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혜로운달빛 Jul 26. 2023

#5. 재주는 곰이 부리고 칭찬은 사육사가 받는다.

사진: Unsplash의Hans-Jurgen Mager

***편의상 내 이름은 '달빛'으로 하고, 남편 이름은 '웅남(熊男)'으로 하겠다. 내 이름이 상대적으로 훨씬 세련된 것 같아 남편에게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기는 하지만 글쓴이는 나인데 어쩌겠는가. 


너 자꾸 그러면 울 엄마한테 이른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고 하니, 초등학생 둘이서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아니라, 30대 후반 아내와 40대 초반 남편이 서로의 머리끄덩이를 잡으며 씩씩거리는 소리이다.


남편에게는 못된 취미가 하나 있다. 그의 핸드폰 사진첩에는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폴더가 하나 있는데, 그곳에는 나의 사진들이 잔뜩 들어있다. 여기까지만 들으면 '사랑스러운 아내의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오나 보다.' 하며 로맨틱한 상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정반대이다. 


그 사진 폴더에는 내가 어쩌다 넘어져서 바닥을 구를 때나, 침을 흘리며 자고 있거나, 깔깔대며 웃다가 자기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린다거나 하는 때를 놓치지 않고 순간 포착한 몹쓸 사진과 동영상들이 가득 차 있다. 우울할 때마다 그 폴더를 열어보면 우울감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나 뭐라나.


어쨌거나 오늘도 남편은 내가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앉아 있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도촬 한 후 <웃으면 복이 와요> 폴더에 넣으려다가 나에게 붙잡혔고, 우리는 핸드폰을 사이에 두고 빼앗으려는 자와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가 되어 한바탕 전투를 벌였다. 맨 위 대사는 전투 끝에 결국 패배한 내가 내뱉은 단말마의 외침이었다.


"흥! 너네 엄마 내 편이거든?"

남편은 분해서 방방 뛰는 내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콧방귀를 뀌며 태연하게 응수한다. 젠장, 반박할 수 없다. 울 엄마는 남편 편이 맞다. 


"너 그럼 진짜 너네 엄마한테 이른다?"

그러나 나에게도 내 편이 있다. 바로 남편의 엄마, 나의 시어머니이다.


"반칙이지! 울 엄마는 니 편이니까 그건 안돼!"

남편이 버럭함과 동시에 우리는 2차전을 시작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초4인 큰 딸이 '요즘은 초딩들도 그렇게는 안 싸운다'며 혀를 끌끌차며 지나갔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편이 되고, 장모님이 사위 편이 된 사연은 따로 있다.




내가 '아들 여자 친구'에서 '예비 며느리'로 레벨업 된 시점에 예비 시어머님을 만났을 때, 어머님은 나의 양 어깨를 붙잡고 묵직한 입술을 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달빛아, 진짜 우리 웅남이랑 결혼할 생각이냐?


어머님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물으셨기 때문에 나는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버버 하고 말았다. 설마... 우리 웅남이는 아침밥을 꼭 챙겨줘야 하고, 생일날에는 꼭 9첩 반상을 챙겨줘야 하고, 안부 전화는 매일 해야 하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90년대 아침 드라마에서 나올법한 말씀을 하시려는 것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


"달빛아, 반품이나 A/S는 안된다. 한번 데려가면 끝! 나중에 어머님, 웅남이가 씻지를 않아요, 아침에 일어나질 않아요, 청소를 안 해요 그러니 A/S 해주세요 해도 엄마 손 떠난 거라 어쩔 수 없으니 네가 고쳐 써야 한다. 그러니 잘 생각하거라."


라며 예상치 못한 워딩으로 급습하셨다. 당시의 나는 어머님의 말씀이 너무 웃기기도, 황당하기도 해서 그저 사람 좋게 깔깔 웃으며 "당연하죠 어머님!" 하며 그 순간을 넘겼던 기억이 난다. 그때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했다. '호호 어머님, 안 씻고, 안 일어나고, 청소 안 하는 건 저랍니다. 웅남이가 저에게 반품 딱지를 붙일지도 몰라요.'




사실 어머님의 말씀과는 다르게 연애 기간 동안 그는 오히려 꽤나 깔끔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옷도 깔끔하게 세탁해서 반듯하게 다림질해 입고 다녔고, 늘 비누향이 났으며, (나의 콩깍지가 눈에 이어 코까지 씌었던 것일 수도 있다.) 그의 자취방에 있는 잡동사니들은 언제나 제자리에 놓여있었다. 잠을 많이 자는 것은 곰의 태생이니 그러려니 했다.


연애 기간 중에는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 설마, 결혼 후에 본색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겠지? 하는 생각에 등줄기가 싸해져서, 어머님의 말씀이 진짜인지 그에게 사실 확인을 요구했다.


"아, 군대 가기 전에는 좀 그렇긴 했지. 근데 군대 갔다 와서 싹 바뀌었어."


