그는 몇 개월이나 나를 살아도 사는게 아닌 반송장으로 만든 주제에 고작 한 달 가량의 구치소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감옥에서 목을 매달았다.
쯔양의 고백에 관한 커뮤니티 글과 댓글들을 읽어 보았다.
대부분이 그녀를 응원하고 견디고 살아내 주어 고맙다는 따뜻한 글들이었지만 여전히 쯔양을 욕하고 피해자에게도 원인이 있다, 끼리끼리다 라는 2차 가해 댓글들이 눈에 띄었다.
나 역시 그 사건 이후 일의 전말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로부터 갖은 비난과 부당한 대우를 받아 오고 있다.
쉽게 입을 놀려 대는 그들 중 과연 내가 겪은 일의 일부라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있을까?
가해자는 구속되기 전에 본인의 SNS에 나를 저격하는 피드와 스토리를 여러 차례 업로드했다.
모두 허위 사실이고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이자 스스로의 망상이었다.
나의 고소 목록에는 허위 사실 유포에 따른 명예훼손이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SNS를 이용한 범죄이기 때문에 사이버 명예훼손으로 분류, 정통망법이 적용되어 더욱 강한 수위의 처벌이 가능한 죄목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사실을 해명조차 할 겨를도 없이 가해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고 그 때 그 SNS를 본 말 많은 자들은 이 자극적인 소문을 물어다 나르고 부풀리며 여전히 내게 2차 가해를 하고 있다.
그 어디로 보아도 내가 피해자인 이 사건은 무려 '스캔들' 이라는 워딩으로 둔갑하여 우수한 고과와 업무 평가에도 불구하고 나를 진급 심사에서 매번 미끄러뜨렸다.
스캔들을 일으킨 사람을 진급시킬 수 없다는 어떤 분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다고 한다.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은 내가 겪은 일의 사실 관계를 명확히 알고 있느냐고.
무엇을 근거로 내게 인사적 불이익을 준 거냐고.
이미 이 곳에서 당한 피해로 너덜너덜해진 내게 이런 부당한 조치를 하는 근거가 혹시 고작 당신이 주워 들은, 그리고 쉽게 믿어 버린 헛소문에 불과한 건 아니냐고.
스캔들과 범죄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당신이야말로 과연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있느냐고 말이다.
다시 들여다 보는 것조차 괴로운 시간들이지만 언젠가 정말 더이상 참지 못하게 되었을 때 증거로 들이밀기 위해 나는 아직도 그 때의 사건 기록과 각종 경찰, 검찰 문서들, 그리고 사진과 녹음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이제 모두 폐기하고 후련하게 다 잊고 살고 싶어도 여전히 내게 2차 가해를 하고 있는 비겁하고 무지한 사람들 때문에,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의 마지막 무기로 내 구글 드라이브와 하드디스크, 그리고 서랍 깊숙한 곳에는 나의 고통의 증거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어떤 죗값도 치르지 않고 자살해 버린 가해자에 대한 원망도 처음에는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안도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는 더 이상 나를 괴롭힐 수 없다.
재판에서 증인 심문을 받기 위해 기억들을 끄집어 내 발언할 필요도 없고 그가 석방된 이후 나와 내 가족들을 찾아와 해꼬지할까봐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된다.
불안한 나머지 이민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낯선 땅에서 여생을 공포 속에 살지 않아도 된다.
그는 이제 이 세상에 없고 다시는 내게 그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다.
누군가의 죽음이 내게 유일한 위안이 된다는 게 참 슬프지만 데이트폭력의 피해자들은 아마 모두 공감할 것이다.
그들은 일방적인 애정을 빌미로 영혼을 살해한다.
그나마 가해자가 죽어 잠재적인 위협이 제거된 나 조차도 살해된 영혼은 살려낼 수가 없었다.
괜찮아졌다고 안심하며 살다가도 서민재나 쯔양 같은 유명인의 소식이나 하루에도 몇 번씩 남자에게 살해당한 여성들의 기사를 볼 때면 자꾸만 그 때로 돌아가 위축되고 만다.
언젠가는 깨끗이 나아지리라 희망을 품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내게 남은 이 상흔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내 다친 영혼을 수습하고 거두어 잘 숨기고 살아갈 사람 역시 이 세상에 오직 나 혼자라는 사실을.
앞으로도 영원히 누구에게인지 무엇때문인지 모를 '창피함' 을 안고 견디며 살아야 하는 것도 그저 나 뿐이라는 사실을.
이렇게 영혼을 살해하느니 차라리 나를 죽여달라고 말하고 싶을 이 땅의 모든 불쌍한 피해 여성들에게 그저 심심한 위로와 공감을 전할 뿐이다.
그래도 살아 있어 달라고, 어떻게든 살아 내어 이 억울함과 고통을 뛰어 넘을 행복을 한 번 찾아보자고 감히 말하고 싶은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