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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로운달빛 Jul 23. 2023

#4. 싸움의 방식

사진: Unsplash의Hans-Jurgen Mager

아, 화가 치솟는다. 그는 MBTI 중 “T”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평소에는 그 점을 잘 느끼지 못하다가 말다툼을 할 때면 ‘아, 그는 확실히 T구나.’ 하고 느끼곤 한다. 더불어 ‘아, 나는 확실히 F구나.’하는 인식은 덤이다.


나는 어떠한 이유로 그에게 화가 (처음엔 조금) 났다. 그런데 ‘화’라는 녀석이 그렇듯 처음에는 불씨가 작다가 화를 돋우는 장작이 하나 둘 던져지면서 스멀스멀 불길이 피어 오른다. ‘화를 돋우는 장작’이란 나를 화나게 만들었던 그 상황뿐만 아니라, 과거에 유사하게 내가 화가 났던 상황까지도 포함한다. ‘아니, 저번에도 그러더니 이번에 또!’ ‘생각해보니 저- 저번에도 그랬었지!!!’ 하면서 장작은 칼춤을 추듯 신나게 화를 돋군다.




나는 말다툼에 약하다. 한 평생 누군가와 큰 다툼 없이 살아온 터라 ‘상대방의 약점을 매의 눈으로 포착하는 법’ ‘말꼬리를 잡아 뒤흔들어 상대방의 혼을 쏙 빼놓는 법’ ‘상대방이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도록 촌철살인을 날리는 법’ 따위를 습득하지 못했다. 모든 일에 있어서 ‘On the Job Training’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나에게 다툼의 경험이 일천하다는 것은 약점 중에 약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말다툼에 실패하는 이유는 당황스러운 타이밍에 차오르는 나의 눈물 때문이다. 나의 마음과는 다르게 갑작스럽게 눈물샘을 비집고 나오는 이 녀석 때문에, 나는 결국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눈물을 뚝뚝 흘리곤 한다.


그나마 일말의 컨트롤이 가능한 상황이라면 허벅지를 찌르며 고인 눈물을 쓱 닦고는 문을 박차고 나가버리지만, 최악은 어찌해볼 새도 없이 바보처럼 엉엉 울어버릴 때이다. 이 눈물이라는 놈은 눈물샘을 비집고 나올 태세를 갖추면 ‘나 곧 나간다. 준비해라이!’하며 울컥울컥 신호를 보내는데 그때마다 나는 그녀석이 절대 나오지 못하도록 온몸에 힘을 준다. 그러다보면 부작용으로 눈을 심하게 깜빡인다거나 입을 씰룩씰룩 한다거나 하는 신체 반응이 나타나는데, 그 모습이 매우 우스울 것으로 예상이 되면 더 비참해진다.


나의 마음은 필사적으로 소리친다. 아니, 이 눈치 없는 눈물아! 지금은 나올 타이밍이 아니라니까?! 나는 지금 아주 냉철하고 논리적으로 상대방의 잘못을 꼬집고 열거해야 하는 타이밍이라고! 물론 언제나 승자는 눈물, 패자는 나다. 나는 오늘도 너덜너덜해진 마음을 부여잡고 문을 박차고 나와 글을 쓴다.




나의 화를 돋우는 또 하나의 장작은, 내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그가 분명히 알고 있다고 생각되는 상황임에도, 나에게 말을 걸거나 화를 풀어주려고 노력하지 않는 그의 모습이다. 화가 나면 화가 난 사람이 그냥 화를 내버리면 되는 것 아니냐고? 왜, 다들 그런 경험 있지 않은가? 적당히 화가 나면 화를 팍! 내버리고 끝내지만, 머리 끝까지 화가 나면, 이것을 분출할만한 큰 사이즈의 분화구가 내 몸에 존재하지 않아, 부글부글 끓던 화는 딱딱한 용암석이 되어 가슴 속에 ‘턱!’하고 들어 앉아 버리곤 한다. 그러면 가슴이 심하게 답답해지고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용암석을 녹일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나한테 많이 화났어? 그러지 말고 우리 같이 이야기 좀 해보자~’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다.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은 남편에게 가르쳐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론 가르쳐주었다. 무려 14년 전부터.




우리의 연애 시절로 되돌아가본다. 남편은 학교에서 한창 공연 준비를 하고 있던 시즌이었다. 대학생 시절의 공연 준비란 그 시절의 체력만 믿고 무식하게 에너지를 쏟아 붓는 방식이었다. 오후 수업을 마치고 연습하고, 저녁 먹고 또 연습하고, 야식 먹고 또 연습하고, 새벽에 술 먹고 또 연습하고, 1시간 자고 일어나서 1교시 수업에 가고. 공연이 시작될 때까지 이런 스케줄의 무한 반복이었다. 나도 그 안에 속해 있었던 한 사람으로써, 누군가 시켜서 그렇게 했다기 보다는 정말 순수한 열정으로, 자발적으로 그렇게 했다는 것만은 밝혀 두는 바이다.