그랬다. 그는 군생활 동안 칼각으로 다림질하는 법을 배워왔고, (지금도 다림질은 남편 몫이다. 다리미질 몇 번 만에 주름 하나 없이 반질반질하게 만드는 실력을 보고 나는 일찌감치 전투력을 상실했다.) 내무반 관물대를 정리하며 오와 열을 맞춰 물건을 정리하는 법을 터득했던 것이다. 제대 후에는 대학교에서 자취를 했고 본가에는 자주 가지 않았으니 어머님이 그의 변화된 모습을 모르실 도 했다.




그런데 그런 어머님의 오해가 뜻하지 않게 나에게 아주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결혼 후 우리의 신혼집에 방문하신 어머님은 '우리 웅남이가 달라졌어요!'라며 만세를 부르셨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욕실로 직행해서 목욕재계를 한다거나, 시키지 않았는데도 식사 후 설거지를 착착 해낸다거나, 먼지 한 톨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근엄한 표정으로 돌돌이 테이프를 들고 방바닥을 문지르는 모습이 어머님께는 무척 생소했던 모양이다. 그런 남편의 모습을 보고 어머님은 말씀하셨다.


"아이고, 달빛아 고맙다. 널 만나서 웅남이가 사람이 됐지 뭐니."


뜻하지 않게 화살... 아니 하트가 나에게 날아들자 나는 깜짝 놀랐지만 굳이 이 기분 좋은 오해를 해소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도 그저 사람 좋게 웃어넘겼다. 물론 남편은 자기는 원래 결혼 전에도 잘했다며 방방 뛰었지만, 이미 어머님의 두 눈은 하트로 변한 뒤였다.


그 이후로도 어머님은 나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남편이 살뜰하게 아이들을 챙기는 모습을 보며, "달빛이 네가 아이들에게 잘하니 웅남이도 잘하는구나." 하셨고, 꼼꼼하게 지출 관리하는 모습을 보며, "용돈 주면 하루 만에 홀라당 까먹던 녀석이었는데, 달빛이 한 테 배워서 이제 돈관리도 할 줄 아는구나." 하셨다. 사실 나는 남편곰을 우쭈쭈 해주는 것 외에는 하는 것이 없는데, 재주는 곰이 넘고 칭찬은 내가 받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반면 남편이 가끔 이상한 행동을 하면 "쯧쯧, 쟤는 정말 왜 저런다니? 달빛아 확! 반품 해버리거라." 하시며 '잘 되면 며느리 덕, 못 되면 웅남이 탓'의 기조를 지키셨다. 덕분에 어머님과 나는 고부간의 갈등이 아닌 고부간의 화합으로 대동단결 할 수 있었고, 나는 유쾌한 시집살이를 이어갈 수 있었다.




결혼 생활 11년 차가 되어 돌아보니, 우리 어머님이 정말 현명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어머님이 '잘 되면 웅남이 덕, 못 되면 며느리 탓'을 하셨다면 내가 남편과 시댁에 잘하고자 하는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점차 페이드아웃 되었을 것이고, 기혼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시댁 험담에 앞장섰을지도 모른다.


친정 부모님께도 시부모님이 나를 매우 예뻐하신다는 말만 전하기 때문에, 그것이 사위 사랑으로 되돌아오는 선순환이 일어난다. 지금도 친정 부모님은 우리가 찾아뵈면 나는 안중에도 없고 "아이고 우리 웅서방!" 하시며 버선발로 뛰어나오신다. 시어머님의 현명한 처세 덕분에 그의 아들 웅남이는 사랑을 담뿍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올해도 양가 부모님과 다 같이 함께 하는 여름휴가가 예정되어 있다. 우리가 매년 양가 부모님과 함께 휴가를 보낸다고 하면 열에 아홉은 '히익!' 하며 내가 잘못들은 것이 아니냐는 표정을 짓고, 나머지 하나는 눈가가 촉촉해지며 안 됐다는 눈빛을 보낸다. 사실 이런 휴가가 전혀 힘들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힘든 이유는 양가 부모님이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지금은 멀쩡해 보이지만, 얘가 어렸을 때 어땠냐면요.' 하시며, 제 자식의 어릴 적 허물을 자꾸 들춰내시기 때문이다. 물론 마지막에는 '웅남이 덕에' '달빛이 덕에'를 빼놓지 않고 공을 서로의 자식에게 돌리는 것도 잊지 않으신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래 나의 못난 과거쯤이야 술안주로 백번이고 올려져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남편곰은 전복 손질이라는 새로운 재주를 연마하고 있다. 전복의 땟국물을 말끔히 빼고, 야무지게 이빨을 제거한 후, 내장을 알뜰하게 모아 전복죽을 끓이는 재주를 선보인다. 전복을 3mm 간격으로 잘라 전복죽 위에 꽃 모양으로 데코레이션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럼 나는 뭐 하느냐고? 내가 할 일은 그저 남편곰의 엉덩이를 토닥거려 주고, 어머님께 전화드려서 "웅남이가 오늘은 이런 재주를 부렸지 뭐예요!"라고 하는 것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4. 싸움의 방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