어쨌거나 그런 시기에 아주 오랜만에 현 남편, 전 남친이었던 그와 데이트를 하게 되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무슨 기념일 같은 거였다. 나는 오랜만에 하는 데이트에 이 옷 저 옷을 입어보고, 공들여 화장하고, 지금은 무릎 연골이 쑤셔서 신지 못하는 또각 구두에 양 발을 살포시 집어넣고 설레는 마음으로 그를 기다렸다. 목이 빠져라 그를 기다리고 있는데, 저 멀리서, (부디 그가 아니길 바라지만) 그가 분명한 실루엣 하나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공연 연습할 때 입었던 것이 분명한 학교 로고가 박혀 있는 티셔츠 차림에 다크써클 가득한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왔다. 그는 나를 만난 이후 5분에 한번씩 하품을 했다. 처음에는 ‘아이고, 연습이 많이 힘들었구나. 오늘은 맛있는 거 먹고 기운 차리게 해줘야지.’라는 마음이었는데, 어느 순간 ‘아니, 이럴거면 집에서 쉬지 왜 나왔어?!’라는 마음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나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던 포인트는 몇 날 며칠 공연 연습을 하면서도 피곤한 기색 하나 없이 사람들과 왁자지껄 떠들고 있던 그의 어젯밤 모습과, 연신 하품을 하면서도 공연 이야기만 나오면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그의 눈빛이었다. 지금이야 남편의 그런 모습이 보기 좋고, 에너지를 얻는 곳이 있다는 게 참 감사하기도 하지만, 남자친구와의 기다리고 기다리던 데이트를 설레는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던 20대 초반의 나에게는 그것이 엄청나게 서운했다. 나와 함께 하는 시간에는 하품을 멈추지 않으면서 공연 준비할 때는 열정을 넘치는 그의 모습이 못내 섭섭했다.


당시의 나는 밑도 끝도 없이 ‘나 집에 갈래!’와 함께 ‘내가 연락할 때까지 연락하지 마!’ 콤보를 시전하며 팽하고 자리를 떴다. 연애 경험이 별로 없었던 20대 중반의 그는 ‘나 집에 갈래!’가 ‘어서 나를 붙잡고 재미있게 놀아줘라.’라는 뜻이고, ‘내가 연락할 때까지 연락하지 마!’는 곧 ‘연락 안 하기만 해봐라.’ 라는 뜻이며 ‘입을 꾹 닫고 있다는 것’은 ‘나에게 말을 걸어줘.’와 같은 뜻이라는 것을 미처 몰랐고, 어버버한 상태로 나를 보냈다.


왜 솔직하게 말하지 않느냐, 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그저 빅뱅의 태양도 ‘내가 바람 피워도 넌 절대 피지마.’라는 내로남불 끝판왕의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만 남겨두겠다. 원래 연애 중인 남녀는 때때로, 아니 자주 비이성적, 비합리적이기 마련이다.


그 이후 그는 정말로 한참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아, 연락하면 안되는 구나.’라고 생각했고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영문도 모른 채, 연락해도 된다고 할 때까지 노심초사 기다렸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그는 ‘내가 연락할 때까지 연락하지 말라.’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들었을 뿐인데, 그것이 내 분노 게이지를 더 높였다는 점이 아주 억울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그에게 여자의 말에 숨겨진 서브텍스트에 대해 일장연설을 해주었다. 자기가 공연 연습할 때 대사 분석하면서 그 대사가 내포하고 있는 서브텍스트에 대해 연구하지? 그런거라고 생각하면 돼~ 라고 하면서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나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그는 ‘정말이지이해가안되지만이해하도록노력해볼게.’라는 표정으로 내 말을 들어주었던 기억이 난다. 에잇, 못해먹겠다! 라고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끄덕하던 착한 곰.


학습 효과가 뛰어났던 곰은 그때의 일을 기억하며 내가 ‘오지마.’라고 하면 꾸역꾸역 찾아와서 나를 뿌듯하게 만들어주곤 했다. 그러나 연애와 결혼 포함 지난 14년간 우리가 다툰 적은 정말 손에 꼽았기 때문에 충분한 ‘On the Job Training’이 안되었던 그는 아직도 나의 서브텍스트를 읽지 못하고 나를 활활 불타오르게 한다. 여보, 내가 화가 나서 입을 다물고 있을 때는, 어서 말을 걸어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가장 빠르게 해결하는 길이라는 것을 꼭 기억해두길 바라.




남편을 주제로 에세이를 쓰면서 이왕이면 연애와 결혼을 장려하는 에세이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번 편을 쓰다보니 어느 남성 분이 ‘세상에 정말 피곤하군. 역시 혼자 사는 게 낫겠어.’라고 혀를 내두르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런 남성 분이 계시다면 지금 당신 곁에 있는, 혹은 당신 곁에 있었으면 하는 그녀를 한번 떠올려보라. 나보다 훨씬 솔직하고, 서브텍스트 따윈 없는 직설적인 화법의 소유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유레카. 적어도 우리집에서 나에게 사육 당하는 곰 한마리보다는 덜 피곤한 연애 및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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